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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0 12:31:18

오토프리트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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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덴바움 왕조 은하제국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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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프리트 5세
Kaiser Otfried von Goldenbaum V
인물 정보
<colbgcolor=#eee,#222>신체 정보남성
생몰년? ~ SE 765
재위?~ SE 765
가족 관계리하르트(장남), 프리드리히(차남) 클레멘트(삼남)
아말리에 폰 브라운슈바이크(손녀), 크리스티네 폰 리텐하임(손녀), 루트비히(손자)
에르빈 요제프 2세(증손자), 엘리자베트 폰 브라운슈바이크(증손녀), 자비네 폰 리텐하임(증손녀)
위르겐 오퍼 폰 페크니츠(외손자), 카타린 케트헨 폰 페크니츠(외증손녀)
국적 및 소속은하제국 골덴바움 왕조
최종 직책은하제국 황제
파일:Goldenbaum-Dynasty.png 골덴바움 왕조 역대 황제 파일:Goldenbaum-Dynasty.png
오토하인츠 2세오토프리트 5세프리드리히 4세

1. 개요2. 작중 행적
2.1. 재위2.2. 죽음
3. 여담

1. 개요

Kaiser Otfried von Goldenbaum V

은하영웅전설의 등장인물. 골덴바움 왕조의 35대 황제이다.

OVA에서는 프리드리히 4세의 즉위배경을 소개하는 파트에서 병상에 누운 모습으로 짤막하게 등장한다. 하지만 얼굴은 확인하기 힘들다.

2. 작중 행적

2.1. 재위

타고난 절약정신으로 제국재정을 흑자로 만든 황제. 완전히 수전노에 가까웠다고 한다. 참고로 황제가 죽을 때 황실 재정의 흑자 규모는 이때까지 쌓아온 제국 재정의 적자를 일시에 메꾸고도 남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원래 재정은 뭘 해도 흑자보다 적자가 발생하기가 더 쉽고 특히나 자유행성동맹과의 전쟁에 제2차 티아마트 회전으로 인해 장성 60명이 전사할 정도로 큰 타격을 입은 제국군을 복구하는데 든 비용부터, 이제르론 요새 건설비까지 합치면 당시에 돈 나갈 구석이 한 두군데가 아니었을텐데도 오히려 재정흑자를 달성했다는 것은 단순히 아끼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하다.[1][2] 즉, 오토프리트 5세는 절약 외에도 다른 여러가지 정책을 이용해 제국의 재정을 매우 일신화시킨 명군이였던 것. 다만 그보다 먼저 앞서서 재정을 건실하게 했던 율리우스 시대의 프란츠 오토는 특별히 수전노는 아니었던걸 감안하면 오트프리트 5세가 수전노이고 그것이 재정을 건실하게 할 정도였던건 맞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대외 전쟁에서 큰 치욕을 맛봤다. 그의 치세는 730년 마피아라는 자유행성동맹의 명장 집단이 활약하던 시대였고, 은하제국군은 730년 마피아의 수장 브루스 애쉬비에게 붙는 족족 깨졌다. 참다못한 제국군은 5만 척이 넘는 대규모 원정군을 꾸려 자유행성동맹을 침공했지만, 제2차 티아마트 회전에서 원정군이 궤멸당하고 무려 60명이 넘는 장성이 전사하는 극심한 피해를 입어 10년 동안 박살난 장교단을 재건하는 데 집중해야 했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이 전투에서 애쉬비를 죽이는 데 성공해서 730년 마피아를 해체시키는 데 성공했다.

티아마트 성역의 패배는 은하제국의 군사전략을 크게 바꾸었다. 그전까지 이제르론 회랑에는 거대 요새는 없고 소규모 군사기지들이 산재해 있었는데, 제국은 이제르론에 거대한 요새를 건축하여 동맹의 침공을 막고, 향후 원정의 거점지로 삼고자 하였다. 오토프리트 5세는 전선에서는 졸장이지만 토목이나 보급 방면에는 일가견이 있는 세바스티안 폰 뤼데리츠 백작에게 이제르론 요새 건설을 명하였고, 이제르론 요새는 우주력 763년에 기공하여 767년에 완공했다. 그런데 건설 비용이 너무 많이 들자 짠돌이인 오토프리트 5세는 몇 번이나 후회하며 공사를 중지하려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이제르론 요새는 완성되었지만 뤼데리츠 백작은 예정보다 더 많은 비용이 들었다는 이유로 책임을 지고 자살했다.

