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4-29 16:29:51

위말진초



1. 개요2. 전개
2.1. 배경2.2. 고평릉 사변2.3. 조방의 친위 쿠데타 시도2.4. 조모의 친위 쿠데타 실패2.5. 촉한멸망전2.6. 원제 조환의 선양과 서진의 건국2.7. 번외: 오멸망전
3. 영향
3.1. 중국3.2. 한반도

1. 개요

魏末晉初. 중국 삼국시대의 위나라(조위)에서 진나라(서진)로 교체된 시기이다. 위진교체기(魏晉交替期)라고도 한다.

이로 인해 삼국의 통일은 조씨의 조위, 유씨의 촉한, 손씨의 동오도 아닌 사마씨의 서진의 주도로 진행되었다.

2. 전개

2.1. 배경

220년 위왕 조조가 승하하자 뒤를 이은 조비는 후한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 유협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조위를 건국했다.

6년 뒤 고조 문황제 조비가 붕어하고 226년 아들 조예가 제위를 이어받았으나 열조 명황제 조예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조방을 데려와 양자로 삼았다.

조방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조예는 사마의와 조진의 아들 조상에게 후계자인 조방을 보필해줄 것을 부탁했고, 239년 조예가 붕어하자 조방이 그 뒤를 이었다.

하지만 전폐제 조방의 출신과 혈통이 불확실했기 때문에 가뜩이나 불안정한 조위의 정통성은 흔들릴 수밖에 없었고, 조상은 사마의와 황제 조방을 배제한 채 전횡을 일삼으면서 중앙 정계에는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2.2. 고평릉 사변

사마의는 249년 고평릉 사변을 일으켜 조상과 그 일파를 제거하고 조위의 실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불과 2년 뒤 사마의가 사망하면서 그의 장남 사마사와 차남 사마소가 정권을 잡았다.

2.3. 조방의 친위 쿠데타 시도

조방은 사마의가 죽자 254년에 친위 쿠데타를 도모했으나 발각되어 폐위당했고, 조방의 사촌 동생인 조모가 제위에 올랐다.

2.4. 조모의 친위 쿠데타 실패

후폐제 조모가 제위에 오른 뒤 사마사가 사망하자 이를 기회로 보고 260년에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오히려 시해당하고 말았고, 조모의 먼 친척인 조환이 다음 황제가 되었다.

2.5. 촉한멸망전

전무후무한 대낮의 황제 시해로 정치적 타격을 받은 사마소는 이를 만회하기 위해 260년부터 촉한 정벌 준비를 시작했는데, 263년 10월 옛 진나라(晉)의 영토를 하사받아 진공의 자리에 올랐고 동년 11월에는 후주 유선의 촉한을 정복하는데 성공했다.

촉한 정벌의 대공으로 264년 사마소는 진왕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나 265년 9월에 승하했다.

2.6. 원제 조환의 선양과 서진의 건국

265년 9월 사마소의 자리를 이어받은 사마염은 동년 12월 조환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서진을 건국했다.

2.7. 번외: 오멸망전

한편 264년 손호가 즉위한 후 각종 폭정을 일삼아 동오의 민심이 흉흉해지자 서진에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279년 동오를 공격하여 280년 완전히 멸망시키면서 중국을 재통일하는데 성공했다.

3. 영향

3.1. 중국

후한말 황건적의 난 이래 삼국으로 갈라져 있었던 중국을 서진이 재통일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서진 정권은 황제 시해와 선양을 가장한 찬탈 등 정통성 문제 등으로 굉장히 불안정했고, 여기에 막장 황제들의 즉위와 팔왕의 난으로 인해 혼란이 수습되지 않고 계속 커지면서 점점 더 쇠약해졌다. 결국 북방민족인 남흉노의 유연이 건국한 호한(전조)의 대규모 남하로 화북이 점령당했고(영가의 난) 서진의 사마씨 황실은 남쪽 강남으로 도피해 동진으로 명맥을 이어나가게 되어 중국 최악의 혼란기인 오호십육국시대가 도래하게 되었고, 이후에도 남북조 시대까지 이어지면서 수•당의 천하통일 때까지 중국의 분열기는 더욱 길어지게 되었다.

그나마 서진의 재통일로 인해 진나라 때부터 이어진 중국의 천하통일사상의 명맥을 이어나가면서 오호십육국 이후 성립된 북조와 남조의 경쟁을 촉진시켜 수•당의 통일로 이어지게 만든 의의는 있다.

3.2. 한반도

중국이 통일되어 한나라신나라, 위나라 때처럼 고구려와 서진 간의 충돌이 우려되었으나 서진이 북방민족의 대규모 공격으로 남쪽으로 밀려나면서 고구려와 서진 사이에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서진의 남하로 한반도 북부에 있었던 한군현이 고립되자 고구려 제15대 미천왕 고을불은 이를 기회로 보고 중국과 한사군 사이의 교두보인 서안평을 점령한 뒤, 곧바로 낙랑군과 대방군을 차례로 공격해 멸망시키면서 중국계 한사군을 한반도에서 모두 몰아내었고, 이로써 고구려는 고조선의 고토를 모두 회복하는데 성공한다. 고구려의 이런 영토 확장은 훗날 제19대 광개토대왕의 요동정벌 및 만주진출, 제20대 장수왕으로 대표되는 남진정책과 같이 고구려의 최전성기를 만드는 기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