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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5 17:37:12

엘리아스 피게로아

엘리아스 피게로아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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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파일:남미올해의선수.png
1974 · 1975 ·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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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의 축구인
파일:external/espndeportes-assets.espn.go.com/g_elias_300.jpg
이름 엘리아스 피게로아
Elías Figueroa
본명 엘리아스 리카르도 피게로아 브란데르
Elías Ricardo Figueroa Brander
출생 1946년 10월 25일 ([age(1946-10-25)]세)
칠레 발파라이소
국적
[[칠레|]][[틀:국기|]][[틀:국기|]]
신체 187cm
직업 축구 선수 (수비수/ 은퇴)
축구 감독 은퇴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산티아고 원더러스 (1964~1966)
→ 우니온 라 칼레라 (1964 / 임대)
CA 페냐롤 (1967~1972)
인테르나시오나우 (1972~1976)
CD 팔레스티노 (1977~1980)
포트로더데일 스트라이커스 (1981)
콜로-콜로 (1981~1982)
감독 CD 팔레스티노 (1994~1995)
SC 인테르나시오나우 (1996)
국가대표 47경기 2골 (칠레 / 1966~1982)

1. 개요2. 선수 경력
2.1. 클럽2.2. 국가대표
3. 플레이 스타일4. 평가5. 기록
5.1. 대회 기록5.2. 개인 수상
6. 피게로아에 대한 헌사7. 여담

[clearfix]

1. 개요

이 영역은 나의 집이며, 누가 들어올 것인지는 내가 결정한다.
칠레축구 선수 출신 감독. 선수 시절 포지션은 수비수.

남미 올해의 축구 선수를 3년 연속 수상[1][2]한 선수로, 1960년대 후반에는 페냐롤에서 활약하며 두 차례의 무패 우승에 기여했고, 1970년대에는 인테르나시오나우로 이적하여 호베르투 파우캉 등과 함께 팀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상대적으로 약팀이었던 칠레 대표팀의 핵심으로 활약하며 치열한 남미 예선을 뚫고 세 차례나 월드컵 무대를 밟았다. 대부분의 커리어를 용병으로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속해있던 모든 클럽에서 주장을 맡을 정도로 리더십이 뛰어난 선수였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피게로아는 칠레의 산티아고 원더러스에 데뷔하였으나, 곧바로 주전 자리를 차지하지는 못했고, 1964년 우니온 라 칼레라에 임대를 가 확고한 주전 자리를 차지한다. 이때 그의 나이 겨우 17세였다.

피게로아는 1967년에는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의 명문 클럽인 페냐롤로 이적한다. 피게로아는 페냐롤에서 5시즌간 활약했고, 리그 2회 우승을 비롯해 6회의 우승을 달성했다. 이 기간 동안 피게로아는 우루과이 올해의 축구 선수를 무려 3번씩이나 수상했다. 팀 내에 여전히 알베르토 스펜세르, 페드로 로차, 후안 호야 같은 선수들이 있었던 시기임을 생각하면 수비수였던 그가 그러한 성과를 이뤄낸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파일:external/k43.kn3.net/54E.jpg
1972년 피게로아는 레알 마드리드의 오퍼를 거절하고 페냐롤을 떠나 세리 A의 강호 인테르나시오나우에 입성하는데, 최전성기를 맞은 피게로아는 브라질 리그를 개발살 내버리는 수준이었다. 이 당시의 브라질 리그는 현대와 마찬가지로 주별 리그, 전국 리그. 총 2개의 리그가 병행되는 형식이었다. 인테르나시오나우에서 뛴 5년간 주별 리그인 캄페오나투 가우슈를 5년 연속 우승했고 그 중 1974년에는 18전 18승. 전승 우승이라는 업적을 이룩하기도 했다. 전국 리그에서는 1975, 1976년 총 2회 우승했다. 이 와중에 피게로아는 리그 MVP인 볼라 지 오우루 1회, 남미 올해의 축구 선수 3연패를 달성했다.

1977년에는 칠레 리그의 팔레스티노로 전격 이적한다. 팔레스티노라는 팀은 50년대 잠깐 타이틀을 차지한 것 이외에는 우승과는 거리가 먼 중위권의 팀이었는데, 피게로아가 뛰던 4년간 리그와 컵대회에서 각각 1회의 우승을 차지했다. 피게로아의 영향력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대목.

