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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5 06:54:11

예수의 방주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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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센고쿠 타케요시와 예수의 방주3. 사건 경위4. 사건 이후5. 언론에 끼친 영향6. 분석7. 미디어에서

1. 개요

イエスの方舟事件

일본에서 1979년에서 1980년에 걸쳐 일어난 종교 관련 사건.

일본에서는 드문 편에 속하는 기독교[1] 계열의 종교가 관련된 사건이며 엄밀히는 종교 자체보다는 이 종교를 둘러싼 언론의 보도 행태로 인해 사회 문제로까지 불거진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2. 센고쿠 타케요시와 예수의 방주

'예수의 방주'는 기독교 계열의 신흥종교로, 정식 명칭은 '성서연구회 극동 그리스도교회 예수의 방주(聖書研究会極東キリスト教会イエスの方舟)'였으며 창시자는 '센고쿠 예수'라는 별칭을 가진 센고쿠 타케요시(千石剛賢)라는 인물이었다.

센고쿠 타케요시는 1923년 효고현에서 자산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20세였던 1943년 해군에 입대했고 종전 후에는 자영업을 했으나 실패하고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1951년경에는 교토에 본부를 둔 사카이시 '성서연구소'에 드나들게 되었고 이후 사카이 성서연구소의 주재자 무라오카 타사부로와 결별한 것을 계기로 '예수의 방주'의 전신에 해당하는 '극동 그리스도교회'를 창설했다.

이윽고 센고쿠는 1959년에 가족과 신자 13명을 이끌고 도쿄로 상경해 각지를 돌면서 포교에 힘썼다. 그 과정에서 가출한 신자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1965년경에는 이렇게 모인 신자들과 공동생활을 시작했으며 1975년 코쿠분지시 고이가쿠보로 거점을 옮기고 단체명을 '예수의 방주'로 바꿨다.

3. 사건 경위

전술한 바와 같이 1965년경부터 '예수의 방주'에 입교한 신자들이 가출하는 사건이 빈발하기 시작했다. 특히 단체명을 '예수의 방주'로 개명한 1975년 전후로는 가정 내에서 자신이 설 자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여신자들이 센고쿠의 활동에 공감을 표하면서 가정을 버리고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이렇게 모인 신자들은 상당수가 젊은 미혼 여성들이었지만 개중에는 남성이나 기혼 여성들도 있었다.

가출한 신자들의 가족들은 즉각 경찰에 실종신고를 내는 한편 집단으로 이들의 거처에 쳐들어가서 딸을 내놓으라고 항의하는 등 행동에 나섰고 경시청 측도 특별수사반을 설치하여 사건에 대응했으나 정작 공동생활을 하던 여성 신자들은 모두 자신의 의사로 가출 및 공동생활을 택했다고 하며 하나같이 "집에 돌아가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며 가족을 거부했다.

1978년경부터 센고쿠의 지병인 심근경색이 악화된 데 더해 거듭되는 신자 가족들의 집단행동으로 포교가 힘들어지자 이들은 전국 각지를 전전하다가 1978년 12월부터 후쿠오카 시내의 한 맨션을 새 거점으로 삼았으며 여성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호스티스로 일하기 시작했고 이후 나카스[2]에 '시온의 딸(シオンの娘)'이라는 클럽을 열었다.

한편 신자 가족들은 언론에 센고쿠와 '예수의 방주'를 고발했고 가장 먼저 여성잡지 부인공론[3]이 1980년 '센고쿠 예수여, 내 딸을 돌려다오(千石イエスよ、わが娘を返せ)'라는 제하에 신자 가족의 수기를 공개한 것을 시작으로 산케이신문을 위시한 여러 유력 언론들이 센고쿠를 사이비 종교 집단의 수괴라고 대대적으로 비난했고 '예수의 방주'에 대해서도 '현대판 카미카쿠시', '센고쿠 하렘' 등의 자극적인 타이틀을 달아서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보도가 줄을 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일하게 중립적인 관점으로 '예수의 방주' 관련 보도를 이어간 마이니치신문의 주간지 선데이 마이니치는 타 언론으로부터 '방주의 선전매체'라며 거센 비난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데이 마이니치의 보도 기조는 변하지 않았고 급기야 1980년 6월 17일에는 비밀리에 항공기편으로 '예수의 방주' 관련자들을 초청한 뒤 아타미의 한 제본회사 사원 기숙사에 임시 숙소를 마련하여 기자와 비밀리에 회견을 열었다.[4] 취재를 주도했던 당시 선데이 마이니치 편집장 토리이 모리유키는 처음 공항에서 이들을 만났을 때 흔히 생각하는 광신도 이미지와는 정 반대로 지극히 평범한 젊은 여성들이라는 점에 상당히 놀랐다고 한다.

