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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공화국 République française الجمهورية الفرنسية | 알제리 인민 민주 공화국 الجمهورية الجزائرية الديمقراطية الشعبية République algérienne démocratique et populai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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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어: Les relations entre l'Algérie et la France아랍어: العلاقات الجزائرية الفرنسية
프랑스와 알제리의 관계에 대한 문서. 알제리는 19세기에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으며 알제리 전쟁에서 알제리인들이 수많은 학살을 겪어 와서 양국은 갈등이 매우 심하다.[1]
2. 역사적 관계
2.1. 고대
예전에 프랑스와 알제리는 로마 제국의 영토였고 로마 제국이 동로마 제국, 서로마 제국으로 분리되었을 때는 서로마 제국에 속했다. 하지만 서로마 제국의 멸망 후 프랑스에서는 로마 문화가 보존되었고 라틴어에서 갈라진 프랑스어가 주류 언어가 되었지만 알제리에서는 잠깐의 동로마 제국 치하 이후 우마이야 제국의 정복 하에 아랍화가 진행되면서 언어, 문화, 종교가 달라졌다.2.2. 19세기
오스만 제국의 비호를 받은 북아프리카의 바르바리 해적들은 수백년간 수백만 이상의 유럽인들을 납치하면서 유럽 국가들의 분노게이지를 착실히 쌓아 왔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의 쇠퇴와 산업혁명을 통한 국력 상승을 등에 업은 영국, 네덜란드,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은 이들을 적극적으로 토벌했으며 프랑스도 그 과정에서 알제리를 식민화했다. 프랑스의 지배 하에 알제리 현지인들은 프랑스의 우민화 정책 등을 겪으면서 탄압받았다. 프랑스인들이 알제리 해안도시에 많이 거주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알제리에 정착한 프랑스인들은 “피에 누아르”(검은 발)이라고 칭해졌다. 프랑스의 식민지배 동안 알제리는 프랑스 본토의 일부로 취급되었으나 무슬림과 유대인들에게는 시민권이 부여되지 않았다.2.3. 20세기
프랑스의 북아프리카 식민 통치는 제국주의 국가들 내에서도 굉장히 악랄했는데 자국민들에게는 인권과 민주, 학문을 강조하면서 정작 북아프리카의 식민지였던 알제리와 모로코, 튀니지에서의 아랍인들의 초등학교 취학률은 6%였을 정도로 철저한 우민화 정책이 관철되었고 메카 순례 금지와 투표권 제한 등 현지인에 대한 차별적인 정책도 대거 시행되었다. 사실 정도가 다를 뿐 타 식민 열강들도 해외 식민지에 이런 방식의 식민통치를 취했으나 과거 프랑스의 식민 통치를 겪었던 나라들 중 비무슬림 국가들(마다가스카르, 캄보디아, 라오스 등등)조차 상당수가 세계에서 제일 가난한 것을 보면 프랑스의 우민화 정책이 유달리 차별적이고 악독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제2차 세계 대전 후 알제리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프랑스는 세티프 구엘마 학살 등 무력으로 알제리의 독립운동을 철저히 탄압했고 결국 알제리 전쟁이 발생했다. 알제리 전쟁 과정에서 프랑스군에 의한 잦은 학살과 강간이 일어나기도 했다. 1962년 알제리 전쟁에서 알제리가 승리하면서 프랑스는 물러났고 에비앙 협정을 맺어 독립했다.
알제리에는 독립 후에도 프랑스의 영향력이 지속되었다. 그 예로 1966년까지 알제리에서 프랑스는 핵실험을 진행했고 알제리의 석유 산업도 대부분 프랑스가 소유했으며 프랑스군도 주둔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알제리가 소련 등 공산권과 협력하면서 프랑스의 영향력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1971년 프랑스가 소유하던 석유 산업도 국유화했다.
알제리는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사회주의를 내세웠고 소련, 중국과 교류하면서 냉전 시기에 소련제 무기를 많이 수입했다.
