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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어 쇼펜하우어/사상 및 영향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1. 개요2. 사상
2.1. 의지의 형이상학
3. 영향
3.1. 철학사적 영향3.2. 심리학사적 영향3.3. 문학사적 영향3.4. 음악사적 영향3.5. 그 외 영향을 미친 인물

1. 개요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사상 및 영향을 정리한 문서.

2. 사상

2.1. 의지의 형이상학

쇼펜하우어는 세계를 '표상의 세계'와 '의지의 세계', 이렇게 두 부분으로 나눈다. 하지만 사실 '표상의 세계'는 인간이 인식함에 있어서 왜곡된 가상[1]에 불과하므로 사실상 쇼펜하우어는 '의지의 세계'를 세계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의지는 나누어지지 않는 것이다. 우주 전체가 하나의 의지다. 그것을 우리가 억지로 인식론의 관점에서 하나하나 구별하여 나누는 것일 따름이다. 이를 개별화의 원리라고 한다. 이 개별화의 과정에서 충분근거율이 개입한다. 충분근거율이란 '시간과 공간', '인과율', '동기', '논리 규칙'을 말하는데, 하나의 의지를 시간과 공간으로 특정짓고, 원인과 결과로 구분하며, 논리적인 규칙을 세우고, 행위에 따른 동기를 찾는 것을 통해서, 개별적인 것으로 나누어져 인식된다는 것이다.

다만 쇼펜하우어는 여기서 다소 논쟁적인 개념을 도입한다. 그는 의지가 맹목적으로 요동치는 과정에서 수많은 다양한 단계들의 의지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 의지는 본래 하나의 의지이긴 하지만 '부분적으로는' 여러 의지들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지들은 플라톤이데아와 비슷한 개념으로 규정될 수 있는데, 이를 '의지의 객관화' 또는 '이념(idee)'이라고 부른다.[3] 그리고 이 의지의 이념들이 충분근거율에 의해 시간과 공간, 인과율, 동기, 논리 규칙으로 구분되어 인식될 때야 비로소 개체들로 특정되어 개별화된다는 것이 쇼펜하우어의 주장이다. 꽃을 예로 들면, 이데아와 같은 꽃의 본질이 있고, 이것이 꽃이라는 의지의 '이념'이다. 이 '이념'을 충분근거율을 통해 '인식'해야 비로소 각각의 구체적이고도 개별적인 꽃으로 나누어진다. 즉, 의지와 표상 사이를 매개하는 역할을 이념이 한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보통 우리는 표상의 세계에 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으며, 표상의 세계에서 원인, 동기, 이유, 구별 등의 개별화의 논리로 인해 각 개체들로 구분되어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의지대로 행할 뿐이고 그 이후에 자신의 행동을 논리적인 것으로 합리화하는 것일 따름이라는 게 쇼펜하우어의 주장이다. 즉, 구분된 각 개체들의 표상 밑에는 의지가 숨겨져 있어서 의지의 명령대로 행동하고 있지만 각자는 구분되어 있다고 착각하는 상태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각 개체는 자신이 지닌 의지가 자신만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의지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서로 싸우게 된다. 이로서 홉스가 말했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일어난다. 그러한 세상은 자신을 개별체라고 생각하는 맹목적인 부분 의지가 자신의 표상적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이기적인 세상이다. 그러나 그들은 본질적인 의지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표상적 욕망을 충족시킬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결코 충족되지 않는 욕망을 가지게 되며, 그로 인해서 인간은 끊임없이 괴롭고 고통스럽다.[4]

