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930년 다니구치 마사하루가 설립한 일본의 신흥종교 단체이다. 신앙은 일본 신토에 기반을 두되 불교, 그리스도교, 이슬람, 심리학, 현대철학 등 다양한 종교와 학문과 융합을 시도한다. 일본 종교계에서 한때 유명했던 신종교 오모토(大本)의 방향에 불만을 품고 독립해서 설립되었는데, '생장의 집'이란 교명은 정식 종교단체가 되기 전부터 발행하던 포교용 잡지의 이름을 딴 것. 과거에는 극우 성향 일본회의 등에도 깊이 참여하였다고 한다.참의원 참여 등 활발하게 정치활동도 했지만 3대 교주부터는 환경주의 노선을 걷기 시작하여 일본회의와 관계를 끊고 정치활동도 하지 않고 있다. 현재는 주로 교주의 저서 보급, 번역 등 촐판활동 중심으로 자금을 모아 주로 생명윤리나 환경문제에만 참여한다. 경전으로 '생명의 실상' 40권, '감로의 법우', '일곱 개 등대 점등자의 신시(神示)' 등이 있다.
2000년 교세는 신자가 일본 내 85만, 세계적으로 200만 정도라고 주장한다. 2009년부터 3대 교주로 취임한 다니구치 마사노부는 창시자 다나구치 마사하루의 외손자. 본부는 도쿄도 시부야구에 본부 빌딩에 있고 그 외 나가사키현 사이카이시, 교토부 우지시에 신사 사찰이 있다.
2. 상세
교조 다니구치 마사하루(谷口雅春 1893-1985)는 원래 오모토(大本)라는 일본 신흥종교에서 편지 포교를 담당하던 인물이었다. 이후 오모토를 탈퇴해서 개인잡지인 <생장의 집>을 발간했는데[1] 이것이 바로 생장의 집 종교의 시작이다. 주요 교리는 다니구치 마사하루 자신이 생명의 실상을 깨닫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쓴 저서를 열심히 읽기만 하면 모든 병이 치유되고 인생고가 해결된다는 흔한 사이비 종교의 모습을 띄고 있었으며, 역시 흔한 성공한 사이비 종교가 늘 그렇듯, 실제로 병이 나았다는 신자가 쇄도하면서 그 교세가 급속도로 확장되었다.여기까지는 일반적인 사이비 종교와 별 다를 바가 없으나, 다니구치 마사하루는 신흥종교를 세우기 이전부터 '일본은 세계의 지도국이며, 일본인은 세계의 지배자로서 신에게 선택받은 거룩한 백성'이라고 주장하는 등 자민족 중심주의에 심취한 인물이었다. 생장의 집이 교세를 확장하던 시기는 한창 태평양 전쟁이 임박한 시기였다. 이 시기 다니구치 마사하루는 '예수 그리스도도 천황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식의 황당한 '천황 신앙'을 설파했고, 태평양 전쟁 발발 후에는 '대일본제국은 신국이며, 천황은 절대적인 신'이라는 극단적인 교리로 발전했다.
이러한 '천황 신앙' 중심의 교리와 전쟁 당시의 광기를 발판으로 생장의 집의 교세는 어마어마하게 불어났고, 교세는 육군과 해군에 전투기를 헌납할 정도에 이르렀다. 결국 종전 후 연합군 최고사령부 다니구치 마사하루의 집필을 금지했으나, 점령 통치가 끝난 이후 생장의 집은 다시 활동을 시작, 전후 헌법을 '점령헌법'으로 규정해 부정하고, 모든 주권을 천황에 봉헌해야 한다는 등의 극우적 발언을 담은 저작을 연이어 출간하면서 우파 사이에서 두각을 드러내었다.
