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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낙연/당대표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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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대표 당선2. 2020년의 행보3. 2021년의 행보4. 총평

1. 당대표 당선

당선 후 수락 연설 중인 이낙연 대표
8월 29일 열린 전당대회에서 개표 결과, 전국 대의원에서 57.20%, 권리당원에서 63.73%, 여론조사에서 국민 여론조사 64.02%, 일반당원 여론조사에서 62.80%를 득표하며 무려 60.77%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대표에 당선되었다. 무려 2위 김부겸 전 행정안전부 장관과 39.40%p라는 압도적인 격차.[1]

이낙연 대표는 수락 연설에서 국민의 5대 명령을 임무로 받아들이며 그중 첫 번째로 윈스턴 처칠의 연설을 빌려 코로나19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자가격리가 끝난 직후인 31일 바로 첫 최고위원회의를 개최하고 박광온 의원을 사무총장에, 한정애 의원을 정책위의장에[2], 최인호 의원을 당 수석대변인에 임명했다. 더불어 이전에 운영했던 국난극복위원회[3]를 확대 재편하여 본인이 직접 공동위원장을 맡기로 했다.#

이날 지명직 최고위원도 같이 임명했는데 그중 한 명으로 24세 여성인 박성민 전 민주당 청년대변인을 임명했다.# 이 인사에 대한 호불호는 크게 갈리는 편이지만 찬성이든 반대든 파격적이라는 평가는 공통적이다. 박 최고위원은 당의 송곳 역할을 하겠다면서 "민주당에도 청년과 여성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반영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밝혔다.#

2. 2020년의 행보

9월 1일, 미래통합당 김종인 비대위원장과 회동하여 4차 추가경정예산안 편성에 사실상 합의하였다.# 이 대표는 김 위원장 취임 후 미래통합당의 쇄신 노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으며 2차 긴급재난지원금 지급과 관련해서는 선별 지급으로 의견을 모았다.

9월 3일부터 시작된 밤샘협의의 결과로 다음 날인 4일 오전, 대한의사협회와 의과대학 정원 확대 등 의료정책에 관한 협상을 극적 타결하고 집단휴진 중단을 끌어냈다.# 다만 원점 재검토란 표현[4]을 두고 여당 내에서 지나치게 양보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나왔는데 같은 당 이수진 의원은 본인 페이스북에 공공의대 신설, 지역의사제 도입을 의사들의 진료 복귀와 맞바꾼 것일 뿐이라며 전체 국민을 위한 의료공공성 강화방안을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낙연 대표 취임 이후 민주당이 중도·실용주의 방향으로 선회하여 지지층 결집보다는 중도로의 지지 확장을 선택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6일 취임 후 첫 고위당정청협의회에서도 2차 긴급재난지원금의 맞춤형(선별식) 지급과 관련한 이재명 경기도지사 등 당내외 강경파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번 추경의 특징은 전액 국채로 충당해야 한다는 점”이라며 “빚내서 쓰는 돈이기 때문에 효율적으로 써야 한다는 압박이 크다”고 밝히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9월 9일, 청와대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가진 당청 협의회에서 모든 국민에게 통신비 2만 원을 1차례 일괄 지원할 것을 제안했고 청와대에서도 이를 흔쾌히 수락했다.# 그 밖에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과 1대1 면담을 제안하고 문 대통령 역시 협치를 강조하며 화답하는 등 4차 추경, 한국판 뉴딜 등 주요 정책을 논의하면서 전반적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협의회가 진행됐는데 문 대통령은 이를 두고 당청 관계가 "거의 환상적이라고 할만큼 좋은 관계라고 생각한다."고 묘사했다.##

하지만 출범 초기부터 악재가 이어졌다. 민주당이 제안한 통신비 2만 원 지원에 대해 심상정 정의당 대표와 최강욱 열린민주당 대표 등 범여권 정당들도 반대 의사를 밝혔다. 게다가 윤영찬 의원의 포털 외압 논란으로 의원들에게 '입단속'을 시켰지만, 불과 1주일 만에 박성준 원내대변인이 추미애 아들을 안중근에 빗대는 실언을 했다. # 이낙연 대표는 다시 한번 과잉 대응을 자제하라고 지시했다.#