7월 4일에 열린 비공개 기자회견에서 여성 신자들은 자신들과 센고쿠, '예수의 방주'에 대한 세간의 오해를 풀기 위해 나왔음을 밝히면서 공동생활은 전혀 불편하지 않고 오히려 즐거웠으며 센고쿠를 '책임자', '삼촌(おっちゃん)'이라고 불렀고 자신들을 진심으로 이해해 주는 사람은 센고쿠뿐이라고 말했다. 이어 호스티스로 일한 것은 절대로 강제가 아닌 자신들의 의사였으며 센고쿠는 오히려 여성 신자들이 생계를 위해 캬바레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가슴아파했다고 증언했다.[5]

당시 세간에는 센고쿠가 강제로 여성 신자들을 호스티스로 일하게 한 것이 아니냐, 일상적으로 학대를 받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있었는데 이 의혹을 하나하나 반박했으며 언론에서 부각된 집단 난교설에 대해서도 "부부 이외에 (성적인 관계는) 전혀 없습니다"라고 의연하게 답했다고 한다. 실제로 담당 수사관들과 선데이 마이니치의 기자들이 자세히 조사했으나 학대 및 강압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후 선데이 마이니치는 '센고쿠 예수 독점 회견'이라는 제하로 기자회견 내용을 보도했다.

4. 사건 이후

입원 중이던 센고쿠는 아라카와구의 병원으로 옮겨졌다가 7월 22일에 스가모 소년센터에 출두하여 조사를 받았으나 불기소처분되었고 '예수의 방주'의 실제 모습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선데이 마이니치의 보도에 집단반발한 기성 언론들로 인해 촉발된 보도 전쟁도 점차 진정 국면에 들어섰다.[6]

한편 이들이 운영하던 클럽 '시온의 딸'은 일반적인 클럽들과 달리 동반 등이 없고 고객은 모두 평등하다는 점을 영업 신조로 삼았다. 주류를 제공하기는 하지만 주된 영업 내용은 고객의 인생 상담 등을 해 주는 등 클럽치고는 이례적으로 건전한 축이었다고 한다.[7] 2001년에 센고쿠가 사망한 후에도 계속 영업 중이며 건물 노후화로 인해 2019년 12월 30일에 일시 폐점했다가 2020년에 나카스에서 카시이로 이전하여 재오픈 후 2년 반 정도 영업했다.[8] 2023년 5월부로 후쿠오카 코가시코가역 앞에서 영업하고 있다.

사건 이후 경찰에 실종신고가 접수되었던 7명은 가족에게 돌아갔으며 당시 구속되었던 한국 국적의 1명은 외국인등록법 위반 혐의로 벌금 8천엔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성 신자들은 가족과 화해하기는 했지만 끝내 센고쿠의 곁을 떠나지 않고 가족들을 설득해 공동생활을 계속하면서 '시온의 딸'에서 일하는 길을 택했다.

5. 언론에 끼친 영향

이 사건 관련 언론 보도의 양상은 전반적으로 부인공론이 도화선이 되었고 산케이신문을 필두로 한 기성 주류 언론이 '사이비 종교' 근절 캠페인을 벌인 것을 선데이 마이니치가 마녀사냥이라고 반박한 구조로 해석할 수 있다. 이후 선데이 마이니치를 제외한 언론의 보도 행태가 과도한 비난과 인신공격에 치중했다는 비판이 나왔고 저명 문화인류학자 야마구치 마사오는 '예수의 방주 사건'에 대한 언론의 보도 행태를 두고 '성스러운 괴물 신화'를 따르고 있다고 보면서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기이한 것을 보고, 스스로의 존재감을 안팎으로 위협하는 힘이 무엇인지를 알고, 어쩌면 이 괴물이 퇴치당하는 것을 보며 안도로 가슴을 쓸어내리고 싶다는 '구경거리'에 대한 독자들의 기대를 충족시켰다.
당시 특정 종교를 대상으로 한 언론의 지나친 비난에 대한 반성의 의미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사건 이후 창설된 아사하라 쇼코옴진리교가 각종 대형 사건 사고들[9]을 일으키면서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었을 때도 다수의 언론들은 비판에 소극적이었고[10] 그 결과 옴진리교의 피해가 크게 확산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결국 본질을 꿰뚫어보고 철저히 사건의 심각성과 막장성에 따라 진실을 추구한 보도를 이어가면서 자극을 위한 자극을 추구하는 황색언론이 되기를 거부하는 등 진정한 저널리즘을 보여준 것은 마이니치 정도뿐이었다는 씁쓸한 결말이었다.