알제리가 독립한 후에는 알제리에 거주하던 프랑스인들의 대부분이 떠났고 프랑스의 식민지배에 동원됬던 프랑스 징집병 알제리인들인 아르키(Harki)들은 노골적으로 이들의 수용을 꺼리던 프랑스 정부에게 사실상 버려졌다. 프랑스가 제시한 조건을 만족시킬 정도로 경제적으로 여유 있던 소수만이 식민지에서 거주하던 프랑스인들과 함께 알제리를 탈출했다.
아르키는 알제리 전쟁 와중에 프랑스군에 징집되어 싸웠으니 민족 반역자로 간주되었다. 때문에 프랑스 식민당국이 제시한 터무니없을 정도로 높은 조건을 충족시킬 정도로 부유하지 못했던 알제리 국내에 잔류하던 대부분의 생존자들은 알제리가 독립하자마자[2] 이후에 전국적으로 길거리에 끌려나가 분노한 민중들에 의해 집단린치를 당해 살해당하거나 알제리 정부에게 집단 처형을 당했다. 이때 프랑스 정부의 의도적인 방치와 피난 차단으로 20만 명의 아르키(가족까지 160만 명) 중에서 살아서 프랑스로 도주한 자는 3만 명에 불과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2012년 기준으로 프랑스에 사는 아르키였던 조상을 둔 프랑스인의 추정치가 50만에서 80만이니 이견은 있다.
프랑스로 도주한 아르키들의 후손들이 상당하다는 사실을 합치더라도 프랑스 정부가 당시 알제리인의 프랑스 이주를 차단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가혹하게 내건 아르키 잔당의 본토 진입 허락 조건이 식민지 알제리인 수입으로는 가족들까지 안전히 대피시키는게 사실상 불가능할 정도로 의도적으로 높았기에 탈출에 성공한 아르키들은 전체의 소수다. 터무니없는 허들에 포기하고 잔류했다가 학살당한 인원도 존 키건의 전쟁의 역사 등의 서적에 근거하면 최소한 3만명에서 최대 15만명 이상으로 추정될 정도로 엄청나게 많다. 중요한건 프랑스 정부는 이들을 동정한 유럽인 프랑스인들의 미약한 구조 시도까지 모조리 매몰차게 훼방놓는 등 여러 차례 정부 차원의 구체적인 조치들까지 행해가며 자국군이 필요에 따라 동원한 이 "부역자"들조차도 프랑스 본토로 피난하는걸 철저하게 차단했다는 점이다. 수십만 백만에 달하는 부역자 알제리인의 프랑스 대량 이주를 어떻게든 막겠다는 프랑스 정부의 의지는 확고했다.
어렵게 피난한 소수의 아르키들은 프랑스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고 프랑스를 위해 싸웠지만 이미 알제리를 잃은 프랑스에 있어서 알제리인 난민은 라틴계 가톨릭 백인이라는 프랑스의 주류 정체성을 해치는 불결한 기생충들일 뿐이었고 당연히 이들에게 돌아온 것이라곤 차별이었다. 그나마 장교나 공무원 등 저명 인사 출신들은 차별이 덜했다. 직장을 다니다가도 아르키 출신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동료들의 눈치에 그만두는 사례도 있었다. 지금도 프랑스내 아랍계 프랑스인의 실직자의 약 35%가 아르키 및 알제리 출신의 후손이다.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3D 업종뿐이라 많은 아르키의 자식과 손주 세대들은 사회적 냉대에 결국 범죄자가 되거나 이슬람 원리주의 사상에 빠져 알카에다, IS 등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 조직에 합류하여 테러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나마 현재 알제리에선 반프랑스 감정이 약간이나마 희석된 건지 다시 알제리로 돌아가서 사는 아르키의 후손들도 늘고 있다.
프랑스의 여배우 이자벨 아자니의 아버지는 카빌리족 계통 알제리인이다. 이전에는 그녀의 아버지가 튀르키예계로 알려졌지만 그녀의 어머니가 자신의 남편이 알제리계라는 혈통이 부끄러워서 그렇게 알렸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고 한다. 더불어 어머니는 독일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프랑스를 대표하는 여배우이면서 동시에 프랑스와 역사적으로 불편한 관계에 있는 두 나라 사람들의 피를 물려받았기 때문에 종종 프랑스의 극우 정치인들과 긴장 관계에 있기도 하다.[3] 알제리계지만 가톨릭이 다수였던 카빌리족의 후손이다 보니 반이슬람주의자인데다 이슬람이라면 아주 치를 떠는 수준으로 히잡 반대 시위를 주동하기까지 했다.