이렇듯 전후 체제에서 두각을 드러낸 생장의 집은 1964년에 자신들의 교리를 정치에 반영하기 위해 정치결사인 생장의 집 정치연합(이하 생정련)을 결성하였으며, 당시 전학공투회의(전공투)가 맹위를 떨치던 안보투쟁 국면의 학생사회에 영향을 끼치기 위해 생장의 집 학생회전국총연합(이하 생학련), 생장의 집 고교생연맹(생고련)을 결성하였다. 생정련과 생학련에 소속 인사들은 종교계 출신 인사가 대부분 그렇듯이 대다수가 다니구치 마사하루의 '천황 신앙'과 극우적 논조가 가득한 교리를 절대적인 진리로 체화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진리'를 실현하기 위해 정력적으로 활동하면서 일본 우파 내에서 촉망받는 인사들로 성장하였다.
생정련은 적극적인 로비 및 지원을 통해 정계 인사들 사이에 영향력을 뿌리내리고, 자신들이 지지하는 국회의원 후보 17명 중 13을 당선시키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으며, 이 중 대표적인 사례가 전 참의원 의원이며 노동대신이었던 무라카미 마사쿠니(村上正邦)이다. 이렇게 생정련의 지원을 받아 당선된 의원들은 교조 다니구치 마사하루로부터 직접 지령을 받아 활동하며 생정련의 핵심 정책 목표 중 하나인 우생보호법 개정에 힘썼다.
생학련은 각 대학에서 전공투에 맞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몇몇 대학에서 우파계 학생조직이 학생회 선거에 승리하였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우파계 학생회 전국조직인 전국학생자치회연락협의회(전국학협)를 결성하였다. 이렇게 성장한 우파 학생회 조직은 안보투쟁의 국면을 뒤집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이후 일본 내 좌파 운동권 세력을 일소한다는 큰 성과를 이루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성장한 생장의 집 계열 우파 활동가들은 이후 '일본청년협의회'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일본을 지키는 모임'과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 양쪽 모두에서 핵심 사무를 맡으며 우파 조직 실무진의 인적 구성의 핵심을 차지하였다.
1985년 6월 교조 다니구치 마사하루가 만 91세로 사망한 뒤 그해 11월 사위 다니구치 세이초(谷口清超 1919-2008)가 2대 교주로 취임했다. 세이초는 장인의 기본적인 방향성이나 방침을 이어나가다가 2008년 10월에 사망하고, 세이초의 아들 다니구치 마사노부(谷口雅宣 1951-)가 2009년 3월 3대 교주로 취임했다. 생장의 집은 마사노부가 취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생정련과 생학련 등 일체의 정치결사를 해산하고 정치활동의 중지와 특정 후보의 선거운동 지원 중지를 발표하며 정계와 스스로 단절하였다. 여기서 더 나아가 창교조 마사하루의 극우적 사상을 비판하고 이런 교리에 따라 행동하고 있는 극우인사들의 행적, 즉 일본회의의 활동과 아베 신조 총리의 행동을 비판하는 성명을 내면서 교단의 성격이 완전히 바뀌었다.
따라서 현재 생장의 집은 일본회의 및 일본 내 우익과는 연관이 없으나, 이 종교 출신 인사들이 여전히 그 당시의 교리를 믿으며 그에 따라 행동하고, 그러한 행동들이 일본회의의 운영과 행적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보면 될 것이다. 아베 신조의 씽크탱크이며, 일본회의와 연관성이 강하게 의심되는 일본정책연구센터의 장이자 아베 신조의 브레인으로 꼽히는 이토 데쓰오(伊藤哲夫 1947-), 과거 아베가 총리였던 시절에 보좌관을 역임한 에토 세이이치가 생학련 출신이다. 또한 일본회의의 성립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으며, 1970년 경 원호법제화 운동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일본회의의 모든 '국민운동'을 설계하고 실무를 책임져온, 현 일본회의 사무총장 가바시마 유조(椛島有三 1945-) 역시 생학련 출신이다.
한국에서는 1980년부터 "생명의 실상"이라는 이름으로 다니구치 마사하루의 저서 40권 한글판 전집을 발간했고 현재는 국내에서 소수가 은밀하게 포교활동을 하는 듯하다. 유튜브나 블로그 등에도 관련 한국어 포교용 영상이나 소개글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