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궁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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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왕조의 태자궁이다. 만월대 동남쪽에 위치했으며 왕태자와 태자비가 거주하고 산하기관이 있던 곳이다.[1]2. 수춘궁 / 여정궁
수춘궁은 고려의 동궁이다. 태자와 태자비가 살던 곳으로 인종 대까지 수춘궁, 이후엔 여정궁, 원 간섭기엔 세자궁으로 불렸다.좌춘궁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고려도경에서만 나오는 명칭으로 고려사에선 수춘궁(壽春宮)이라 하였다.[2] 이후 인종 16년(1138년) 5월 여정궁(麗正宮)으로 바꾸었다. 고종 대에 강도로 천도 했을 때에도 여정궁이 존재했다. 원종 대에 태자가 세자로 격하되면서 세자궁(世子宮)으로 바뀌었다.
고려사 예지에 따르면 왕태자를 책봉할 때, 관례를 치를 때 모두 여정궁에서 행한다. 특히 관례를 치를 땐 특별히 치황의(梔黃衣)[3]를 입는 것이 허락된다. 왕태자가 결혼할 때도 여정전에서 결혼식이 이루어진다.
2.1. 주요 건축
고려도경에 따르면 궁궐은 고려 본궐보단 위세가 작았다고 한다. 고려도경에 나오는 궁문은:- 춘덕문(春德門)
- 대화문(大和門)
- 원인문(元仁門)
- 육덕문(育德門)
- 여정문(麗正門)
- 여정전(麗正殿)
2.2. 기타 건축
- 의춘루(宜春樓)
- 침문(寢門)
- 둔문(屯門)
- 동궁문(東宮門)
2.3. 태자부
고려의 삼사삼공 | ||
삼사(三師) | ||
태사(太師) | 태부(太傅) | 태보(太保) |
삼공(三公) | ||
태위(太尉) | 사도(司徒) | 사공(司空) |
태자부(太子府) | ||
태자태사 (太子太師) | 태자태부 (太子太傅) | 태자태보 (太子太保) |
태자소사 (太子少師) | 태자소부 (太子少傅) | 태자소보 (太子少保) |
태자가 세워지면 그는 여정궁을 관저로 받게 되며 '동궁관(東宮官)', 혹 '태자부(太子府)'로 불리는 산하기관을 가지게 된다. 태자부는 일반 왕자들이 받는 산하기관 '제왕부(諸王府)'와 구분되며 더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다.
현종 원문대왕 대[4]에 최초로 태자부가 설치됐으며 문종 대[5]에 세분화되었다.[6] 이후엔 문종제를 고치기만 했다. 충렬왕 대[7]엔 태자부가 세자부(世子府)로 격하된다.
문종 대에 제정된 태자부 직렬은 다음과 같다. 태자부 수장은 왕태자였으며 태자의 스승으로 종 1품 태자태사(太子太師), 태자태부(太子太傅), 태자태보(太子太保)가 있었으며, 태자의 자문객으로 종 2품 태자소사(太子少師), 태자소부(太子少傅), 태자소보(太子少保)가 있었다.[8]
태자는 문벌귀족의 고위자제로 이루어진 동궁시위급사(東宮侍衛給使)[9] 10명과 동궁시위공자(東宮侍衛公子)[10] 20명을 거느릴 수 있었다.[11]
태자는 총 8부(府)의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태자 시위군 8부는 각각:
- 좌내솔부(左內率府) - 우내솔부(右內率府)
- 좌사어솔부(左司禦率府) - 우사어솔부(右司禦率府)
- 좌감문솔부(左監門率府) - 우감문솔부(右監門率府)
- 좌청도솔부(左淸道率府) - 우청도솔부(右淸道率府)
으로 8부 총지휘관은 '시위상장군(侍衛上將軍)', 8부 부지휘관은 '시위대장군(侍衛大將軍)'이다. 각 부의 지휘관은 솔(率)이며 부지휘관은 부솔(副率)이다.[12]
[1] 고려사에 따르면 순종, 헌종, 인종이 수춘궁에 거주했는 기록이 있다.# #2 #3[2] 태자의 관저를 부르는 다른 명칭은 춘궁(春宮), 태자궁(太子宮), 동궁(東宮), 고려 말엔 세자궁(世子宮)이 있다.[3] 금색 의복으로 천자만이 입을 수 있다.[4] 당시 태자는 덕종 경강왕.[5] 당시 태자는 순종 선혜왕.[6] 당시 고려는 최전성기를 찍어 모든 분야에서 전문화, 세밀화가 진행됐다. 거기다 순종이 거진 30년 동안 태자 노릇을 하다보니 아버지 문종은 순종의 힘을 키워주기 위해 태자부를 강화시키고자 했다.[7] 당시 세자는 충선왕.[8] 자세한건 삼사 문서의 태자부(동궁관) 항목 참조.[9] 최소 정 5품 이상 관료의 자제들.[10] 최소 정 3품 이상 관료의 자제들. 춘방(春坊)시위공자라고도 한다. 동궁과 춘방은 같은 뜻이다.[11] 신종 정효왕 대엔 태자가 문관 및 무관의 자제들을 거느렸다. 정부가 무신정권 하에 있기에 이렇게 변한 것.[12] 이 8부는 국왕군 2군 6위(통칭 8위)를 따르되 제도를 한단계 낮추고 변경하여 설정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