그러나 우리가 개별적인 것을 뛰어넘어 직관적으로 의지의 이념을 포착해낼 수 있다면, 이 이념에 대한 통찰을 통해 결국 그 의지가 하나의 우주 의지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러한 앎에서 '나'와 '너'는 더 이상 구분되지 않기 때문에 서로 싸울 필요도 없을 것이다. 또한 이념에 대한 통찰을 통해 서로가 하나의 의지임을 알게 된다면, 서로는 서로에 대해 동정심을 가지게 될 것이고, 이로서 서로를 구분함으로써 발생하는 '욕망으로 인한 고통'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광기를 가진 예술가적 천재만이 자신의 관심, 의욕, 목적은 전혀 안중에 두지 않은 채, 순수하게 직관에 몰입하여 이러한 이념을 포착해낼 수 있다고 한다.[5] 그리고 관중들은 그 천재의 예술 작품을 '관조'함으로써 세계가 하나의 의지임을 깨닫고는 삶의 고통을 잠시나마 완화시킬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관조'의 방식은 일시적이다. '관조'가 끝나면 우리는 다시 '표상의 세계'에 빠져 욕망을 추구하고 욕망에 의한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일을 반복할 것이다. 그래서 더 본질적인 방법이 필요하다. 쇼펜하우어의 생각에 의하면, 그 방법이란 의지의 방향을 되돌려 의지 상태를 무(無)로 만드는 전략으로서, 개별적인 의지가 일어날 때마다 그 의지를 부정하는 것, 그리하여 자기 자신만을 위한 욕망을 억제하는 것, 즉 자기-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다. 개별적인 삶 자체가 '표상이라는 가상'이 만들어낸 고통이기 때문에, 이기적인 마음에서 비롯된 '삶에의 의지'를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삶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6] 이런 개체적 의지의 부정을 통해서야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의지 전체가 본래 하나임을 깨닫게 되고, 이로써 우리는 우리의 욕망에서 벗어나 욕망이 만들어내는 삶의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이다. 쇼펜하우어는 그것이 불교열반과 같은 것이라고 본다.

3. 영향

쇼펜하우어는 철학분야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그 외의 과학분야, 예술분야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1852년에 영국의 존 옥센포드라는 사람이 <웨스트민스터 리뷰> 4월호에 쇼펜하우어 사상에 대한 글을 기고했다. 존 옥센포드는 에커만이 쓴 『괴테와의 대화』 등을 영어로 번역한 번역가이기도 했다. 이후 영국에 쇼펜하우어가 알려졌고, 영국의 토마스 칼라일, 찰스 다윈같은 영어권 지식인들이 쇼펜하우어를 탐구했다.

'아르투어'는 영어로는 '아서'(Arthur)가 되는데 이것은 사업가였던 쇼펜하우어의 아버지가 아들을 사업가로 키우고자 영국친화적인 이름을 아들에게 지어준 것이었다. 이 때문에 영국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미국에까지 전파되어 고독한 생활을 추구한 헨리 데이비드 소로나 랄프 왈도 에머슨은 자신의 저서에 쇼펜하우어의 글을 인용했고 인간에게는 무엇보다 틀에 박힌 것을 혐오하는 개성이 중요하다고 강변했고 에머슨은 불교와 우파니샤드에 관심이 많아졌다.

3.1. 철학사적 영향

독일 철학자 파울 도이센(Paul Deussen)은 프리드리히 니체의 친구로 유명한 사람인데 이 사람은 쇼펜하우어 전집 출판에 힘을 썼고, 쇼펜하우어학회를 만들어 활동했다. 인도철학과 우파니샤드에 대한 연구자로서 큰 평가를 받고 있다. 도이젠은 직접 인도로 여행을 갔고 이에 대한 여행기를 남기기도 했다. 도이젠은 플라톤, 칸트, 인도철학, 쇼펜하우어에 대한 저서를 남겼고 학자로서 부지런히 활동했다.[7]
쇼펜하우어가 살았던 시대에 속하는 19세기 후반에는 가장 유명하고도 영향력 있는 철학자가 되었다. 19세기 초반의 일부 철학 교사들은 쇼펜하우어의 저서를 탐구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쇼펜하우어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쇼펜하우어는 20세기 초의 모든 철학자 중에서 가장 중요한 한 사람인 비트겐슈타인에게 명백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8]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쇼펜하우어는 이례적으로 국가주의[9] 에 얽매이지 않았고 독일의 작가들을 훤히 잘 알았던 만큼이나 영국과 프랑스의 작가들에 대해서도 능통했다. 여타 철학자들보다도 믿음직한 철학을 추구한 예술가와 문학가들에게 쇼펜하우어가 끼친 영향은 막대했다. 쇼펜하우어는 '의지'라는 개념을 강조하면서 철학을 전개했다. 그런데 쇼펜하우어는 비록 의지를 메타자연학의 토대로 삼았어도 윤리적으로는 악으로 간주했다. 그렇게 악한 의지는 염세주의자에게는 적대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다. (중략) 쇼펜하우어의 의지 이론은 많은 철학자들에게 수용되었는데 특히 독일의 니체나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 미국의 철학자 존 듀이, 미국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 등에게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루소칸트가 그와 유사한 의지이론을 준비했지만 그토록 순수한 의지이론을 가장 먼저 설파한 철학자는 쇼펜하우어였다.[10]