프랑스의 축구영웅 지네딘 지단은 마르세유 태생의 알제리계 이민자 가정 출신인데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당시 프랑스 극우 정치인 장마리 르펜이 "지단은 프랑스 백인이 아니라 아랍계 백인이니 국가대표 선수 자격이 없다"며 그를 비난하기도 했다. 2002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당시 장마리 르펜이 선거에서 선전하여 2차 투표에 진출하게 되자 지단은 인터뷰에서 "르펜이 대통령이 된다면 나는 더 이상 레 블뢰(Les Bleus)[4] 에서 뛰지 않겠다."고 발언했다. 르펜은 결국 대통령이 되지 못했는데 당시 국가대표 축구선수들이나 축구협회 관계자들 모두 르펜을 욕했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 르펜의 슬로건이 "지단이냐, 르펜이냐! 선택하라!"였다. 그리고 프랑스 국민들은 지단을 선택했다.
2.4. 21세기
현재에도 양국은 식민지배의 역사로 인해 갈등이 매우 심하다. 알제리는 프랑스의 지배의 영향으로 프랑스어가 널리 쓰이고 있고 프랑스 문화도 널리 퍼졌지만 프랑스에 대한 반감 때문에 프랑코포니에 가입하지 않았다. 대신 2000년대 이후부터 영연방 가입을 시도하고 있다. 프랑코포니는 프랑스와의 감정 문제가 심각하고 가입 시 얻을 수 있는 실익이 그에 비해 적기 때문에 가입을 안 하고 있다. 반면 영연방은 감정 문제도 별로 없을 뿐더러 영연방에 가입하면 나이지리아, 남아공, 케냐 등 기존 영연방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협력을 강화할 수 있고 영국, 호주, 캐나다, 싱가포르 등 영연방 선진국들로부터의 경제적 원조와 알제리인들의 이민과 유학에서 혜택을 받을 수 있다.프랑스에는 알제리계 프랑스인들이 많이 거주하는데 상술한 이자벨 아자니, 지네딘 지단, 카림 벤제마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여전히 프랑스에서 인종차별을 당하고 있다.
2010년 2월 프랑스 일간 르 파리지앵의 보도에 의하면 프랑스 정부는 알제리가 독립한 후인 1966년까지도 알제리의 사막 핵실험장에서 알제리인 150명을 대상으로 핵무기가 인간에게 미치는 생리적, 심리적 효과를 연구하는 생체실험을 했다는 게 알려지면서 알제리에서 반발이 더욱 거세졌다. 이때도 프랑스가 사실을 부인하면서 양국간에 갈등이 고조되었다.
2012년 12월 28일,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알제리, 모로코와의 경제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2014년 7월 24일, 프랑스와 말리, 부르키나파소 정부가 말리에서 추락한 알제리 여객기 잔해의 수색을 실시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2018년 9월 13일 알제리 전쟁 당시 프랑스군의 고문, 살해 사실을 처음으로 인정했다.#
2020년에 프랑스가 과거 알제리를 식민통치할 때 자국을 상대로 무장투쟁을 벌였던 알제리 독립투사 24명의 유해를 전격 반환했다.# 7월 4일에 압델마지드 테분 대통령은 프랑스가 알제리를 식민지배한 것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고 밝혔다.#
2021년 1월 14일에 프랑스에서 알제리 남성이 코셔 음식 배달을 거부한 일로 불체자임이 드러나 알제리로 추방됐다.#
마크롱 대통령의 "알제리가 공식화한 역사는 사실이 아닌 프랑스에 대한 증오에 기반한다", "프랑스 식민지 이전에 알제리가 국가로서 존재했나"라는 발언에 알제리측이 반발해 프랑스 군용기의 영공 통과를 거부했다.#
파리시에서 경찰의 무자비한 알제리 주민 학살을 인정, 반성하고 추모하는 행진이 펼쳐졌다.#
마크롱 대통령은 "60년 전 알제리인 학살은 용서할 수 없는 범죄"라고 비판했다.#
8월 27일, 프랑스와 알제리 양국이 에너지 분야에서 협력하기로 합의했다.#
2023년 니제르 쿠데타가 발발하자 알제리와 프랑스는 니제르의 군부를 비난했으며 모하메드 바줌 대통령을 지지하였다.