1981년에는 게르트 뮐러, 고든 뱅크스 등이 활약했던 미국의 포트 로더데일 스트라이커스로 이적했으나 얼마 안가 자국의 콜로콜로로 이적했고 1982년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2.2. 국가대표

2.2.1. 초기

파일:피게로아(국가대표 시절).jpg

1966년부터 1982년까지 총 47경기에 나서 2골을 기록했다. 1966 잉글랜드 월드컵, 1974 서독 월드컵, 1982 스페인 월드컵에 참가했으며 1979 코파 아메리카에도 참가했다.

만 19세의 나이로 참가한 1966 잉글랜드 월드컵에서부터 피게로아는 이미 칠레 축구 국가대표팀의 핵심 선수로 분류되었다.소련, 북한, 이탈리아와 한 조가 되었는데, 1무 2패로 탈락했다.

2.2.2. 1974 서독 월드컵

1974 서독 월드컵 예선전에서 페루, 베네수엘라와 한 조가 되었던 칠레는 베네수엘라의 기권으로 인해 페루와 경기만 했고 2-0으로 1승 1패씩 주고받은 상황에서 우루과이에서 마지막 결전을 벌인 결과 칠레가 페루에 승리하는 것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여기서는 소련과 맞붙었는데, 1차전 원정 경기에서 비긴 가운데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에 의한 쿠데타로 인한 정세 불안으로 소련 선수들이 2차전을 칠레에서 치르는 것을 거부, 실격 처리되어 칠레가 어부지리로 올라갔다.

그렇게 참가한 1974 서독 월드컵, 남미 최고의 수비수 피게로아는 수비진의 핵심으로서 약체 칠레를 이끌어야 했다.[3] 칠레는 호주, 동독, 서독과 한 조가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조별리그 1차전 서독전. 시작 전부터 각 대륙을 대표하는 리베로의 대결로 화제가 되었다. 유럽 최고의 수비수 베켄바워와 남미 최고의 수비수 피게로아가 어떤 대결을 보여줄지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두 국가대표팀의 전력 차이는 생각보다 심각했고 피게로아가 공격에 나설 만한 여건이 만들어질 수가 없었다. 피게로아는 어쩔 수 없이 수비적인 플레이만을 보여주었는데, 이것이 오히려 전설을 남기게 된다.
4분 35초부터 피게로아의 이 경기 활약상이 나온다.
당시 세계 최고의 공격수였던 게르트 뮐러를 필두로 하여 볼프강 오베라트, 위르겐 그라보브스키, 유프 하인케스, 베른트 횔첸바인 등 내로라하는 서독의 선수들이 모조리 공격에만 치중하여 경기를 진행했다. 프란츠 베켄바워 역시 칠레 공격수들의 압박이 약하게 들어오자 마음 놓고 오버래핑하여 칠레 진영을 마음껏 누볐다. 피게로아는 대놓고 밀리는 상황에서 침착한 플레이를 보여주었다. 역동적인 바이시클 킥 클리어링을 전반 초반에 시전한 것을 시작으로 역사에 남을 만한 수비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이 날 서독 선수, 특히 프란츠 베켄바워와 베르티 포크츠는 칠레 선수들에게 대놓고 걷어차였으며, 칠레 선수 중 파울을 기록하지 않은 선수가 없었지만, 피게로아만이 유일하게 수비 상황에서 파울을 범하지 않았다.[4] 깔끔한 수비를 펼치면서도 양 팀 선수 중 가장 많은 인터셉트와 태클을 기록했다. 피게로아는 특히 게르트 뮐러를 전담 마킹했는데, 피지컬적인 면 뿐만이 아니라 기술적인 부분으로도 뮐러를 완전히 압도하며 농락했다. 천재적으로 수비라인을 컨트롤하여 뮐러에게 오프사이드 3회라는 굴욕을 선사하기도 했다. 뮐러는 피게로아에게 완전히 묶였고 골대를 벗어나는 슈팅 2개와 데굴데굴 구르는 유효슛 하나만을 겨우 기록할 수 있었다. 유프 하인케스를 비롯하여 다른 서독 공격진들도 피게로아를 절대 뚫어내지 못했다. 피게로아의 이런 플레이가 계속된 결과, 후반전 초반에 칠레의 카스젤리가 퇴장당했음에도 추가적인 실점이 없었다. 전반 18분에 파울 브라이트너가 기록했던 중거리 슈팅 원더골이 칠레가 서독에 내준 실점의 전부였다.

