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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아소카 대제(Ashoka the Great) |
별칭 | 아육왕(阿育王) |
휘 | 아소카(Ashoka) |
종교 | 불교 |
부황 | 빈두사라 |
생몰년도 | 기원전 304년 ~ 기원전 232년 |
재위 기간 | 기원전 265~238년경 또는 기원전 273~232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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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르나트에서 출토된 아소카의 석주[1] |
마우리아 왕조의 3대 황제.
흔히 아쇼카 대제, 아쇼카 대왕이라 칭송되는 인도 역사상 최고의 군주 중 한 명으로 거론되는 인물이다.
아쇼카 마우리야(Ashoka)왕, 한자로는 아육왕(阿育王)으로 표기하며 프라크리트어로는 아소카, 산스크리트어로는 아쇼카라고 한다. 삼라트 차크라바르틴(Samrāṭ Chakravartin), 즉 불교 사회에서 이상적인 지배자를 뜻하는 개념인 전륜성왕의 모델이기도 하다. 인도-그리스 세계에서 그는 돌에 새긴 여러 그리스어 칙령을 통해 피오다세스(Piodasses)라는 칭호로 알려져 있었는데, 이는 '자애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자'라는 뜻의 왕에 대한 칭호 '프리야다르시(Priyadarsi)'를 그리스식으로 변형한 것이다. 아람어로는 산스크리트와 같은 발음의 '프리야다르시'로 알려져 있었다.
재위기간은 불분명하지만 기원전 265년~기원전 238년 재위설, 또는 기원전 273년~기원전 232년 재위설도 있다.
젊은 시절엔 2대 왕 빈두사라의 자식 101명 중 한 명으로 왕위 계승 다툼에서 친동생 한 명을 뺀 이복동생 99명을 모두 죽이고, 그들을 따르던 신하와 궁녀까지 모두 죽인 뒤 왕위에 오른 피의 군주이기도 했다. 이후 타국과도 무수한 정복 전쟁을 벌여 엄청난 피로 땅을 적셨다. 그러나 어느 순간 본인 역시 이런 행위에 회의감을 느끼고는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다.
불교에 귀의한 뒤에 불교를 보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도 전역은 물론 동남아시아와 동아시아, 중앙아시아 나아가 페르시아와 그리스, 이집트 등 헬레니즘 세계로까지 포교관을 보내 불교의 가르침을 전하게 했다. 인도 서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하던 불교가 세계 종교로 도약할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유대 왕국의 다윗 왕,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대제와도 닮은 점이 많다.
2. 일대기
아소카가 세운 산치 대탑 |
불경 잡아함경 권23 아육왕경은 아쇼카 대왕이 태어나기 전에 석가모니 부처로부터 전륜성왕이 되리라는 수기를 이미 받았다고 적었다.[2] 아쇼카를 낳은 어머니는 첨파성(詹波城)[3]에 사는 브라만의 딸이었다. 어느 날 관상을 보는 사람이 말하기를 왕후가 되어 두 아들을 낳을 터인데, 첫째 아들은 사분(四分)의 전륜왕이 될 것이요, 둘째 아들은 출가하여 도(道)를 얻게 될 것이라 하였다.
아버지가 이 예언을 듣고 딸을 빈두사라왕에게 바쳤는데, 궁 안의 모든 여인들이 "왕이 이 여인을 보게 되면 반드시 그 즐거움에 빠져서 우리들은 사랑하지도 않을 것이다."라며 즉시 그 여인을 이발사로 만들어 왕의 머리나 깎게 했다. 그런데 이발 도중에 잠이 들었다가 깨어난 왕이 여인을 보고 "네가 갖고 싶은 것이나 마음에 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말해 보아라." 하였다. 여인이 왕과 노니는 것이 자신의 소원이라고 말하자 빈두사라 왕은 "넌 이발사이고 나는 국왕인데[4] 어떻게 너와 함께 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러자 여인은 자신이 바라문의 딸이지 이발사가 아닌데,[5] 궁 안의 사람들이 자신에게 이발사 노릇을 하게 했다고 밝혔다. 왕은 즉시 여인을 해방시키고 부인으로 맞아 그 사이에서 아쇼카를 낳았다고 한다. 이후 아쇼카의 어머니는 비다수가(毘多輸柯)라는 아들을 한 명 더 낳았다. 하지만 아쇼카는 피부가 거칠고 껄끄러워서 부왕 빈두사라에게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이미 수사마(修私摩)라는 다른 아들, 즉 아쇼카에게는 이복 형이 되는 태자가 있었기에 아쇼카가 왕이 될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빈두사라 왕은 여러 아들 가운데 누가 자신의 뒤를 이어서 왕위를 감당할 수 있는지 점을 쳐보고자 빈가라발사(賓伽羅跋娑)라는 외도(外道)의 관상가에게 왕자의 관상을 보게 했다. 아쇼카의 어머니가 이를 알고 부왕의 처소로 가보라고 했지만 아쇼카는 "부왕은 저를 귀애하지도 않으시는데 왜 가라고 하세요?"라고 거절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계속 권하므로 빈두사라 왕의 거처인 금전(金殿)으로 가는데, 성호(成護)라는 대신을 만나 그로부터 좋은 코끼리 한 마리를 얻어 타고 갔다.