20세기 초기에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바탕으로 자신의 철학을 시작했다.[11]

영국의 철학자 칼 포퍼는 자신의 아버지 서재에 쇼펜하우어와 찰스 다윈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고 회고했다.[12] 칼 포퍼는 에르빈 슈뢰딩거를 언급하기도 하는데, 잘 알려져 있듯이 슈뢰딩거는 인도철학에 몰두했으며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수용했다고 말한다. 칼 포퍼는 자신의 책 이름을 짓는 일에 쇼펜하우어가 지은 이름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말한다. 칼 포퍼는 자신의 아버지 서재에는 웬만한 철학서적은 대부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여러 책을 읽다가 칸트순수이성비판을 만났는데 칸트의 글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쇼펜하우어의 여러 저서들을 읽었고 그 덕분에 칸트의 책도 제대로 읽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책은 자신이 태어나서 최초로 진지하게 읽고 공부한 두꺼운 철학서적이라고 말했다.[13]

3.2. 심리학사적 영향

쇼펜하우어 찬미자였던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에두아르트 하르트만은 자신의 저서 <무의식의 철학>에서는 쇼펜하우어의 심리학적인 주장을 획기적으로 발전시켰다. 프로이트정신분석학의 기초에 해당하는 '억압'에 대해서 자신보다 먼저 쇼펜하우어가 잘 설명했다는 것을 인정했다.[14]근대 심리학자들에게 큰 영감을 선사했으며 심리학이 정식 학문으로서 자리잡기 전에 심리학적인 주장을 철학서적에서 펼쳤던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했다. "물을 산소수소로 분해한 라부아지에의 작업이 화학의 발전에 기여했다면 매우 오랜 세월 동안 분석되기 어려웠던 "자아 혹은 영혼"이라 불리는 것을 이질적인 두 가지 성분[의지와 지성]으로 분해하는 작업은 철학의 발전에 기여한다." 분석심리학의 창시자 카를 융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헤겔의 거만한 문체보다는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탐구한 것이 가장 큰 도움이 되었다고 밝혔다.
헤겔은 난해하고 거만한 문체로 나를 겁먹게 해서 나는 노골적인 불신감으로 헤겔을 대했다. 헤겔은 마치 자신의 언어구조 속에 갇혀 그 감옥에서 거드름을 피우는 몸짓으로 돌아다니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의 탐구가 가져다 준 가장 큰 결실은 쇼펜하우어였다. 쇼펜하우어는 눈에 보이도록 여실히 우리를 둘러 싸고 있는 고통과 고난에 대해서 처음으로 이야기한 사람이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이것을 주목하지 않는 것 같았다."[15]

3.3. 문학사적 영향

아마도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분야는 문학계일 것이다. 러시아의 소설가인 톨스토이, 이반 투르게네프, 도스토옙스키, 프랑스의 작가 오노레 드 발자크, 마르셀 프루스트, 에밀 졸라, 그리고 독일 작가 토마스 만, 헤르만 헤세, 프란츠 카프카, 영미권 작가인 토마스 하디, 조지프 콘래드같은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의 창작에 쇼펜하우어의 사상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인정했다. 헤르만 헤세의 작품을 보면 불교적 색채가 강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를 두고 쇼펜하우어의 사상이 반영된 것이라고 평가받기도 한다. 쇼펜하우어의 이름이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와 토마스 하디의 <테스> 등의 소설에서 나타나기도 하며, 발자크의 소설 <루이 랑베르>에서의 주인공 루이 랑베르가 주장한 철학의 내용이 쇼펜하우어의 철학과 같은 맥락을 지니고 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프랑스의 앙드레 지드는 자서전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쇼펜하우어로부터 위로를 받았다. 표현할 수 없는 기분으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자세히 읽어나갔고 자주 읽었다. 다른 모든 것들이 나의 주의를 뺏지 못할 정도로 집중해서 읽었다. 스피노자니체같은 철학자들의 책도 읽었다. 내가 철학에 빠진 계기는 쇼펜하우어 덕분이며 오로지 쇼펜하우어 덕분이었다. 쇼펜하우어보다 헤겔을 더 좋아하는 인간이 있다는 것은 황당한 일이다."[16]