경기 내내 많은 서독 선수들이 피게로아의 활약에 혀를 내둘렀고, 서독 주장 베켄바워는 인터뷰를 통해 아주 유명한 말을 남겼다.
나는 유럽의 피게로아다.
파일:피게로아 수비 스킬 1.gif 파일:피게로아 수비 스킬 2.gif
엘리아스 피게로아의 수비 장면
피게로아의 맹활약에도 0-1로 패배한 칠레는 이후 경기에서도 피게로아를 중심으로 탄탄한 수비를 보여주었으나 공격수들의 연이은 삽질로 2연속 무승부에 그쳤고, 결국 2무 1패로 조 3위를 해서 짐을 싸게 된다. 피게로아는 조별리그 탈락에도 불구하고 서독전에서의 전설적인 활약 덕에 대회 최고의 수비수 투표에서 1위를 차지하고 대회 올스타팀에 선정되었다.

2.2.3. 그 이후

1979 코파 아메리카에서 피게로아는 칠레의 주장으로서 참가하여 결승 진출을 이끌어냈지만 파라과이에 밀려 준우승에 그쳤다. 이후 피게로아는 국가대표팀에서 은퇴를 선언했다. 그러나 칠레 축구협회 간부들이 이를 만류했고 피게로아의 은퇴는 없던 일로 되었다.

피게로아는 1982 스페인 월드컵에 다시 한 번 주장으로서 참가했다. 은퇴 직전의 피게로아가 팀 내 최고의 선수인 것이 1982년 칠레 대표팀의 현실이었고 칠레는 3전 3패로 광탈했다. 영광스러운 은퇴를 할 수 있었던 피게로아는 그렇게 허망한 결과를 받아들고 은퇴했다.

3. 플레이 스타일


축구 역사상 최고의 개인 기량을 선보인 수비수 중 하나. 개인 수상, 팀 커리어 같은 요소들을 다 제쳐놓고 그냥 플레이 모습만 봐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압도적인 기량을 자랑한다. SC 인테르나시오나우, CA 페냐롤 등 자신이 머물렀던 팀 내에서 언제나 가장 인정받는 최고의 선수였으며 어느 팀이든 우승후보 팀으로 만들어주었다.

이 정도 클래스에 오른 남아메리카 선수들이 으레 그렇듯이 피게로아 역시 엄청난 수준의 발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좋은 피지컬에 몸이 굉장히 유연했고 아주 민첩했으며 상대 선수를 이용한 지능적인 드리블을 하기도 했다. 게르트 뮐러에게 태클을 시도해서 성공시킨 후, 공을 빼앗으러 오는 뮐러의 발에 원투패스를 시전하여 제대로 된 굴욕을 선사한 바 있다. 바이시클 킥으로 클리어링하는 선수 하면 대부분 파비오 칸나바로를 떠올릴 테지만 이 분야의 원조 역시 피게로아이다. 높은 점프에 이은 완벽한 바이시클 킥 클리어링을 한 경기에도 몇 번씩이나 보여주곤 했다.

수비 능력과 공격 능력 모두, 역대 수비수 중 최고 반열에 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제공권 부분에서 어마어마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당시로서는 거인에 가까웠던 187cm의 큰 키를 가지고 있었던 데다가 올리버 비어호프를 연상시키는 엄청난 점프력도 겸비해서 공중전에서는 무적에 가까웠다. 이를 통해 코너킥, 프리킥 상황에서 헤더를 통한 득점도 많이 만들어냈다. 슈팅 기술도 아주 좋아서 발리슈팅으로 득점을 터뜨리기도 했다.

빌드업 능력이 뛰어나서 동시대의 프란츠 베켄바워하고도 자주 비견됐는데, 베켄바워는 롱패스나 대담한 킬패스 등으로 한 번에 상대를 무력화시키는데 능했다면, 피게로아는 짧은 패스에 의한 안정적인 빌드업에 능했다. 그래서 1974년 월드컵에서 둘의 맞대결이 성사되자 세계 최고의 리베로들이 어떤 맞대결을 보여줄지 기대한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그러나 피게로아는 사람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이 경기에서는 아주 수비적으로 플레이하며 베켄바워의 공격 지휘를 막아내는 데 주력했다. 결과는 이 문서의 국가대표 경력란에서 알 수 있듯이 나쁘지 않았다. 피게로아는 수비수로서 할 수 있는 좋은 플레이를 한 경기 안에서 모두 보여주었다.