그곳에 모인 다른 왕자들은 모두 금은으로 만든 그릇에 음식을 담아 먹고, 아쇼카는 땅바닥에 앉아 어머니가 사람을 시켜 보낸 밥과 타락죽을 질그릇에 담아 먹었다. 아육왕경에 따르면 관상가는 그 자리에서 아쇼카가 왕이 될 상임을 알아차렸지만 그랬다가는 빈두사라 왕이나 아쇼카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해코지를 당할지 몰라[6] "저는 지금 인연으로 관상을 보는 것이므로, 이름은 말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해서 허락을 얻었다. 그리고는 왕자 가운데 좋은 탈 것을 가진 분이 계시다면, 앉은 자리가 빼어난 분이라면, 좋은 음식과 좋은 그릇을 가진 분이라면 왕위를 감당할 것이라고 뭉뚱그려 말했다.
이때 모든 왕자들은 좋은 자리에 앉아서 금은으로 된 그릇에 음식을 먹고 있었으므로 빈가라발사의 말을 듣고 제각기 자신이 왕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아쇼카는 "좋은 탈것이라면 나는 코끼리를 타고 왔고, 좋은 자리라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대지에 내가 앉아서 대지(흙)에서 나온 음식(밥과 타락죽)을 대지에서 나온 그릇(질그릇)으로 먹고 있는 내가 최고가 아닌가?"라고 해석하며, 자신이 왕이 될 것이라고 자부했다고 한다.
이때 빈두사라 왕이 부용국으로 거느리던 덕차시라(德叉尸羅)[7]라는 나라가 반역을 일으키자 빈두사라 왕은 아쇼카에게 병사를 모아 진압할 것을 명했지만, 병장기와 보급 물자를 충분히 주지 않았다. 부하들이 걱정하자 아쇼카는 "만약 나에게 공덕이 있다면 마땅히 왕이 될 것이고, 병기와 물자도 자연히 나타날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순간 땅이 열리더니 병기와 물자들이 한꺼번에 튀어나왔다. 이 물자와 병장기로 덕차시라를 공격하자, 덕차시라의 백성들은 아쇼카를 마중하러 나와서 자신들은 싸울 생각도 반역할 생각도 전혀 없고, 빈두사라 왕이 보낸 대신이 패악질을 부려서 시달리다 못해 일어난 것이라고 변론했다.
한편 파탈리푸트라에서는 빈두사라 왕이 중병을 얻어 숨이 다할 판이었다. 그는 사인(使人)에게 "맏아들 수사마에게 나라를 맡기고자 한다." 말하며 아쇼카를 다시 덕차시라국으로 보내고 수사마를 돌아오게 하라고 명했다. 그런데 당시 수사마는 덕차시라국과 전쟁 중이었다. 아육왕경은 수사마가 당시 마우리아 왕조의 재상과 알력이 있었다고 언급한다. 예전 수사마가 동산에서 돌아와 파탈리푸트라 성으로 들어서다가 재상과 마주쳤는데, 하필 대머리인 재상의 머리를 장난삼아 손으로 한 대 쳤다. 재상은 여기에 앙심을 품고 아쇼카를 왕으로 세우고자 신하들과 계획을 짠 다음, 덕차시라 백성들을 선동해 빈두사라 왕에게 다시 반기를 들게 했다. 이에 빈두사라 왕은 수사마를 보내어 그들을 정벌하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수사마가 덕차시라에서 고전하는 사이에 아쇼카가 본국으로 돌아왔다.
재상의 사주를 받은 신하들은 노란 생강즙을 아쇼카의 몸에 발라서 병든 모습으로 보이게 해 놓고 또 낙차(落叉)를 끓인 즙을 그릇에 가득 담아서 한 곳에 두고는 '아쇼카는 병들었다.'고 왕에게 알렸다. 그리고 빈두사라 왕이 아직 임종하지 않았을 때에, 아쇼카를 화려하게 꾸며서 빈두사라 왕의 처소에 이르러 알렸다.
이분이 왕자이십니다. 대왕께서는 마땅히 이분에게 왕위를 물려주셔야 합니다. 수사마가 돌아온다 해도 저희들은 마땅히 왕위를 아육에게 줄 것입니다.
빈두사라 왕은 분노했고, 아쇼카가 나서서 말했다.
제가 왕이 되는 것이 만약 여법(如法)하다면,[8] 하늘이 지금 즉시 나에게 천관(天冠)을 내려줄 것입니다.
이 말이 끝나자 모든 하늘이 즉시 그의 머리 위에 천관을 씌워 주었다. 빈두사라 왕은 그것을 보고 화가 더욱 치밀어서, 마침내 뜨거운 피가 입에서 흘러나오더니 바로 목숨이 끊어졌다.
이때 덕차시라에 있던 수사마는 대왕이 죽고 아쇼카가 즉위했다는 소식에 노해서 군사를 돌려 아쇼카를 쳤고, 파탈리푸트라에서 아쇼카는 이복 형의 군대를 상대로 농성에 들어갔다. 아쇼카는 즉위하자 앞서 자신이 관상을 보이러 가는 길에 코끼리를 선물했던 성호라는 대신을 재상으로 삼았는데, 성호는 모든 방편을 동원하여 성의 동쪽 문에다 여러 가지 기계장치를 만들고 나무를 깎아서 아쇼카의 신상(身像)과 군사들의 상을 만들고, 땅을 파서 구덩이를 만든 다음 연기가 나지 않는 불을 넣고 물건으로 덮은 다음 다시 마른 흙을 그 위에 깔아 놓았다. 이때 수사마가 군사를 거느리고 북문을 공격하려고 하자 성호는 수사마의 군사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나를 공격하지 말고 마땅히 동문을 공격하라. 아쇼카는 그곳에 있다. 너희들이 만약 아쇼카 왕자를 죽이게 되면 나는 알아서 항복할 것이다.