톨스토이는 유일하게 쇼펜하우어의 초상화만을 집에 걸어두었다고 한다. 톨스토이는 장편소설 <전쟁과 평화>를 탈고하기 직전인 1869년 여름에 자신의 친구이자 쇼펜하우어 책을 번역한 아파나시 페트(본명:페트 센신)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이번 여름에 내가 뭘 했는지 알고계십니까? 나는 쇼펜하우어를 읽으며 강력한 기쁨을, 여태껏 한 번도 몰랐던 감동을 만끽했습니다. 나는 쇼펜하우어의 모든 책을 모조리 구해서 읽었고 자주 읽고 있습니다. 쇼펜하우어의 강의를 수강한 여느 학생도 내가 이번 여름에 발견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생각하고 배우지 못했으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앞으로 나의 이런 의견이 언제 변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나는 쇼펜하우어야말로 모든 인간들 중에 위대한 천재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당신은 쇼펜하우어가 철학적 주제들을 다룬 무언가를 썼다고 말해주셨습니다. 그게 무엇인가요? 그것은 경이롭고도 생생하게 성찰되는 온전한 세계입니다. 나는 벌써부터 쇼펜하우어의 글을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와 함께 번역에 참여하시겠습니까? 쇼펜하우어의 책을 많이 읽는 나는 어째서 아직도 쇼펜하우어가 그토록 세상 사람들에게 덜 알려졌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그 이유란 아마도, 쇼펜하우어가 토로했듯이 세계에는 하찮은 인간들로 가득하기 때문이겠지요.[17]

단편 작가로 유명한 프랑스의 기 드 모파상, 러시아의 안톤 체호프, 영국의 윌리엄 서머싯 몸,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등도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았다. 문학가들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영향은 20세기에도 지속되었다. 쇼펜하우어의 이름은 안톤 체호프의 희곡에 많이 나타났는데, 체호프 이후에도 쇼펜하우어의 영향은 조지 버나드 쇼, 루이지 피란델로, 사무엘 베케트 등의 희곡 작품에서 나타나기도 했다. 예술 분야에서 이 정도로 이야기될 수 있는 철학자는 별로 없다. 예술,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는 카를 마르크스조차도 쇼펜하우어에 견줄 수는 없다. 당연히 쇼펜하우어는 철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자신이 철학자가 된 계기는 쇼펜하우어 때문이라고 말했다.[18] 젊은 시절에 니체는 책방에서 우연히 쇼펜하우어의 책을 발견하여 읽고 철학자가 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다음과 같이 쇼펜하우어를 평가한다.
오늘날 문화가 이토록 천박하지고 황폐해지는 시대 속에서 우리는 기운찬 줄기와 가지를 내뻗을 수 있는 생명력을 지닌 뿌리 하나라도, 비옥하고 건강한 토양 한 줌이라도 찾으려고 헛되이 애쓴다. 그러나 도처에는 먼지와 모래뿐이니 모든 것은 마비되고 탈진해서 죽어간다. 이런 상태에서 마음 한 자락 둘데 없이 고독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자기상징은 뒤러가 그려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죽음과 악마와 동행하는 무장 기사'이다. 무쇠처럼 굳센 눈빛과 철갑옷으로 무장한 이 기사는 자신의 끔찍한 동행자들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희망도 품지 않으면서 자신의 말을 타고, 자신을 따르는 개와 함께 험난한 길을 혼자서 고독하게 걸을 줄 안다. 뒤러(미술가)가 묘사한 이 기사가 바로 우리의 쇼펜하우어와 같다. 그는 모든 희망을 잃고도 진리를 추구했다.

3.4. 음악사적 영향

음악가 리하르트 바그너는 자신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쇼펜하우어의 사상에 대한 답변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말은 1859년에 나왔는데, 쇼펜하우어는 바그너에게 무관심했으므로 바그너가 그런 말을 했는지도 몰랐을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1854년에 친구이자 시인인 게오르그 헤르베크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들고 바그너를 찾아갔다. 헤르베크는 바그너에게 쇼펜하우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추천해주었다. 바그너는 이것을 한 번 읽었고 감동받았다. 바그너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1년 동안 4번이나 통독한 것으로 잘 알려져있다. 바그너는 자신의 작품 니벨룽의 반지와 '존경하는 마음과 함께'라는 자필 헌사를 보냈으나 쇼펜하우어는 어떤 답장도 바그너에게 보내지 않았다. 쇼펜하우어는 바그너의 작품인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을 바그너와 함께 관람한 적도 있는데 쇼펜하우어는 흥미를 잃고 말았다. 쇼펜하우어는 바그너에 대해서 '바그너는 음악이 뭔지 잘 모르는 인간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이후로도 평생 동안 쇼펜하우어를 존경했다.[19]

