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262626><colcolor=#fff> 알 보울리 Al Bowlly | |
본명 | 앨버트 앨릭 볼리 Albert Allick Bowlly |
출생 | 1899년 1월 7일 |
포르투갈령 모잠비크 마푸투 | |
사망 | 1941년 4월 17일 (향년 42세) |
영국 잉글랜드 런던 | |
직업 | 싱어송라이터, 밴드리더 |
장르 | 재즈, 성악 |
활동 | 1927년 ~ 1941년 |
신체 | 172cm |
배우자 | 프레다 로버츠 (1931년 ~ 1934년, 이혼) 마가렛 페어리스 (1934년 ~ 1937년, 별거)[1] |
종교 | 가톨릭 → 정교회[2] |
[clearfix]
1. 개요
알 보울리는 1920, 30년대 영국과 미국 등지에서 활발히 활동했던 음악가이다. 192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초반까지 유행했던 크룬[3] 창법으로 노래하는 '크루너'였으며, 이 창법의 최초 창안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댄스 밴드 시대'로 일컬어지는 영국 음악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가수 중 하나였으며, 흔히 "Ambassador Of Song"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BBC에서 선정한 'Voice Of The 20th Century'에서 그는 54위를 차지했다.2. 생애
2.1. 전반기
알 보울리는 1899년 1월 7일, 당시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모잠비크에서 그리스인과 레바논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성장기는 남아공의 요하네스버그에서 보냈으며, 14세가 되던 해 학교를 그만두고 형제들이 운영하는 이발소에서 일하며 '노래하는 이발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1923년, 요하네스버그로 투어 공연을 왔던 에드가 아델러(Edgar Adeler) 밴드에 입단한 후, 인도네시아, 인도, 싱가포르 등에서 무대 경험을 쌓다가 1927년 베를린에서 어빙 벌린의 'Blue Skies'를 레코딩하며 데뷔했다. 그러나 2년 뒤 닥쳐온 세계 대공황으로 한때 그는 길거리에서 버스킹을 하며 행인들의 적선으로 생계를 이어나가야 했다.
30년대 초반 그의 주 무대는 영국이었다. 그는 영국의 여러 밴드들과 음반을 만들어냈으며, 특히 로이 폭스 밴드(Roy Fox's Band)와 레이 노블 오케스트라(Ray Noble's Orchestra)에서 고정적으로 활동했다.
이미 20년대 후반부터 루디 발리, 빙 크로스비 같은 인물들의 성공으로, 악단의 전면에 나서서 마이크에 대고 노래를 부르는 가수의 위상이 점점 높아져가던 미국과 달리 영국은 아직 그렇지 않았으나 30년대 초반 알 보울리와, 그의 영국 내 최대 라이벌이었던 샘 브라운(Sam Browne)의 등장으로 영국 내에서도 인기 '악단'이 아닌 인기 '가수'의 개념이 생기기 시작했다.
1933년 런던의 한 매거진에서는 알 보울리의 공연에 대해 "그가 부드럽고 자신 있게 노래할 때, 많은 사람들은 무솔리니와 히틀러를 합쳐놓은 것보다 더 큰 전율을 그의 목소리에서 느꼈다."라고 묘사했다.
2.2. 전성기
보울리의 노래(더 정확히 말하면 레이 노블 오케스트라의 음반)는 영국 뿐만이 아닌 유럽과, 바다 건너 미국에서도 알려지고 있었다. 이미 1931년 <Lady Of Spain>이 미국 음반 차트에서 5위를 기록하였고, 다음해에는 3곡[4]이 나란히 5위에 오르더니, 1933년에는 마침내 <Love Is the Sweetest Thing>과 <The Old Spinning Wheel> 두 곡이 차트 1위를 기록했다.1934년, 보울리는 레이 노블 오케스트라와 함께 뉴욕 투어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같은 해 <Isle Of Capri>와 <The Very Thought Of You>가 차트 1위에 올랐으며, 앞의 두 곡을 포함해 총 9곡이 차트 내에 올랐다. 이러한 눈에 띄는 성과들에 힘입어 보울리는 레이 노블과 함께 미국으로 진출했다. 그곳에서 보울리는 '영국의 빙 크로스비'라 불리며 NBC에서 본인의 라디오 프로그램을 가지기도 하였다. 미국 활동 당시의 대표곡은 <Paris In The Spring> <I've Got You Under My Skin> <Top Hat> <Clouds>.
파일:loveisthesweetestthing.jpeg.jpg |
빌보드 1위에 오른 <Love Is the Sweetest Thing>의 음반 |
한가지 유감스러운 것은 위의 사진처럼, 대부분의 음반에 그의 이름이 적히지 않고 다만 'Vocal Refrain'으로 처리되었기에 지금처럼 인터넷이 없던 당시로서 알 보울리의 이름은 대중적으로 매우 알려지지는 않았다.