이에 수사마는 그의 말을 따라 즉시 군사를 돌려 동문을 공격했는데 이는 성호의 함정이었다. 성호가 만들어놓은 아쇼카와 그 군사의 상을 보고 수사마는 진군했는데, 그 순간 땅이 꺼지면서 수사마와 그 군사들은 불구덩이에 떨어져 스스로 타 죽었다. 그렇게 아쇼카는 자신의 이복형을 제거하고 왕위를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처음 아쇼카 왕이 즉위한 후 행동이 대단히 난폭하여 지옥(뇌옥)을 만들고서 사람들을 살해했다. 둘레의 담장은 높이 솟아 있고 귀퉁이의 망루는 특히 더 높게 했다. 맹렬한 불꽃과 홍로(큰 화로), 날카로운 창과 예리한 칼 등 갖가지 고문 도구를 갖추고 그 모습을 지옥과 같이 차려놓고 흉포한 자들을 모아 옥주(전옥)를 맡겼다. 처음에는 나라 안의 법을 어긴 죄인을 죄의 경중을 따지지 않고 모조리 도탄의 고통 속에 처넣었는데, 중에는 감옥을 지나가는 자들, 그 다음에는 아무나 잡아다 살륙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오는 자는 모두 죽게 되므로 그대로 입을 봉하여 밖으로 새어나가는 법도 없었다.
현장 <대당서역기>권8 '파탈리푸트라 성'[9]
현장 <대당서역기>권8 '파탈리푸트라 성'[9]
아쇼카 왕은 바른 법으로 다스리고 교화하였으나, 여러 신하들은 자기들이 아쇼카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는 이유로 왕을 업신여겨 임금과 신하의 예를 지키지 않았다. 왕도 또한 여러 신하들이 자기를 업신여기는 줄을 알고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들은 저 꽃이나 과일 나무를 베고 거기에 가시나무를 심어라."
여러 신하들은
"가시나무를 베고 과일 나무를 심는 것은 보았지마는, 꽃이나 과일 나무를 베고 가시나무를 심는다는 것은 일찍 보지도 듣지도 못하였나이다."
라고 대답하였다. 이렇게 왕은 세 번이나 명령해 베게 하였으나 그들은 듣지 않았다. 그 때 왕은 대신들에게 성을 내며 날카로운 칼로 5백 명의 대신들을 죽였다.
또 어느 때에 왕은 채녀와 권속들을 데리고 바깥 동산에 나가 놀다가 꽃이 만발한 한 무우수(無憂樹)[10]를 보았다. 왕은 그것을 보고
"이 꽃나무는 나와 이름이 같구나."
하여 매우 기뻐하였다. 그러나 왕의 형체는 추하고 더러우며 피부는 깔깔하였고, 채녀들은 그런 왕을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였으므로 그 무우수를 손으로 꺾어버렸다. 왕은 아침에 깨어 무우수 꽃이 땅바닥에 흩어져 있는 것을 보고 잔뜩 화를 내며 채녀들을 묶어 불로 태워 죽였다. 이렇게 왕이 포악한 짓을 하므로 '포악한 아쇼카'라고 불렀다.
대신 성호가 포악한 아쇼카 왕에게 아뢰었다.
"때리거나 죽이거나 하는 이와 같은 일들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시고, 응당 스스로는 하지 않으셔야 합니다."
그래서 왕은 즉시 대신 살생을 할 수 있는 자를 찾아 모집하였다. 그때 산속에 촌락이 하나 있었는데, 그 촌락에 사는 옷을 잘 짜는 사람이 자식을 하나 낳았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이름을 기리가(耆利柯)[11]라고 했는데, 그 아들이야 말로 가히 두려워할 만했다. 어질지 못한 짓을 마구 행하면서 부모에게 항상 욕을 했으며, 집안의 남녀를 모두 두들겨 패고 나아가 모든 중생을 닥치는 대로 죽이거나 해쳤다. 항상 그물을 쳐서 포획하는 것으로 업을 삼았으니, 죽이고 해친 것이 많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또 그를 전타기리가(旃陀耆利柯)[12]라고 불렀다. 왕이 악인을 찾다가 그를 만나게 되었는데, 사자(使者)가 그에게 말했다.
"왕은 지금 살해(殺害)하는 것으로써 사람을 다스리고자 한다. 네가 능히 할 수 있겠는가?"
그 사람이 대답했다.
"염부제[13] 안에 있는 것을 다 죽여 없애라고 하여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사자는 돌아와 그의 말을 대왕에게 아뢰니 왕은 즉시 명령했다.
"그 사람을 데리고 오라."
사자가 교령을 받들고 그에게 가서 말했다.
"왕이 너를 데려오라고 명령했다."
그 사람이 사자에게 대답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부모님을 꼭 만나 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는 즉시 부모에게 아뢰었다.
"아쇼카 대왕은 일체를 살해하는 것으로 사람을 다스리고자 하는데, 나에게 그 일을 하라고 하여 지금 가고자 합니다."
부모가 허락하지 않자 그는 성을 내면서 곧 부모를 죽이고 사자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사자가 말했다.
"너는 어째서 이렇게 늦게 오느냐?"
그 사람이 대답했다.
"내가 가는 것을 부모님이 허락하지 않기에 내가 이미 그들을 죽였습니다."
뒤에 왕이 거처하는 곳에 이르자 그는 대왕에게 아뢰었다.
"사람을 다스리고자 하신다면 마땅히 뇌옥(牢獄)을 짓고, 옥문(獄門)을 장엄하되 극히 화려하게 하십시오. 그래서 그 감옥을 보는 자들이 사랑하고 즐거워하도록 하십시오."
다시 왕에게 아뢰었다.