수비 능력은 단언컨대 역대 최고 반열에 든다. 게르트 뮐러, 파울 브라이트너, 프란츠 베켄바워, 볼프강 오베라트 등의 선수들로 엄청난 공격력을 자랑했던 1974년의 서독 대표팀을 상대로 엄청난 수비력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1970년 멕시코에서 바비 무어4 을 상대로 보여준 퍼포먼스에 비하더라도 전혀 모자람이 없는 수준이었다. 엄청난 수의 찬스를 내준 칠레였지만 실점은 단 1실점 뿐이었고, 그 1실점마저도 30m가 넘는 거리에서 터진 브라이트너의 중거리슈팅이었으므로 피게로아의 책임은 전혀 없는 실점이었다. 심지어 후반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칠레의 카를로스 카스젤리가 퇴장당해 후반 내내 10:11로 붙었는데도 1실점만을 기록했다. 이날 피게로아는 자신의 주특기인 공격 가담을 최소한으로 줄인 채 경기에 임했는데, 당시 두말할 필요없는 세계 최고의 공격수 게르트 뮐러가 피게로아에게 제대로 묶여 유효슈팅을 단 한 개도 기록하지 못했다. 피게로아의 지능적인 수비라인 컨트롤이 빛을 발해, 위치 선정의 달인이라 불리던 뮐러가 오프사이드를 3번이나 기록하는 굴욕을 맛봤다. 축구 역사상 최초로 오프사이드 트랩을 사용한 선수 중 하나다. 다른 한 명은 1974년 네덜란드 대표팀의 리베로로 활약한 아리에 한.

퇴장 관련 기록도 놀랍다. 18년의 중앙 수비수 커리어 동안 레드 카드를 딱 한 장 받았다. 지저분하게 수비한다거나 하는 것도 없이 말 그대로 깔끔한 수비를 펼쳤다. 말 그대로 천재 수비수였다. 멘탈리티 역시 훌륭해서 동료 선수들이 과열된 상태에서도 본인만큼은 언제나 평정심을 유지했다. 일례로, 선술한 서독전에서 칠레 선수들이 베켄바워의 다리를 노골적으로 걷어차는 와중에 유일하게 수비 과정에서 파울이 없었던 선수가 피게로아이다. 그러면서도 양 팀 선수 중 가장 많은 태클과 인터셉트를 기록했으니, 이만하면 그의 수비 능력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4. 평가

엘리아스 피게로아는 아르헨티나의 다니엘 파사레야, 우루과이의 호세 나사치와 더불어 남미 역대 최고의 수비수로 꼽힌다. 유럽 역대 최고의 센터백들인 프란츠 베켄바워, 프랑코 바레시, 바비 무어, 세르히오 라모스와도 자주 비견되곤 한다.

남미에서만 뛰어 발롱도르 드림팀 후보에서도 제외되는 등[5] 저평가받지만, 실제로는 수비수임에도 불구하고 호베르투 히벨리누, 테오필로 쿠비야스, 자이르지뉴 등 내로라하는 스타플레이어들을 제치고 남아메리카 올해의 축구 선수 3연패라는 어마무시한 수상 이력을 자랑하는 1970년대 남미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다.

애초에 당시 남미 축구의 수준과 유럽 축구의 수준은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 수준이었기에, 남미에서만 뛰어 저평가를 받는 것은 아주 억울한 처사일 것이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6. 피게로아에 대한 헌사

파일:Elías Figueroa.png
피게로아는 칠레 축구사상 최고의 선수이다. 어쩌면 그는 남미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일지도 모르겠다. 그가 월드컵에서 우승했더라면 아마 축구사 최고의 수비수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친애하는 벨파라이소 시민 분들. 안녕하십니까? 경기장의 이름이 엘리아스 피게로아같은 대선수의 이름으로 바뀐다는 소식을 알게 되어 기쁩니다. (농담조로)음... 사실 그는 운이 좋았습니다. 내가 그를 상대로 몇 경기 뛰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그 역시도 기쁘게 생각할 것입니다.
- 펠레[6]
내가 아는 한, 축구 역사를 통틀어 피게로아보다 뛰어난 수비수는 단연코 없었다.
- 디에고 마라도나
나는 유럽의 피게로아다.
- 프란츠 베켄바워
피게로아와 같은 대선수와 비교되는 것 자체가 내겐 영광이다.
- 다니엘 파사레야
"나는 피게로아가 축구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라 말하는데 이견이 없다."
-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파헤이라
피게로아는 내가 본 최고의 수비수다.
- 세자르 루이스 메노티
백작처럼 우아하고 벵갈호랑이처럼 위험했다. 피게로아는 완벽한 수비수였다.
- 네우송 로드리게스(브라질의 축구 평론가)
"세계 축구계에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최고의 칠레 선수 두 명에게 존경을 표합니다. 세르히오 리빙스톤과 엘리아스 피게로아에 대해서요. 이 두 명은 칠레가 현재 보유하고 있거나 과거에 보유했던 모든 선수들 중 가장 빛납니다. 세르히오 리빙스톤은 코파 아메리카에서 절대적인 기록을 가지고 있죠. 총 34경기를 뛰었습니다. 그리고 엘리아스 피게로아는 모든 축구 선수가 염원하는 기량을 갖추었던 선수입니다. 그의 실력에 대한 기억이 세대를 거쳐 남아 있을 정도이므로,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 후안 앙헬 나포우트(전 CONMEBOL 회장, 2015년 코파 아메리카 추첨식에서)