2.3. 비운의 시작
1937년, 보울리는 여전히 미국에 남아 있길 원하던 레이 노블과 결별하고 영국으로 돌아왔다.[5] 그러나 보울리가 자리를 비웠던 몇 년 사이 그의 자리는 다른 가수들로 채워져 있었다. 샘 브라운과 데니 데니스 같은 경쟁자들에 의해 그는 더 이상 독보적이지 않았다.<Radio City Rhythm Makers>라는 자신의 밴드를 구성하기도 했으나 같은 시기, 종양이 그의 목에 생겨버리는 바람에 밴드는 해산되고, 당시 유일하게 수술이 가능했던 병원을 찾아 다시 뉴욕을 찾아야 했다. 아내와는 별거했으며, 의사는 종양이 암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알려진 바, 이 시기 거듭되는 불운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암에 대한 공포 때문에 그의 체중은 10kg이나 감소했다.
1937년, 영국의 선호하는 가수 순위 |
목소리를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수술을 다행히 마치고 그는 다시 활동을 재개했으나, 레이 노블이 없는 영국에서 그는 한 오케스트라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곳 저곳 옮겨다녀야 했는데[6] 이 모습은 마치 커리어 초반의 본인과도 같았다. 그의 전성기는 포물선의 가장 높은 곳을 찍고 다시 가라앉기 시작했던 것이다.
2.4. 죽음
커리어 말년, 그는 지미 메세네(Jimmy Messene)와 기타 듀오를 이루어 활동했다. 그러나 당시 알콜 중독에 빠져 있던 메세네는 무대에 오르지 못하는 일이 종종 있어 파트너를 실망시키곤 하였다. 1941년 4월 2일, 보울리와 메세네는 히틀러를 비난하는 곡인 ’When That Man is Dead and Gone'을 녹음했다.그리고 약 2주 뒤인 1941년 4월 17일, 독일의 런던 공습 때 그는 목숨을 잃었다. 폭격이 끝난 후 아파트 관리인이 보울리의 방으로 찾아갔을 때 그는 침대 위에 쓰러져 있었다고 한다. 폭격에 직격으로 당한건 아닌지라 외관상으론 멀쩡했으나, 폭발의 충격으로 침실문이 튕겨져나가 머리를 맞고 사망한 것이었다. 그의 시신은 다른 폭격 피해자들과 함께 공동 매장되었고, 장례식은 같은 달 26일에 치러졌다.
알 보울리의 묘지, BOWLLY A.A. |
3. 기타
1931년, 첫번째 부인이었던 프레다 로버츠(Freda Roberts)는 결혼식 당일날 밤(!) 다른 남자와 함께 침대에 있다가 보울리에게 발각되었고, 그들은 2주 만에 갈라서게 되었다.4. 대표곡
"Goodnight, Sweetheart" 1931년 2월 19일"Guilty" 1931년 12월 2일 [7]
"If Anything Happened To You" 1932년 1월 28일
"Love Is The Sweetest Thing" 1932년 9월 8일
"Midnight, The Stars and You" 1934년 2월 16일 [8]
"The Very Thought Of You" 1934년 5월 21일
"Deep In A Dream" 1939년 2월 3일
5. 여담
* 영화 샤이닝의 엔딩이기도 한 'midnight, the stars are you'가 있다.
* 알 보울리가 녹음한 적 있는 Al Hoffman 작곡, John Klenner 작사의 'Heartaches'는 2016년 더 케어테이커의 'Everywhere at the end of time' 내 수록곡 'It's just a burning memory'로 샘플링된 바 있다.
[1] 이혼은 하지 않았다.[2] "Al Bowlly - Modern Greek Studies Association", mgsa.org[3] 암송아지의 울음소리처럼 부드러운 콧소리로 노래부르는 것을 말한다. 유명한 크루너로는 프랭크 시나트라, 페리 코모, 빙 크로스비, 마이클 부블레, 진 오스틴 등이 있다. 초기 재즈와 스탠다드 팝 장르를 다룬 당대 인기 가수들을 상징하는 창법 중 하나라 볼 수 있다. 1960년대 이후 유행이 가라앉았다가 데이빗 보위와 짐 모리슨이 크루닝 창법을 이끌어들이면서 록 음악계에서도 어느정도 자리잡았다.[4] <Hold My Hand> <Lights of Paris> <Sailing on the Robert E. Lee>[5] 이 이유로는, 보울리의 향수병 때문이라는 설과 갱스터의 여자를 건드렸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6] 이 시기 함께 작업했던 지휘자 중에는 훗날 이지 리스닝의 거장이 되는 만토바니도 있었다.[7] 영화 아멜리에의 OST[8] 영화 샤이닝과 설국열차의 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