"청컨대 왕께서는 엄한 교령을 내리시어, 옥에 들어온 자는 아무도 다시 나갈 수 없도록 해 주십시오."
왕이 말했다.
"참으로 좋은 생각이다."
이때 전타기리가가 계사(鷄寺)[14]에 이르렀는데, 절에 한 비구가 경전[修多羅]을 읽고 있었다. 그 수다라에서는 지옥의 일을 설명하고 있었는데, 즉 펄펄 끓는 가마솥[鑊湯]과 훨훨 타는 화로[鑪炭]와 칼로 만들어진 산[刀山]과 가지와 잎이 모두 칼로 된 나무[劍樹] 등과 같은 갖가지 괴로운 일을 말하면서, 만약 사람이 지옥에 태어나면 죄에 따라서 그렇게 다스린다고 설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천사수다라(五天使修多羅)』[15] 중에서 지옥의 일을 설명해 놓은 것과 같이 자세하게 지옥의 일을 설명하고 있었다. 전타기리가는 그 말을 듣고는, 그 내용에 따라서 지옥에서 사용하는 도구들을 모두 다 만들어 놓았다. #
<잡아함경>권23 ‘아육왕경’
잡아함경의 권23은 아육왕경 즉 아소카 대왕이 주인공인데, 그가 펼친 철권통치와 불교로 귀의하기까지 과정을 기술했다. 인도 역사상 최초로 인도 대륙 전역을 하나의 통치권 아래에 지배했던 아소카 대왕의 이름은 '슬픔을 모르는 자'[16]라는 뜻으로, 그 이름에 걸맞게 아소카 왕의 전반생은 피로 얼룩졌다. "너희들은 저 꽃이나 과일 나무를 베고 거기에 가시나무를 심어라."
여러 신하들은
"가시나무를 베고 과일 나무를 심는 것은 보았지마는, 꽃이나 과일 나무를 베고 가시나무를 심는다는 것은 일찍 보지도 듣지도 못하였나이다."
라고 대답하였다. 이렇게 왕은 세 번이나 명령해 베게 하였으나 그들은 듣지 않았다. 그 때 왕은 대신들에게 성을 내며 날카로운 칼로 5백 명의 대신들을 죽였다.
또 어느 때에 왕은 채녀와 권속들을 데리고 바깥 동산에 나가 놀다가 꽃이 만발한 한 무우수(無憂樹)[10]를 보았다. 왕은 그것을 보고
"이 꽃나무는 나와 이름이 같구나."
하여 매우 기뻐하였다. 그러나 왕의 형체는 추하고 더러우며 피부는 깔깔하였고, 채녀들은 그런 왕을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였으므로 그 무우수를 손으로 꺾어버렸다. 왕은 아침에 깨어 무우수 꽃이 땅바닥에 흩어져 있는 것을 보고 잔뜩 화를 내며 채녀들을 묶어 불로 태워 죽였다. 이렇게 왕이 포악한 짓을 하므로 '포악한 아쇼카'라고 불렀다.
대신 성호가 포악한 아쇼카 왕에게 아뢰었다.
"때리거나 죽이거나 하는 이와 같은 일들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시고, 응당 스스로는 하지 않으셔야 합니다."
그래서 왕은 즉시 대신 살생을 할 수 있는 자를 찾아 모집하였다. 그때 산속에 촌락이 하나 있었는데, 그 촌락에 사는 옷을 잘 짜는 사람이 자식을 하나 낳았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이름을 기리가(耆利柯)[11]라고 했는데, 그 아들이야 말로 가히 두려워할 만했다. 어질지 못한 짓을 마구 행하면서 부모에게 항상 욕을 했으며, 집안의 남녀를 모두 두들겨 패고 나아가 모든 중생을 닥치는 대로 죽이거나 해쳤다. 항상 그물을 쳐서 포획하는 것으로 업을 삼았으니, 죽이고 해친 것이 많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또 그를 전타기리가(旃陀耆利柯)[12]라고 불렀다. 왕이 악인을 찾다가 그를 만나게 되었는데, 사자(使者)가 그에게 말했다.
"왕은 지금 살해(殺害)하는 것으로써 사람을 다스리고자 한다. 네가 능히 할 수 있겠는가?"
그 사람이 대답했다.
"염부제[13] 안에 있는 것을 다 죽여 없애라고 하여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사자는 돌아와 그의 말을 대왕에게 아뢰니 왕은 즉시 명령했다.
"그 사람을 데리고 오라."
사자가 교령을 받들고 그에게 가서 말했다.
"왕이 너를 데려오라고 명령했다."
그 사람이 사자에게 대답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부모님을 꼭 만나 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는 즉시 부모에게 아뢰었다.
"아쇼카 대왕은 일체를 살해하는 것으로 사람을 다스리고자 하는데, 나에게 그 일을 하라고 하여 지금 가고자 합니다."
부모가 허락하지 않자 그는 성을 내면서 곧 부모를 죽이고 사자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사자가 말했다.
"너는 어째서 이렇게 늦게 오느냐?"
그 사람이 대답했다.
"내가 가는 것을 부모님이 허락하지 않기에 내가 이미 그들을 죽였습니다."
뒤에 왕이 거처하는 곳에 이르자 그는 대왕에게 아뢰었다.
"사람을 다스리고자 하신다면 마땅히 뇌옥(牢獄)을 짓고, 옥문(獄門)을 장엄하되 극히 화려하게 하십시오. 그래서 그 감옥을 보는 자들이 사랑하고 즐거워하도록 하십시오."
다시 왕에게 아뢰었다.
"청컨대 왕께서는 엄한 교령을 내리시어, 옥에 들어온 자는 아무도 다시 나갈 수 없도록 해 주십시오."
