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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9:30:32

프리드리히 3세(은하영웅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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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덴바움 왕조 은하제국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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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3세
Friedrich III · フリードリヒ3世
파일:attachment/175704.jpg
OVA
인물 정보
<colbgcolor=#eee,#222> 신체 정보 남성, ???cm, ?형
생몰년 ?
재위 SE 633 ~ ?
가족 관계 레온하르트 2세(숙부, 양부)
구스타프(장남), 막시밀리안 요제프(차남)
헤르베르트(삼남), 리하르트(사남), 막시밀라안 요제프(이복형)
슈테판 폰 바르트바펠(이복동생), 코르넬리우스(조카, 의붓손자)
국적 및 소속 은하제국 골덴바움 왕조
최종 직위 은하제국 황제
별칭 패군제,敗軍帝,
미디어 믹스 정보
성우 파일:일본 국기.svg 오디오북 오오타 테츠하루
파일:Goldenbaum-Dynasty.png 골덴바움 왕조 역대 황제 파일:Goldenbaum-Dynasty.png
레온하르트 2세 프리드리히 3세 막시밀리안 요제프 1세
1. 개요2. 재위3. 여담

1. 개요

Kaiser Friedrich von Goldenbaum III/The Defeated(패전 황제)[1]

은하영웅전설의 등장인물. 은하제국 골덴바움 왕조의 20대 황제.

2. 재위

선제 레온하르트 2세의 조카로, 친아들이 없는 숙부의 양자가 되어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런데 선제 레온하르트는 황후 크리스티네의 권유에 따라 프리드리히를 양자로 맞았는데, 그 이후 급사해서 프리드리히와 크리스티네 사이에 불순한 관계가 있지 않겠느냐고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프리드리히 3세에는 아들이 넷 있었는데, 첫째 구스타프, 둘째 막시밀리안 요제프, 셋째 헤르베르트, 넷째 리하르트였다. 이 중 차기 황위 계승자로 구스타프를 선택하여 황태자로 책봉해 두었으나, 구스타프는 매우 허약한 체질이라 황태자로서 국사를 수행하기는 커녕 생활에도 지장을 겪을 정도였다. 심지어 근위여단 사열식에서 빈혈로 실신하자, 신하들도 구스타프가 황제가 될 자질이 있는지 걱정했다.

결국 프리드리히는 황태자를 폐위하기로 결정하고, 다른 후보자를 물색했다. 차남 막시밀리안 요제프는 지성과 건강 모두 수준 이상이었으나, 모친이 하급귀족의 딸이라서 문벌귀족의 지지를 얻을 수 없었고 스스로도 제위에 욕심내지 않고 지방 영주로 눌러앉은 상태였다. 삼남 헤르베르트는 건강하고 야심 많은 성격으로, 사교력이 높아 인망도 있고 행동력도 뛰어났다. 사남 리하르트는 모든 것에서 형 헤르베르트와 똑같았으나 좀 뒤처졌으며, 그 스스로도 헤르베르트와 경쟁하며 자신이야말로 황제에 어울리는 자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프리드리히 3세는 고민 끝에 헤르베르트를 차기 황위 계승자로 내정했다. 그리고 헤르베르트에게 군사적 업적을 남겨주기 위해서, 막 제국령 바깥에서 발견된 '반란세력'을 토벌할 원정군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3세의 결단은 반발을 초래했다. 프리드리히 3세의 이복동생이자 제국군 상급대장 슈테판 폰 바르트바펠 후작은 이번 반란군 토벌 작전의 불리한 점과 헤르베르트의 단점을 지적했고, 이에 헤르베르트가 발끈하자 바르트바펠은 오히려 제위에 오르고자 한다면 이번 원정을 지휘할 생각은 접으라고 충고했다. 그러자 프리드리히 3세는 그럼 어쩌라는 거냐고 바르트바펠에게 물었고, 바르트바펠은 이미 1세기 이상 방치해 두었으니 무리한 원정 대신 제국령 내에 군사 거점을 마련하여 반란군의 내침을 막고 향후 원정의 통신 및 보급의 중계지로 삼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때 헤르베르트가 바르트바펠이 우주를 제국령과 반란세력권으로 나눈 것을 트집잡으며 은하제국이 우주의 유일 정치체제인 것을 부정하냐고 따지자 바르트바펠은 골덴바움 가문의 장래가 기대된다고 비꼬았고, 그 말에 프리드리히 3세는 바르트바펠의 발언을 금하였다. 회의 이후 프리드리히 3세는 바르트바펠의 군 직위를 뺏고 궁정과 제도의 출입을 금하였으며 작위를 남작으로 떨어뜨리고 영지의 8할도 몰수했다.