어쨌든 완성된 이제르론은 돈값을 확실히 해서, 무려 30년 가까이 자유행성동맹의 침공 기도를 저지했다. 동맹군은 6차례나 이제르론을 공격했지만 그때마다 어마어마한 피만 흘린 채 동맹령으로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그런 이제르론 요새가 양 웬리에게 허무하게 함락당해서 동맹의 방패가 되고, 그 다음에는 민주주의 세력 최후의 보루가 되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

2.2. 죽음

오토프리트 5세는 슬하의 자식으로 아들 3명을 두었다. 순서대로 장남이자 황태자 리하르트, 차남 프리드리히, 삼남 클레멘트. 이들 중 리하르트는 근면하고 교양이 풍부했으며, 클레멘트는 행동력이 뛰어났다. 반면 프리드리히는 형과 동생에 밀려 어느 신하의 지지도 받지 않았다. 특히 프리드리히는 본인의 아버지와는 달리 유흥을 즐겼고, 오토프리트 5세는 구두쇠답게 아들에게 충분한 유흥비를 주지 않았다. 그 덕에 프리드리히는 항상 유흥비가 부족해서 고급 매춘부며 술집에게 54만 제국마르크씩이나 외상빚이 있었으며, 명색에 대공이자 황제의 차남이면서 빚쟁이들에게 쫓기거나 외상을 못 갚아서 가게 '뷔르거'의 주인에게 무릎을 꿇고 애원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프리드리히의 행태는 당대의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자연스럽게 궁정은 리하르트를 지지하는 파벌과 클레멘트를 지지하는 파벌로 나뉘었다. 두 파벌을 지지하는 신하들은 새 시대의 특권을 두고 다투었으며, 리하르트와 클레멘트도 어느새 그들의 꼭두각시가 되었다.

제국력 452년에 황태자 리하르트가 오토프리트 5세의 암살을 꾀했다가 적발되었다. 이로 인해 리하르트는 반역죄로 처형당했으며, 그를 지지하던 신하 60명도 처형당했다. 그런데 제국력 455년에 리하르트의 혐의가 사실은 클레멘트 일파가 뒤집어 씌운 모함임이 드러나 클레멘트를 지지하는 신하 170명이 숙청당했다. 클레멘트는 자유행성동맹으로 망명을 시도했으나, '우연한' 사고로 우주선과 함께 폭사해 시신조차 남지 않고 사망했다.

이렇게 유력한 제위계승자들이 사이좋게 공멸하면서, 오토프리트 5세에게 남은 사람은 누구의 기대도 받지 않은 프리드리히였다. 이윽고 오토프리트 5세가 심장병으로 사망하자, 프리드리히 대공이 프리드리히 4세로서 은하제국 36대 황제에 올랐다. 그리고 오토프리트 5세가 이룩했던 흑자재정은 프리드리히 4세가 토목건축으로 탕진했다. 그나마 프리드리히 4세는 '치우제' 지기스문트 2세처럼 개념이 아주 없지는 않아서, 그의 치세에 제국이 파산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3. 여담



[1] 비슷하게 에도 시대의 요네자와 번은 우에스기 가문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본디 우에스기 가문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해 고쿠다카가 1/4로 깎인데다 그러면서도 기존의 가신단은 그대로 유지해 재정적으로 힘들 수 밖에 없어 대대로 재정난에 시달렸고 심지어 안 그래도 적은 석고가 또 반토막이 나기까지 했다. 우에스기 가문은 이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서 절약도 하고 로비도 해보고 했지만 재정난을 극복하지 못했다가 9대 번주인 우에스기 요잔이 식산흥업과 복지정책, 의식개혁을 일으켜 그의 재임 말기에 요네자와 번의 모든 빚을 갚는데 성공했다. 즉 단순히 아끼기만 한다고 되는게 아닌 셈. 물론 차우셰스쿠는 진짜로 그렇게 하긴 했는데 그 덕에 나라 사정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이쪽은 수출만 하고 수입은 안 하는 방침으로만 나갔기 때문.[2] 물론 진짜로 절약으로 나라 재정을 키운 왕이 없지는 않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정말로 극단적인 절약을 통해 재정을 마련했고 이 재정으로 군대를 키웠다. 그는 아버지가 지은 사치스러운 궁전에 살았지만 궁전의 일부만 사용했고 아버지의 사치품을 몽땅 팔아 재정으로 돌렸으며 로코코 풍의 옷은 비싸다며 군복만 입었고 역시 돈아깝다고 서민용 싸구려 담배를 피우고 전투 식량만 먹었으며 이것도 아까웠는지 귀족들을 상대로 무전취식을 하기도 했다. 취미도 있긴 했지만 돈이 안 든다는 이유로 산책이 취미였다. 이러다 보니 평생 남에게 돈을 준 것도 세번 뿐이고 그나마도 푼돈이라 당대 유럽 군주들의 비웃음을 샀다.[3] 이 경우 자기 후계자와 사이가 끝장나게 안 좋았다는 점도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