왕이 말했다.
"참으로 좋은 생각이다."
이때 전타기리가가 계사(鷄寺)[14]에 이르렀는데, 절에 한 비구가 경전[修多羅]을 읽고 있었다. 그 수다라에서는 지옥의 일을 설명하고 있었는데, 즉 펄펄 끓는 가마솥[鑊湯]과 훨훨 타는 화로[鑪炭]와 칼로 만들어진 산[刀山]과 가지와 잎이 모두 칼로 된 나무[劍樹] 등과 같은 갖가지 괴로운 일을 말하면서, 만약 사람이 지옥에 태어나면 죄에 따라서 그렇게 다스린다고 설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천사수다라(五天使修多羅)』[15] 중에서 지옥의 일을 설명해 놓은 것과 같이 자세하게 지옥의 일을 설명하고 있었다. 전타기리가는 그 말을 듣고는, 그 내용에 따라서 지옥에서 사용하는 도구들을 모두 다 만들어 놓았다. #
<잡아함경>권23 ‘아육왕경’
그가 왕이 됨으로써 역사에 이름을 알린 첫 순간은 아소카 자신의 이복 형이자 강력한 라이벌인 수시마를 제압하고 죽인 것이었다. 이후 99명에 달하는 이복 형제를 숙청하고 장장 10여 년에 이르는 통일전쟁을 벌이는 동안 인도 전역은 피로 물들었다. 불교에서 최고의 군주로 꼽는 아소카 왕에 대한 기록에도 이와 같은 내용이 나온다는 것은 아소카가 실제로 양면성을 가진 인물이었음을 잘 나타내준다.[17]
그러나 통일이라는 목적이 달성되자, 아쇼카 대왕은 기원전 260년경에 불교로 전향한다.[18] 이후 아소카는 오랫동안 지속된 정복 전쟁으로 수많은 희생자를 만든것을 후회하고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며 최고의 복지 군주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모든 종교는 그들 모두가 자기 통제와 마음의 순수함을 갈망하기 때문에, 도처에 존재해야 한다.
나의 영역에서는, 어떤 살아있는 존재도 희생제의에서 제물로 바쳐지거나 도살되어서는 안 된다.
종교 간의 접촉은 좋은 일이다. 하나의 종교는 다른 종교들의 교리를 들어보고 존중해야 한다. 천신들로부터 사랑받는 왕은 모든 종교가 다른 종교의 좋은 교리를 잘 배우는 것을 간절히 원한다.
https://en.wikipedia.org/wiki/Edicts_of_Ashoka
칼링가[19]라는 이웃 나라를 정복하기 위해 보병 60만, 기병 10만, 코끼리 부대 9천 마리를 이끌고 쳐들어가 10만이 넘는 인명을 해쳤는데, 폐허가 된 칼링가의 수도를 직접 둘러보다가 자신의 야심으로 무수한 인명이 죽고 고아가 된 아이들의 모습과 미쳐버린 사람들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20]
칼링카 정복으로 아소카는 인도 최초 통일왕조를 세우는 데는 성공했지만[21] 스스로 많은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그 뒤로 다른 나라 침략을 그만두고 공공사업을 후원하고 병원과 고아원, 양로원을 세워 전쟁으로 떠돌던 이들을 치료하고 돌보게 했다고 한다. 더불어 역사상 처음으로 동물보호 및 학대금지 법령을 제정하였으며, 동물병원을 세우고 인류 최초로 수의사 제도를 만들기도 했다. 덕분에 계몽주의 유럽 역사학자들에게부터도 대단한 관심을 받았으며 유럽 학자들은 천 년도 더 된 옛날의 아시아에 이런 훌륭한 업적을 쌓은 군주가 있는 게 놀랍다며 감탄했다고 한다.
전쟁에 대한 참회와 반성의 의미로 불교를 열성적으로 신봉하여 불탑을 세우고 승려들을 스리랑카나 디아도코이 국가 등 이웃 나라로 보내 불교 선교에도 힘을 썼다. 아소카 왕의 치세는 대다수의 주변국들이 불교를 믿기 시작하는 시기와 겹치니 그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불교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불교만을 강요하지 않고 다양한 종교를 관대하게 인정했다. 특이하게도 마우리아 왕조의 1대 왕이자 그의 할아버지인 찬드라굽타 마우리아는 자이나교를, 2대 왕이자 그의 아버지인 빈두사라는 힌두교를 믿었다.[22] 아쇼카도 성장 과정에서 자이나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불교로 개종하기 전까지는 자이나교를 믿었으리라는 설이 있다. 아쇼카의 손자인 삼프라티는 실제로 자이나교 신자였으며, 아쇼카의 불교 장려 정책을 폐지했다.
