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총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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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페터르 발케넨더 | 마르크 뤼터 | 딕 스호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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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제49대 총리 얀 페터르 발케넨더 Jan Peter Balkenende | ||
<colbgcolor=#00568B> 본명 | Jan Pieter Balkenende Jr. 얀 피터르 발케넨더 주니어 | |
출생 | 1956년 5월 7일 ([age(1956-05-07)]세) | |
네덜란드 제일란트 주 카펠레 | ||
국적 | 네덜란드 | |
재임기간 | 제49대 총리 | |
2002년 7월 22일 ~ 2010년 10월 14일 | ||
학력 |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 (법학 / PhD) | |
정당 | ''' [[기독민주애원당| 기독민주애원당 ]] ''' | |
직업 | 정치인, 교수 | |
종교 | 개신교 (네덜란드 개혁교회) | |
경력 | 기독민주애원당 대표 네덜란드 하원의원 네덜란드 제49대 총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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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네덜란드의 제49대 총리.2. 생애
2.1. 정계 입문 이전
곡물상인 아버지인 교사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발케넨더는 제일란트 주 카펠레에 있는 비에젤린지에서 성장하면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녔다.이후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로 진학해 역사학으로 학사를, 법학으로 석사와 박사를 전공한 뒤 기독민주애원당 산하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재직하는 동시에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에서 교수로 활동했다.
2.2. 정계 입문 이후
1998년 5월 19일, 공식적으로 기독민주애원당의 공천을 받아 하원의원이 되면서 선출직 정치인으로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당시 야당으로 남았던 기독민주애원당의 재정분야 대변인이 된 발케넨더는 국가 부채 문제를 지적하며 당시 노동당 빔 코크 총리의 확장재정 정책에 대해 비판하며 이름값을 높이기도 했다.덕분에 2001년 10월, 기독민주애원당의 대표 자리에 오르고 한달 뒤에는 2002년 5월로 예정된 차기 총선 총리 후보로 공식 지명을 받는 데 성공했다.
2002년 총선은 네덜란드 역사상 가장 극적인 총선 중 하나로 꼽히는데 총선을 2주 앞둔 시점만해도 빔 코크 총리의 후임자인 애드 멜케르트가 이끄는 노동당이 우세를 잡고 있었고, 오히려 발케넨더가 이끄는 기독민주애원당 등 우파 진영은 반이슬람 성향의 극우 성향 포퓰리즘 정치인인 핌 포르타윈의 등장으로 인해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하지만 선거를 9일 앞두고 핌 포르타윈이 이민자 출신 환경 운동가 폴커르트 판데르흐라프에 의해 암살당하면서 여론이 극적으로 바뀌었고, 선거 결과 노동당 등 좌파 진영이 참패하고 기독민주애원당이 27.9% 득표하며 43석을 확보해 1위에 올랐다.
덕분에 베아트릭스 여왕으로부터 내각 구성을 요구받은 발케넨더 대표는 중도우파 성향 자유민주인민당과 함께 포르튀인이 이끌었던 극우 성향의 포르튀인 명단과 손잡고 내각을 출범시킨다. 이때문에 극우와 손잡았다는 여론의 지탄을 받기도 했지만 여튼 정권교체에는 성공한 것.
하지만 이 선택이 결국 발케넨더의 첫번째 내각을 87일만에 붕괴시키는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내각 출범 9시간만에 포르튀인 명단 소속의 사회고용부 장관인 필로미나 비즐호트가 수리남의 군사 독재자 데시 바우테르서의 친위 민병대원 출신이란 충격적인 사실이 폭로되면서 사임하고 만 것을 시작으로 포르투윈 명단 출신 각료들의 좌충우돌 행보로 인하여 도저히 행정부를 꾸려갈 수 없는 상태가 된 것.
2003년 1월 22일, 국정 혼란에 책임을 지고 내각이 총사퇴하면서 결국 조기 총선을 치르게 된다. 여기서 와신상담한 노동당에게 1당 자리를 다시 내줄뻔했지만, 의석을 한 석 늘리면서 총 2석 차이로 신승해 내각 구성권을 다시 얻게 된다. 지난 내각 붕괴에서 교훈을 얻은 발케넨더는 이후 극우정당을 배제한 채로 같은 중도우파 성향의 자유민주인민당, 민주66과 손잡고 내각을 구성한다.
2차내각에서는 재정보수주의 정책노선에 따라 감세와 복지제도 축소를 통해 재정적자를 감축시키며 무난하게 3년간 내각을 이끌어가는듯 했지만, 2006년 소말리아 이민자 출신 여성 정치인 아얀 히르시 알리의 시민권 취소 문제로 반발한 민주66이 내각에서 이탈하면서 또다시 조기총선을 치러야하는 상황이 됐다. 일단은 총선때까지는 민주66이 빠진 채로 자유민주국민당과 소수정부를 구성했지만 이 와중에 여러 문제를 풀어나가기엔 역부족이었다.
2006년 총선에서도 41석을 확보하며 다시 1당에 올랐는데, 이번에는 높은 지지율을 바탕으로 정권교체를 노리던 노동당의 지지율을 사회당이 잠식한 덕을 톡톡히 봤다. 하지만 자신과 연정을 구성했던 두 정당이 모두 의석을 잃은데다가, 민주66이 내각 재입성을 꺼리면서 내각 구성이 어려워지게 됐다.
그러자 아예 시선을 돌려 노동당과 기독교연합당의 도움을 받아 대연정을 구성한다. 이 과정도 쉽지는 않았는데, 선거 이후 연정 출범까지 무려 6개월이 소요되었다. 대신 발케넨더 총리도 이전의 입장을 일부 포기하고 부터 보스를 부총리 겸 재무장관으로 받아들이면서 공공주택 확대, 탈원전, 재생에너지 투자 증가 등 노동당의 입장을 받아들이게 된다.
원래 협약대로라면 2011년까지 연정이 유지되었어야하지만, 아프간 전쟁 사후 처리 문제로 벨케넨더 총리와 노동당이 갈등하면서 2010년 2월 20일, 연정이 붕괴되면서 다시 한번 조기총선 국면으로 가게 된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기총선에서 행운의 여신은 발케넨더 총리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노동당과의 연정에 실망한 보수 성향 지지자들이 대거 이탈해 마르크 뤼터가 이끄는 자유민주인민당에 투표해 1당을 만들어줬다. 이 과정에서 발케넨더 총리가 이끄는 기독민주애원당은 의석수가 20석이나 감소하면서 1994년 이후 16년만에 겪는 참패를 당하고 만다.
총선 이후에도 연정이 구성될 때까지 과도총리 직을 맡으며 임기를 늘렸으나, 뤼터가 극우 성향의 자유당을 끌어들인 상태로 기독민주애원당에도 연정을 제안하고 당내 반발에도 불구하고 대승적 차원에서 이를 수락하면서 2010년 10월 14일, 8년만에 자리를 넘기고 퇴임하게 된다.
총리직에서 물러남과 동시에 극우 자유당과의 연정 구성 및 총선 참패의 책임을 지고 당대표 자리에서도 함께 물러났다.
3. 여담
- 총리직을 수행중이던 2004년, 괴사성 근막염 진단을 받아 수술을 받게 되었는데, 다행히도 완치가 되어 무사히 총리직에 복귀할 수 있었다.
- 총리 임기 중 총리 관저에 거주하지 않고 자위트홀란트 주에 있는 카펠러안덴에이설에 가족과 함께 거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