2.4.1. 알제리의 반프랑스 감정
132년의 식민지배를 겪었고 처절한 독립운동과 전쟁 끝에 독립했기 때문에 프랑스에 대한 반감이 매우 크며 프랑스 극우들의 도발적 발언들과 1998년 프랑스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보여준 행동은 알제리의 반프랑스 감정을 더욱 촉발했다. 1961년 모리스 파퐁[5] 당시 파리 경찰청장이 치안 문제로 빌미로 한 야간 통행금지를 알제리계 이민자들에게만 요구하여 이를 비난하는 시위가 벌어졌고 경찰이 시위자들에게 발포하여 40여 명이 죽은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이 사건을 당시 프랑스는 무슬림끼리 싸워 3명이 죽었다는 투로 발표했다. 1998년에서야 시라크는 진실을 발표했으나 파퐁은 나치 부역죄로 처벌받아 수감 중[6]이었기 때문에 처벌받을 이가 없다고 사건을 덮어서 2005년 알제리로 방문한 시라크에게 알제리 극우들이 돌을 던지고 비난했다.프랑스 국대 축구팀이 2001년에 생드니 경기장에서 알제리와 축구 A매치를 한 적이 있는데(경기 영상) 경기장에 대거 입장한 알제리 팬들이 마치 홈경기를 방불케 하듯 자국의 국가를 부른 다음에 프랑스의 국가 라 마르세예즈에 야유를 퍼붓고 프랑스가 압도적으로(4:1) 이기자 거의 폭동 수준의 난동을 일으켰다. 결국 경기가 중단되었지만 경찰의 호위 속에 경기장을 나가는 선수들에 대한 오물투척은 계속됐다. 참고로 이 때 유독 지단만은 무사했을 뿐만 아니라 알제리 선수들은 지단과 친근하게 어울리고 알제리 팬들은 지단에게 사인까지 받았는데 여기서 알제리에서의 그의 인기를 알 수 있다.
반면 알제리 출신 프랑스인들을 프랑스에서는 피에 누아르(검은 발)라고 부른다. 이들의 대부분은 알제리 아랍계나 토착계가 아니라 식민지배가 시작되면서 알제리로 건너온 유럽인들의 후손이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 문학가 알베르 카뮈 등 알제리에서 태어난 프랑스계 지식인, 유명인사도 제법 있었으나 이들은 대개 식민통치를 긍정하고 알제리 사회의 특권층으로 군림했다. 따라서 노벨문학상을 받은 알제리 출신 소설가 알베르 카뮈[7]도 알제리에서는 철저히 잊혀졌다. 카뮈는 위에 언급한 대로 카빌리족이 프랑스에 충성을 다했음에도 프랑스가 외면하여 비참하게 산악지대에서 어렵게 산다고 기자 시절 신문으로 보도하였다가 기자에서 잘린 적이 있다. 이 덕분에 프랑스에서 카빌리족에 대해 조금 신경쓰게 되었다. 따라서 어찌 보면 카뮈가 카빌리족에겐 은인이지만 현재 알제리 카빌리족들도 카뮈를 모른다.
하지만 프랑스도 북아프리카의 자원 부국인 알제리와의 외교를 포기할 수는 없기 때문에 2000년대 이후에는 식민지 독립전쟁 당시에 프랑스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도 일부 인정하면서 알제리의 반불감정을 달래려고 시도하였다. 하지만 2005년 5월 일부 정부 인사들이 프랑스가 북아프리카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망언을 하여 관계가 냉각되었는데 알제리 사르 알 부지드 광장에서 알제리 국가를 부르고 프랑스 국기를 불태우는 반프랑스 시위가 발생했고 심지어 프랑스계 천주교 신부와 신도들이 살해당했다. 이 광장은 프랑스 식민지 시대에는 잔 다르크 광장이었는데 1945년 6월에 알제리 국기를 들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총에 맞아 살해된 12살 아이 사르 알 부지드의 이름을 따서 독립한 뒤에 이름이 바뀌었다. 이 아이의 죽음이 알제리 독립운동이 시작된 계기가 되었으므로 알제리가 독립하자 그의 이름을 딴 광장을 만들고 동상을 세워 기리고 있다.