불교의 불살생 원리를 몸소 실천하고 공평한 정책을 펼쳐 인심을 얻은 그는 수많은 불교 승원과 기념탑을 세우고 불자들을 위해서 후원을 아끼지 않고, 몸소 석가모니 부처의 유적을 찾아 참배하고[23] 여러 왕비들이 낳은 자녀들이 출가해 승려가 되게 하는 것은 물론 그들을 스리랑카를 비롯한 외국 각지로 전법사[24]로 파견한다.[25]
아소카 왕이 포교단을 보낸 아홉 개 지역 가운데. 특기할 만한 것으로는 (팔리어 경전을 따르면) 다음과 같은 곳이 있다. 오늘날의 인도 변경과 미얀마 하 지역에 해당하는 수반나부미, 오늘날의 스리랑카에 해당하는 탐바판니, 나중에 정복되어 헬레니즘 왕국이 되는 소그디아나, 박트리아 지역인 요나카랏타, 그리고 히말라야 지역 등이다. 수반나부미 지역에 대한 포교 행위는 시기상조였는지 몰라도 마힌다[26]가 이끈 스리랑카 포교단은 그 후 불경을 문자로 기록하는 일에 획기적인 역할을 했다[27]
아소카 대왕은 붓다 입멸 뒤에 분배받은 사리를 봉안한 근본8탑 중 일곱 곳을 그 안에 봉안했던 사리를 나누어 전국 각지에 불탑 8만 4천 기를 짓게 했다.[28] 아소카 왕의 8만 4천 탑 건립도 인도 전역에 불교를 유포한다는 점과, 동쪽 교단에서만 존재하던 불탑이 전 인도로 확대되었음을, 아울러 동쪽 교단의 권위 축소를 의미한다.
세 번째의 경우는 2차 결집을 통해 확인되는 서쪽 교단의 약진과 상호 연관지어서 이해할 수 있다. 즉 붓다 입멸 뒤에 성립되었던 서쪽 교단으로서는 도저히 어찌할 수가 없는 '사리'라는 붓다의 성물이 이제는 서쪽 교단에서도 찾아볼 수 있게 되었고 서쪽 교단이 더욱 강력하게 약진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실제로 아소카 왕의 자녀로서 출가해 스리랑카 불교의 시원을 이루게 되는 마힌다와 상가미타는 모두 서쪽 교단의 인물이었다.[29] 이러한 아쇼카 대왕의 재위 17년 되던 해에 마가다의 수도 파탈리푸트라(화씨성)에서 마우드갈리푸트라 티쉬야의 주도로 비구 1천 명이 소집되어 결집을 행했다. 이것이 제3차 결집(화씨성 결집)이다.[30]
백성들의 생활 개선에도 큰 힘을 쏟아 우물을 파 물이 부족한 지역을 돕게 했으며, 흉년에 대비하여 곡식을 저장하고 싼 이자로 빈민들을 경제적으로 뒷받침하도록 한 덕에 오늘날 아소카 대왕은 인도 역사상 가장 훌륭했던 왕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소카의 비폭력, 비전쟁 정책에 대해 그의 아들들을 포함해 불만을 가지는 세력 역시 많았고, 결국 아소카가 죽은 뒤로 이런 비폭력, 비전쟁 법률은 흐지부지되어 사라지게 된다.
불교에 관심이 많은 왕이었다 보니, 불교 문화권에서는 불교의 수호신 같은 이미지로 전해지기도 한다. 한국에도 그와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서기 574년 아소카왕이 철 5만 7천 근과 금 3만 분으로 석가삼존 불상을 만들다가 실패하자 혼자 힘으로는 안 될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금과 철, 그리고 삼존불상의 모형을 배에 실어 보낸 것이 신라 땅에 닿게 되었다. 그래서 신라 진흥왕은 아소카가 보낸 금과 철을 가지고 황룡사의 장륙존상을 주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황룡사 장륙존상은 신라삼보 중 하나로, 나중에 고려 태조 왕건도 이 장륙존상의 안부를 묻기도 하는 등 중요한 보물로 여겨졌다. 재료의 양에 대한 꽤 세세한 기록이 있기에 큰 불상들을 만든 것은 사실인 듯하지만, 그 재료를 인도에서 보내왔다는 것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시기상으로 아소카왕이 살았던 시대와 거의 800년 차이가 나기 때문에[31] 불교적인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만들어진 설화로 추정된다. 한편, 이때 만든 장육존상은 보관되던 절인 황룡사가 사라진 지 오래인 17세기 조선 시대까지 홀로 남아있었음이 동경잡기의 기록으로 확인되나 구한말 이전에 사라졌다.
3. 여담
양무제 소연은 '동방의 아육왕'이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치세가 6세기 전반(549년 졸)이다.아소카왕에 대한 전승 중 특이한 것 중 하나가 비마나라는 비행체이다. 탑재된 병기의 위력이 거의 핵폭탄급(...)이었다고 하며, 평소에는 쓰지 않다가 중요한 시점에 투입되어 매우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한번 사용하면 적국 영토를 그야말로 초토화시킬 정도로 위력적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가공할 무기 실전에 사용한 이후 아소카 왕은 직접 적국을 들러 그 진상을 파악했는데, 그 잔혹한 위력에 경악하여 이후 비마나를 전투병기에서 정찰기로 그 역할을 축소했다고 한다. 이후로 개심하여 불교를 부흥시키게 되었다고 한다. 비마나에 대한 전승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인도 진출에 관한 일화까지 연결되고 있다.[32] 이러한 드라마틱하고 신비한 요소로 인해 비마나는 현재까지도 무수한 작가들과 학자들에게 관심을 받고 있다.
또 다른 희대의 정복군주들인 알렉산드로스 3세보다는 반세기쯤 후, 시황제보다는 반세기쯤 전 사람이다.
아소카의 현대형인 아쇼크(Ashok)는 지금도 인도에서 종교를 초월하여 남성 이름으로 애용되는 이름이다.