6. 분석

당시 '예수의 방주' 신자였던 여성들 중에는 '풍족하지만 아버지가 없는' 가정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었다고 한다. 즉, 물질적으로는 풍요했을지 몰라도 '돈만 벌어 올 뿐 가족에게 엄격하고 권위만 내세우는' 전형적인 쇼와 시대의 아버지상(像)에 반감을 가진 여성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가출한 여성 신자들은 센고쿠에게서 자신들이 원하는 이상적인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가족을 거부하면서까지 '예수의 방주'에 남아 공동생활을 택했으나 나머지 가족들은 가출의 원인이 자신들에게 있다고는 생각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센고쿠를 '딸을 빼앗아간 사이비 교주'라고 비난하면서 모든 책임을 그에게 돌릴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가족들과 여성 신자들 사이에 감정의 골이 한층 더 깊게 패였을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정작 센고쿠 본인은 여성 신자들이 가족을 떠나 자신의 곁에서 공동생활을 하는 것에 대해 난색을 표했지만 그녀들이 뜻을 굽히지 않자 결국 공동생활을 허락했다고 한다.

'예수의 방주' 자체도 기독교에 뿌리를 두기는 했지만 기독교적 요소에 신토 계열의 신흥종교 생장의 집[11]의 요소를 상당 부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형식상으로는 이단 종파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센고쿠 본인이 신흥 교파의 창시자로서는 드물게 온후한 인격자였고[12] 실제로 이 단체가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빚은 일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위에 언급된 여성 신자들의 가정 문제와 당시 언론의 보도 행태가 맞물려 제대로 된 취재 없이 전적으로 추측과 신자 가족들의 감정에 의존하는 가십성 보도가 범람한 게 아니냐는 해석도 있다.

7. 미디어에서



[1] 일본에서는 한국과 달리 기독교가 비주류 종교이기 때문에 기독교에서 파생된 신흥종교도 상대적으로 드물다. 대신 그만큼 신자들의 신심이 매우 깊은 편으로, 말하자면 '소수정예'라고 할 수 있다.[2] 후쿠오카시 하카타구 소재. 후쿠오카 최대의 번화가인 동시에 일본 유수의 환락가 중 하나로 손꼽힌다.[3] 요미우리신문 계열의 중앙공론신사에서 발행하는 여성지. 1916년에 창간되어 현재까지도 발행된다.[4] 당시 센고쿠에게는 체포 영장이 발부된 상태였는데 수사관이 들어오기 바로 직전에 협심증 발작을 일으켜 병원에 입원 중이었기 때문에 여성 신자들이 대신 회견에 참석했다.[5] 센고쿠는 입원 당시 병원 관계자에게 사건 발생으로부터 7년여 전 자살한 신자에 대한 이야기를 고백하면서 당시 신자가 남긴 유서를 항상 지니고 다녔다고 했다.[6] 이는 바꿔 말하면 선데이 마이니치를 제외한 기성 주류 언론들과 '예수의 방주' 관련 보도전쟁의 시발점이었던 부인공론이 충분한 취재와 교차검증 등의 팩트체크 없이 전적으로 추측과 신자 가족들의 감정적인 호소에만 의존해 관련 보도를 내보냈다는 의미가 된다.[7] 실제로 '시온의 딸'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나이트클럽 류의 유흥업소보다는 식사가 가능한 소규모 휴게 공간에 가깝다.[8] 원래는 2020년 봄에 재오픈 예정이었으나 코로나 19의 여파로 2020년 7월 7일로 연기되었다.[9] 사카모토 츠츠미 변호사 일가족 살해사건, 카메이도 악취 사건,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 등.[10] 이와는 대조적으로 선데이 마이니치는 탈퇴 신도의 증언을 적극적으로 보도하는 등 옴진리교에 대해 처음부터 강경한 비판 노선을 견지했다.[11] 오모토라는 신흥종교에서 갈라져 나온 분파인데 오모토가 신토 계열 신흥종교이기 때문에 여기서 갈라져 나온 생장의 집도 신토 계열로 분류할 수 있다. 센고쿠가 한때 이 단체에 몸담은 적이 있다고 한다.[12] 젊은 시절에는 난폭하고 싸움을 좋아해서 종종 경찰 신세를 지기도 했으나 35세 이후 칸트, 헤겔 등 서양 철학자들의 저서를 탐독하는 한편 각종 종교, 그 중에서도 특히 기독교에 대해 독학으로 공부하면서 조금씩 사회에 공헌하고자 노력한 결과로 '예수의 방주'를 창설했다고 한다.[13] 1981년 6월 29일부터 9월 21일까지 방영했던 드라마. 총 10화로 당시 유행했던 실제 사건을 극화한 이른바 '실록 드라마'에 속하지만 다른 실록 드라마들에 비해 사건의 중심이 되는 '인간'에 초점을 맞춘 것이 특징이었다.[14] 오오츠카는 원작자, 시라쿠라는 작화를 맡았으며 시라쿠라는 이 작품 이후 소설가로 전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