이외에도 장마리 르펜과 프랑수아 올랑드 전 대통령의 망언 등 여전히 논란이 되는 발언들이 종종 프랑스 정계에서 나오면서 양국 관계를 악화시킨다.
이러한 이유로 알제리의 일부 정치인들과 일반 국민들은 프랑스어 교육을 배제하고 차라리 영어나 독일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등 다른 유럽 언어들에 대한 외국어 교육을 강화하자고 주장하고 있으며,[8] 차라리 영국이나 독일과 손 잡고 프랑스의 자국 간섭을 견제하자는 의견을 비치기도 한다.
정작 알제리 고위층의 상당수는 프랑스 국적도 가진 복수국적자이고 알제리의 아랍어는 프랑스어 어휘가 다수 들어가 있으며[9] 알제리의 경제는 석유 수출 비중이 워낙 커서 엘리트의 탈출구는 국영 석유회사 혹은 공무원 취업, 프랑스 유학 후 정착이라고 한다. 실제로 프랑스 대도시의 택시기사나 식당 종업원은 거진 알제리인들이라고 한다. 또 여기에 더해 알제리가 현재 단일 국가의 정체성을 가지게 된 것도 프랑스 식민지배 하에서 벌어진 알제리 독립 전쟁을 통해서 이뤄졌다고 한다. 이전까지는 북부 해안지대와 남부 내륙 사막지대의 주민들이 같은 한 나라라는 의식이 적이 없다시피했다고 한다.[10]
3. 관련 문서
- 프랑스/외교 / 프랑스/외교/옛 식민지 국가들과의 관계
- 알제리/외교
- 프랑스/역사
- 알제리/역사
- 피에 누아르: 프랑스령 알제리에 거주했던 프랑스 정착민 및 프랑스화한 세파르딤
- 아랍계 프랑스인 - 다만 이자벨 아자니 같은 베르베르 출신도 있다.
- 알제리 전쟁
- 프랑스/경제
- 알제리/경제
- 프랑스어 - 알제리는 프랑스의 영향으로 프랑스어가 널리 쓰이고 있다.
- 대국관계일람/유럽 국가/서유럽 국가
- 대국관계일람/아프리카 국가/북아프리카 국가
[1] 한일관계나 르완다-벨기에 관계, 나미비아-독일 관계, 인도-영국 관계, 인도네시아-네덜란드 관계, 베트남-프랑스 관계 못지않거나 그 이상으로 사이가 안 좋다.[2] 이들은 워낙 프랑스가 동원한 알제리인 보조병이 많으니 알제리가 독립한 이후에도 독립국가가 된 알제리 정부에서 보복하는 대신 어느정도 사정을 봐줄 것이라는 오판도 했다고 한다.[3] 그나마 독일과 프랑스는 양국 관계가 양국이 EU를 주도할 정도로 프랑스와 알제리 관계에 비하면 많이 개선된 편이다.[4]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을 부르는 별명.[5] 비시 프랑스 시절에 유대인 추방에 관여한 나치 부역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파퐁이 추방한 유대인들은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었는데, 적어도 파퐁은 유대인들의 수용소 이송 여부는 전혀 몰랐다고 한다.[6] 2002년 석방된 후 2007년 사망했다.[7] 아버지는 프랑스인, 어머니는 스페인계다.[8] 벨기에 식민지 시기 벨기에의 민족 분열 정책으로 인해 독립 이후 후투족과 투치족 사이에 내전이 발발해 참상을 입었던 역사적인 배경으로 현재 프랑스어를 배척하고 영어 교육을 장려하고 있는 르완다가 대표적이다.[9] 물론 이것은 알제리와 똑같이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겪었던 이웃 아랍권 국가들인 모로코와 튀니지의 왕족과 고위층들 역시 비슷하다.[10] 영국, 네덜란드에게 식민지로 합병되고 식민지 독립운동을 거치면서 단일 국가 의식이 자리잡힌 인도와 인도네시아의 경우와 유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