4. 대중 문화에서
4.1. 영화
4.1.1. 아소카 대왕
2001년 인도에서 최고 인기스타인 샤룩 칸 주연으로 무려 3시간에 달하는 동명의 영화를 만들었는데 인도 최고의 스타가 인도 최고의 군주를 연기해서 인지 흥행은 성공했다.4.2. 만화 및 애니메이션
4.2.1. 라젠카
1997년에 나온 애니메이션 라젠카에서 이름이 언급된 바 있다. 역사대로 젋은 시절에는 전쟁광이나 다름없는 모습을 보이나 어느 순간 반전론을 내세웠고, 세계 평화 유지를 위해 비밀조직을 만들었다는데, 그 조직의 문양이 주인공의 부메랑형 무기에 새겨진 문양과 비슷하다는 추측이 작중 인물을 통해 나온 것. 그 이후 이 복선은 묻힌다. 이 무기가 주인공 아버지의 유품이기도 해서 주인공의 출신을 암시하는 복선처럼 보였지만 마지막까지 설명되지 않았다.4.2.2. 스타워즈
스타워즈 프리퀄 삼부작의 주인공 아나킨 스카이워커와 그의 파다완 아소카 타노를 주연으로 한 애니메이션 시리즈 스타워즈: 클론 전쟁에서 아소카 타노의 이름은 아소카 대왕에서 따왔다. 시리즈 제작에 참여한 헨리 길로이는 데이브 필로니가 애슐라 (Ashla)라 명명하고, 그걸 조지 루카스가 아소카 (Ashoka)라 수정했으며, 특별하게 만들기 위해 자신이 아소카 (Ahsoka)로 바꾸었다고 밝혔다.[33]4.3. 게임
4.3.1. 문명 시리즈
문명 4에서 마하트마 간디와 함께 인도 문명의 지도자로 나온다. 사회 제도의 유지비를 반감시켜 주는 조직적 특성과 문명의 운영을 보다 유연하게 해 주는 종교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종교적은 몰라도 조직적은 문명이 어느 정도 성장하기 전까지는 보너스가 체감되지 않고 사회 제도 중에는 유지비가 아예 없는 것도 있어 평이 그다지 좋지 않다. 반면 간디는 종교적 특성은 같이 가지고 있으면서 위인들이 빠르게 나오게 해 주는 철학적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 아소카보다 더 강력하다는 평. 그나마 인도의 고유 유닛인 숙련된 일꾼은 행동력이 높기에 일반 일꾼에 비해 더 빠르게 일한다는 것이 위안거리다.4.3.2. 영웅전희
에로게에서 여성화되어 등장했다.4.3.3. 블레이크와 모티머 시리즈
'6번째 대륙의 석관' 편에서는 현신하여 인도의 민족주의자들을 추종세력으로 거느리는 것으로 나온다.4.3.4. 임페라토르: 롬
빈두사라의 미성년 아들로 등장한다.4.3.5. 크루세이더 킹즈 시리즈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는 Holy Fury DLC가 있을 경우, 인도에서 불교/힌두교/자이나교를 믿는 영주일 때 정해진 조건을 맞추면 시작되는 연퀘를 완료하면 플레이어가 아소카의 현신으로 인정받으며 전용 혈통을 받는다. 크루세이더 킹즈 3에서는 기본판부터 있는 기능이다.4.3.6. 도미네이션즈
아쇼카 석주 할인 이벤트의 배경 지식에 등장한다.4.3.7. Fate/Grand Order
4.4. 기타
-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다큐멘터리인 코스모스: 가능 세계에서 아소카 대왕에 대해 소개한 바 있는데,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이웃 나라를 잔혹하게 짓밟은 희대의 폭군이었던 그가, 일순간에 백성들에게 무한한 자비를 베풀고 평화와 사랑을 강조한 최고의 성군으로 변모한 과정을 보여주었다.
- 맹꽁이 서당으로 유명한 윤승운이 여러번 아소카왕에 대한 만화를 그렸었다. 다만 불교 위주의 이야기다 보니, 형제들을 모두 도륙한 피도 눈물도 없는 폭군이 불교에 감화되어 회개한다는 식으로만 나와 그의 치세를 논하지는 않았다.
5. 관련 문서
[1] 인도의 국장이 바로 아소카 대왕의 석주를 묘사한 것이다.[2] 물론 아쇼카 대왕과 불교의 인연을 설명하기 위한 윤문일 가능성이 높다.[3] 중인도 폐사리국(吠舍離國)의 남쪽에 있던 지명이다. 갠지스 강의 남쪽 강변에 첨파국이 있었는데, 섬부주의 여러 성들은 이 나라의 도성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현재 인도 벵갈 지방의 바가르푸르가 이 나라의 도읍지라고 추정한다.[4] 인도의 카스트 제도에서 다른 계급 간 통혼은 허용되지 않는다. 또한 임금이라고 해도 카스트 계급 자체를 바꿀 수는 없다.[5] 사실 카스트 제도하에서 이발사도 브라만에 속하기는 한다. 아래 카스트가 몸에 손대는 것을 부정탄다고 여기니 브라만이 이발사가 됐던 것이다.[6] 나중에 아쇼카의 어머니에게는 따로 가서 말했는데, 아쇼카의 어머니는 나중에라도 왕이 다시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으니 피했다가 아쇼카가 왕이 되거든 돌아오라고 일러주었다 한다.[7] 타크샤쉴라의 음역으로, 석실(石室)이라 번역한다. 고대 북인도에 자리했던 나라 이름이다. 왕사성의 북쪽, 건타라국의 동남쪽, 가습미라국의 서남쪽에 있었다. 고대인도 문화의 중심지였으며, 한때 대승불교가 성행했다. 일찍이 건타라국의 속지(屬地)였으나, 현장이 서역에 갔을 당시에는 가습미라국(카슈미르)에 예속되었다고 한다. 현재 인도 펀자브(punjab) 지방의 북쪽, 파키스탄의 영토인 라왈핀디(rawalpindi) 지역에 해당한다.