9월 18일, 총선 당시 주택 보유 축소 신고 의혹으로 논란이 된 김홍걸 의원을 본인이 새로 구성한 당 윤리감찰단에 회부하였으나, 조사에 적극적으로 응하지 않자 회부 이틀만에 전격 제명시켰다.# 감찰단에서 징계가 필요하다고 판단할 경우 윤리심판원으로 넘길 예정이었으나 이날 아예 비상 징계를 이낙연 대표에게 요청해 이를 수락했다고 한다. 민주당이 예상밖으로 상징성이 큰 김홍걸을 선제적으로 쳐내면서 오히려 이를 공격하던 국민의힘이 박덕흠, 조수진 의원 처분 문제로 압박을 느끼게 됐다는 분석이 있다.#

9월 23일, 한국방송기자클럽이 주최한 토론회에 참석해서 김홍걸 의원 제명, 이상직·윤미향 의원 처분 문제, 공수처 설치 문제, 친문 성향 강성 지지자 문제, 2021년 재보궐선거 등에 대해 논의했는데 약 120만명이 그 모습을 지켜 본 것으로 추정되며 높은 관심을 받았다.#

10월 1일, 현재 뜨거운 감자인 동남권 신공항 문제에 대해 현재 검증에 관해 보도된 언론기사가 불충분, 부정확하다며 검증위원회가 기자회견에 다음주에 모든 검증자료를 발표할 것이라 밝혔고 검증위원회가 어떤 결과를 내리든 결국 선택은 정부가 하는 것이라며 정부가 미래를 내다보고 부산·울산·경남이 관문 공항다운 관문 공항을 가질 수 있도록 선택하길 바란다고 말하며 가덕도 신공항에 대한 지지를 다시 한번 표명하였다.#

3. 2021년의 행보

4. 총평

문재인 정부의 실정으로 불똥이 튄 억울한 면도 없지 않으나 어쨌든 집권 후반기 여당 당대표에 나간 본인이 감당해야 할 문제였고, 이낙연 본인은 성급한 이명박 사면론으로 민주당 다수 지지자들의 역린을 건드리는 똥볼만 찼다. 상처뿐인 당대표직을 조기 퇴임하고 상임선대위원장으로서 재보선 지원유세를 했지만 결국 미니 대선급 재보선에서 참패하며 책임론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당대표 역임으로 대세론을 굳히기는 커녕 본인의 실책과 문재인 정권의 실정 책임론으로 상처만 남기고 퇴임했고 퇴임 직후의 미니 대선급 재보선에서 민주당이 역사적인 대참패를 당하며 이낙연은 대권후보로서 정치 커리어에 결정적인 치명상을 입었다.


[1] 전임자였던 이해찬 전 대표의 최종 득표율은 42.88%였다.[2] 이로써 더불어민주당의 당3역(원내대표, 사무총장, 정책위의장) 모두 국회 상임위원장을 겸하는 진기록이 세워졌다. 김태년 원내대표야 집권여당 원내대표로서 관례에 따라 운영위원장을 겸하기에 놀랄 건 없지만, 박광온 신임 사무총장은 과방위원장, 한정애 신임 정책위의장은 복지위원장 신분에서 이낙연 대표의 정무적 판단으로 각각 사무총장과 정책위의장에 임명된 것이기에 충분히 이례적인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3] 21대 총선 정국에서 운영되었고, 이때도 이낙연 대표가 위원장을 맡았다.[4] 판단에 따라 정책 철회를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5] 아마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전두환, 노태우의 손을 잡고 화합한 것을 두고 얘기한 듯 하나, 이명박과 박근혜는 범죄 사실 하나 하나가 주옥같은 수준이였다.[6] 당장 이명박 정부 시절에도 이익공유제 얘기했다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자본주의 정책인지, 공산주의 정책인지 모르겠다."고 비판한 적이 있다.[7] 19일 MBC 인터뷰 후 조중동 등 언론에서는 좌측 깜빡이 켜고 우회전 부분을 강조해 대결구도로 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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