바르트바펠이 몰락한 후, 프리드리히 3세는 헤르베르트와 함께 원정 준비를 서둘렀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3세는 바르트바펠의 주장에서 수긍할 점을 발견했는지 헤르베르트를 보좌할 참모진들을 노련한 제독들로 채워넣었다. 하지만 이는 헤르베르트의 반발을 초래했고, 프리드리히 3세는 한 발 물러나 참모진 인사권의 절반을 넘겨주었다. 그리고 헤르베르트는 기대에 어긋나지 않고 자신의 사교실 친구들로 참모진을 채워넣었다. 어쨌든 원정 준비가 끝나자 헤르베르트는 제국원수에 서임되어 오딘을 출발했다.

그러나 헤르베르트는 군사적으로 무능한 주제에 참모진을 무시하고 멋대로 나서 제국군을 말아먹었다. 고틀리프 폰 잉골슈타트 중장의 지휘 하 제국군은 헤르베르트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수준 이상의 지휘를 보였으나, 우주력 640년 7월 19일 제국군의 아군 오사로 파센하임 중장이 전사하자 분노한 헤르베르트는 잉골슈타트를 모욕하고 자신이 직접 지휘에 나섰다. 그러나 풋내기 헤르베르트의 명령은 오히려 동맹군에게 제국군의 상태를 알려주는 결과를 낳았고, 제국군은 후일 '다곤 섬멸전'이라고 역사에 남을 정도로 총병력의 9할이 포위섬멸당하고 만다. 원정 실패 이후 헤르베르트는 황족이라는 이유만으로 패전의 책임을 지진 않았지만, 황위 계승 경쟁의 패배자로 굴러떨어져 별궁에 유페되고 죽을 때까지 풀려나지 못한채 사망했다.

프리드리히 3세의 고통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유력한 황위 계승자 헤르베르트의 몰락으로 황위 계승 경쟁은 더욱 치열해져, 은하제국 전체에 피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온갖 음모에 암살과 테러, 비리, 미제사건 등등이 넘쳐나 제국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심지어 황제인 프리드리히 3세마저 근위대를 믿지 못하는 바람에 근위대가 반란을 일으킬 경우 이를 진압할 북원 용기병여단과 서원 보병여단을 창설해야 했다. 이 혼란스러운 시기를 후일 '검붉은 6년'이라고 불렀다. 프리드리히 3세는 다곤 성역 회전에서의 패전으로 '패군제'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으며, 언제 암살당할지 모르는 위협에 떨다가 끝내 많지않은 나이로 검붉은 6년 도중에 죽었다. 황위는 그의 이복형 막시밀리안 요제프가 계승했다. 그러나 이 혼란스러운 시대는 계속되었고, '백일제' 구스타프를 거쳐 '청안제' 막시밀리안 요제프 2세가 즉위한 우주력 646년에야 끝이 났다.

3. 여담

본인 역시 충성스러운 이복동생 슈테반 폰 바르트바펠 후작의 직언을 무시한 걸 보면 현군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물론 바르트바펠 후작 본인도 말을 좀 과하게 직설적으로 하긴 했지만 일단 말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 자세한 것은 다곤 성역 회전 문서를 참조.

특이한 사실은 골덴바움 왕조의 황제들 중 가장 친척관계가 잘 밝혀진 인물이다. 우선 전임 황제 레온하르트 2세는 프리드리히 3세의 숙부이고 프리드리히 3세의 자식들 중 밝혀진 인물로는 구스타프, 막시밀리안 요제프 2세, 헤르베르트, 리하르트 라는 4명의 아들이 있고 이복형으로는 막시밀리안 요제프 1세[2], 이복동생으로는 위에 말한 슈테판 폰 바르트바펠 후작[3]이 있으며 조카이자 의붓 손자로는 코르넬리우스 1세가 있다.

역사상에 프리드리히 3세로 남은 이들은 여럿 있으나 그중 유명한 사례라고 할 수 있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독일 제국 황제는 어째 어중간하다.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3세는 그를 기점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황제 독점이 시작되었다는 기념비적인 인물이나 남긴게 워낙 없고[4] 독일 제국의 프리드리히 3세는 즉위한지 겨우 3개월만에 사망해 역사상에서 비중이 없다.

[1] 이타카판에서는 '패군제'로 번역되었다.[2] 특이하게도 프리드리히 3세 사후 이 인물이 황태자도 있는데 황제가 되었다.[3] 이복형제라 그런지 나이 차이가 상당했던 듯하다. 프리드리히 3세의 삼남인 헤르베르트와 나이 차이가 10살도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작중 서술로는 헤르베르트가 그를 '일족의 장로'라 칭했을 때 장로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젊었다고 했을 정도.[4] 그의 별명인 평화왕도 그가 평화에 힘써서 그런게 아니라 한게 없어서 평화왕으로 그에 대한 다른 별칭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게으름벵이'가 있다. 인생이 적들에게 도망다니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매번 어떻게든 위기를 벗어난데다 무려 77세까지 살아서 그의 적들이 먼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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