[8] 적법하다면[9] 현장에 따르면 파탈리푸트라의 옛 왕궁 북쪽에 높이 수십 척 되는 돌기둥이 있었는데 이곳이 아쇼카 왕이 지옥을 만든 곳이라고 한다.[10] 마야 부인이 석가모니 부처를 낳은 룸비니 정원의 그 나무 종류이다. 이 나무는 가지에서 뿌리가 땅을 향해 덩굴처럼 자라는데, 마야 부인이 룸비니에서 그런 뿌리를 잡고 석가모니를 낳았다고 한다.[11] 산(山)이라 한역한다.[12] 가외산(可畏山: 무서워할 만한 산)이라 한역한다.[13] 이 세상이란 뜻이다.[14] 범어 굴굴타아람마(Kukkutaarama)를 번역한 것으로, 계원(鷄園)이라고도 번역한다, 계작사(鷄雀寺), 계두말사(鷄頭末寺)라고도 한다. 인도 마갈타국에 있던 절 이름이며, 아쇼카왕(BC 3세기)이 창건하였으며, 이름난 스님들이 많았다고 한다. 여담으로 삼국유사에 천축 즉 인도 사람들이 신라인을 가리켜 구구탁예설라(矩矩托禮說羅)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이는 닭을 숭상하는 나라라는 뜻이 담겨 있는 의미였다고 한다.[15] 혜간(慧簡)의 저작인 『불설염라왕오천사자경(佛說閻羅王五天使者經)』의 약칭으로, 악행을 지은 자가 지옥에 떨어져 겪게 되는 일들을 설하고 있다.[16] 정복 전쟁 시절의 잔인하고 무자비한 그의 성품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설도 있다.(김미숙 <인도불교사-붓다에서 암베드카르까지> 44쪽)[17] 놀랍게도 그리스도교에서 대제로 추앙하는 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 역시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군주라는 이면에 의외의 잔인함과 포악함이 존재했다는 점에서 아소카 대왕과 닮아 있다.[18] 그 전에는 아버지 빈두사라왕처럼 아지비카교도였다.[19] 오늘날 오디샤 주 해안지대.[20] 강에 물이 아니라 피가 흘렀으며, 적국 사람들의 피가 발목까지 차오를 정도였다고.[21] 물론 인도 아대륙 전체를 통일한 것은 아니고 남부 일부 지역까지 차지하지는 못했다.[22] 물론, 부파 불교와 대승 불교가 정립되기 이전까지만해도, 초기 불교와 힌두교, 자이나교는 카스트에 대한 관점이나 수행 방식의 차이만 빼면 외견상으로 서로 대동소이했다. 서로의 종교로 개종하거나 교리 면에서 활발한 교류를 하는 경우가 매우 흔했다. 뚜렷하게 차이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서기 7세기 이후의 일이다.[23] 이는 당대의 고승 우바굽다의 인도에 의한 것이었는데, 이때 아쇼카 대왕은 방문 지역의 세금을 감면해 주고 기념 석주를 세워서 석가모니 부처의 성소를 기렸다. 이때 세워진 석주들을 '아소카 석주'라고 부르며, 훗날 현장이 인도를 찾았을 때 인도 각지를 돌며 견문한 내용을 기술한 대당서역기와 함께 석가모니 붓다의 유적지를 찾고 확정하는 핵심 자료가 된다(자현, <불교사 100장면> 109쪽). 또한 현장 이전에 인도를 찾았던 법현의 불국기나, 후대 신라의 승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에도 아소카 석주에 대한 언급이 있다.[24] 자현은 '법대관'으로 지칭해 불렀다. 불교를 널리 알리는 일을 하는 직책으로 당시 인도와 국교를 맺고 있었던 모든 국가에 파견되었고, 그중에는 그리스와 로마도 있었다. 자현, <불교사 100장면> 109쪽[25] 김미숙 <인도불교사-붓다에서 암베드카르까지> 44쪽[26] 아소카의 아들 혹은 친척[27] 팔리어 경전은 스리랑카에서 기록되었다.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붓다, 꺼지지 않는 등불> 121쪽[28] '8만 4천 기를 지었다.'는 것은 실제로 아소카가 불탑 8만 4천 기를 지었다는 뜻이 아니다. 8만 4천은 '많다', '완전하다.'는 의미로 인도 및 불교에서 흔히 사용하는 관용적인 숫자이다. 그리스도교에서 7을 완전한 숫자로 사용하는 것과 같다.[29] 자현 <불교사 100장면> 109쪽[30] 김미숙 <인도불교사-붓다에서 암베드카르까지> 44쪽[31] 기록 자체도 빈 배가 1300년 이상을 바다에서 떠돌아 다녔다고 주장한다. #[32] 이때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위에서 잠시 머물다가 날아갔다고 한다. 대왕은 특유의 언변으로 스스로를 '하늘도 인정한 남자'라고 칭하며 도리어 사기를 고무했다고 한다.[33] @HGilroy67 (Henry Gilroy), 2018년 7월 18일, 2023년 4월 2일 발췌 URL[34] 플레이어가 온갖 저승에 갔다왔던 메인 스토리와 이벤트를 클리어한 경우 그 세계들의 모습이 회상으로 잠깐 나온다.[35] 우리 같은 서번트는 이미 죽어서 끝난 이들이고 유이 쇼세츠는 망집 때문에 또 자신들을 양산해 죽어나갈 거니 소용 없는 짓이라고 말했지만 리츠카 일행이 가치가 있다고 반론하자 수긍하고 차크라바르틴으로 공상수의 성장을 억제하면서 자신의 진명을 밝혔다. 반응을 보면 처음부터 이런 대답을 기대하고 일부러 차가운 선문을 던진 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