7. 여담

피게로아가 머물렀던 팀인 CD 산티아고 원더러스의 홈구장은 2014년에 리모델링하면서 경기장의 공식 명칭을 'Estadio Elias Figueroa Brander de Valparaiso'로 바꾸었다.

파일:GOAL_Defender.jpg
골닷컴에서 시대별 최고의 수비수 5인을 선정했는데, 1970년대 수비수들 중 2위에 이름을 올렸다.

정치적으로는 보수적이다 못해 극우에 가까운 인물이다. 아우구스트 피노체트 정권 당시 피노체트의 칠레판 유신헌법 개헌을 공개지지하고, 야당과 재야단체의 대통령 직선제 운동이 혼란을 부추긴다고 비판한 칠레 축구계의 대표적 어용 인사였고, 좌파 야당이 주도한 2020년 칠레 개헌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1] 지금은 국가대표급들이 십중팔구 유럽 리그로 가서 초라한 수준이지만, 해외 이적이 흔하지 않던 1970년대 당시의 남미 리그 선수들은 유럽 리그 선수들보다 기술적으로 더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유러피언컵 우승팀과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팀이 맞붙는 인터컨티넨탈컵의 상대전적도 백중세였다. 남미에서 유럽으로 간 파우캉이나 지쿠, 파사레야, 마라도나 같은 선수들은 백이면 백 팀의 핵심 선수가 되거나 아예 구단의 전설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피게로아의 이 업적은 과장 좀 보태서 발롱도르를 3년 연속으로 수상한 것으로 봐도 큰 무리가 없다. 발롱도르 역시 1995년까지는 유럽에서 뛰는 유럽 국적의 선수만 받을 수 있었으니까. 남미 올해의 축구 선수상의 경우에는 유럽 리그에서 뛰더라도 남미 국적만 가지고 있으면 수상할 수 있었다. 적어도 피게로아가 현역이던 시절까지는 확실히 그랬다. 남미 올해의 축구 선수상을 세 번 수상한 선수는 피게로아와 지쿠, 그리고 유럽과 남미 리그의 격차가 커진 2000년대 초에 3년 연속 수상한 카를로스 테베스 뿐이다.[2] 물론 말이 그렇다는 거지 실제로 당시에 발롱도르가 유럽 국적 제한이 없이 시상했다고 쳐도 1974년 월드컵에서 엄청난 퍼포먼스로 준우승을 차지한 요한 크루이프를 제치고 수상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1975년 유러피언 컵위너스컵과 유러피언 슈퍼컵 우승을 이끈 올레흐 블로힌, 1976년 유러피언컵과 인터컨티넨탈컵 우승을 이끈 프란츠 베켄바워를 상대로 발롱도르를 수상할 수 있었을지도 미지수다. 물론 1974년 브라질 주별 리그 전승 우승을 이끌고 1975, 1976년 주별 리그와 전국 리그 더블 2연패를 이끈 피게로아도 그에 밀리지 않으며 그만큼 피게로아의 업적이 대단한 것이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된다.[3] 다만 이 때는 주장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팀내 선배였던 미드필더 프란시스코 발데스가 주장 완장을 찼다.[4] 칠레의 공격 상황에서 피게로아가 베켄바워와 공중볼을 경합하는 과정에서 주심의 오심으로 파울이 선언되기는 했다. 이 때 피게로아의 점프 높이는 그야말로 압권이었는데, 러닝 점프를 하면서 베켄바워의 높이보다 머리 두 개 정도는 더 높은 위치까지 점프했다.[5] 피게로아의 위상을 고려한다면 역대 센터백 후보 10인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마땅하다.[6] 칠레 벨파라이소의 축구 경기장 이름이 '에스타티오 엘리아스 피게로아 브란다르'로 바뀌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올린 축하 영상에서 한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