3.5. 그 외 영향을 미친 인물


[1] 그러한 의미에서 쇼펜하우어는 이를 '마야의 베일'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마야'는 산스크리트어로 우파니샤드에서 현실세계가 기만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2] 충족이유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학자들 사이에서도 용어 사용에 통일이 되어 있지 않다. 여기서는 한국에서 쇼펜하우어 번역으로 잘 알려져 있는 홍성광의 용례를 따른다.[3] 그렇다고 이데아와 이념이 같다고는 볼 수 없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인간의 이성을 통해 수학적이고 기하학적인 완벽한 형상을 추론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반면에, 쇼펜하우어의 이념은 광기를 가진 천재적인 예술가가 직관으로써 포착할 수 있는 이상적인 형상의 '의지'를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세한 차이점은 복잡하니 원문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4] 프로이트와 라캉이 쇼펜하우어의 욕망이론에 영향을 받았다. 물론 프로이트 자신은 부정하긴 하지만 학자들에 따르면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정설이다.[5] 쇼펜하우어는 이 주체를 순수한 인식 주관이라고 말하는데, 쇼펜하우어는 모든 인식이 가상(표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면서, 예외적으로 천재는 이러한 이념을 순수하게 인식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이러한 주장은 헷갈릴 수 있는데, 쇼펜하우어는 본질인 의지는 물자체로서 우리가 인식할 수 없고, 인식 자체는 가상(표상)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념이라는 개념이 도입되는데, 인간은 의지를 인식할 수 없지만 의지와 관계맺는 이념은 아주 제한적으로 천재가 인식할 수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즉, 의지는 인식불가능하지만 의지에 관계맺는 이념은 매우 제한적으로 인식가능하다. 학자들 사이에서도 이것이 모순된 주장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고, 모순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원전을 볼 때 이 부분이 헷갈리더라도 전혀 이상한 게 아니다.[6] 쇼펜하우어의 의지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용어는 '삶에의 의지 der Wille zum Leben'다. 그가 말하는 '삶에의 의지'는 흔히 '살려는 의지 der Wille zu leben'와 혼동되고 있는데, '삶에의 의지의 부정'이 욕망을 끊는 것이라면, '살려는 의지의 부정'은 식욕과 같은 생리적 욕구를 끊는 것이다. 즉 '삶에의 의지'를 부정하면 욕망, 번뇌가 사라지므로 해탈에 이르는 반면, '살려는 의지'가 마음속에서 소멸하면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 즉 쇼펜하우어는 삶에의 의지, 즉 욕망을 부정하는 것이지, 살려는 의지, 즉 생존 의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19(전면 개정판), p.739)[7] 랄프 비너, 유쾌하고 독한 쇼펜하우어의 철학 읽기, 최흥주 역..[8] 쇼펜하우어, 도덕의 기초에 관하여, 284쪽, 브라이언 매기의 말. The Philosophy of Schopenhaur,Oxford, 1983.[9] 쇼펜하우어는 국수주의를 상당히 비난했는데 독일 민족주의와 국수주의를 선동한 피히테가 대표적이다. 독일 문학가 토마스 만은 저서 '쇼펜하우어 니체 프로이트' 에서 쇼펜하우어와 헤겔을 비교하며 아예 나치와 파시즘의 발흥에 헤겔의 국가주의가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했다. 러셀은 이런 맥락에서 당대 철학자들 중 국수주의에서 벗어난 쇼펜하우어를 언급했다.[10] 버트런드 러셀, 서양철학사, 쇼펜하우어 파트, 1946.[11] 브라이언 매기, 철학의 역사, 145쪽, 영향에 대한 설명 참조..[12] 칼 포퍼, 끝없는 탐구, 박중서 역, 20쪽.[13] 칼 포퍼, 삶은 문제 해결의 연속이다, 147쪽.[14] 브라이언 매기, 철학의 역사, 145쪽..[15] 카를 구스타프 융, 기억 꿈 사상(자서전), 조성기 역, 김영사, 133쪽~134쪽..[16] Si le grain ne meurt. Collection Folio. Paris : Gallimard, 1972..[17] Aylmer Maude, The Life of Tolstoy:First Fifty Years, 1917..[18] 다만 니체의 힘에의 의지가 쇼펜하우어의 의지로부터 비롯된 것이지만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완전히 다른 것처럼 니체는 쇼펜하우어에게 영향을 받았음에도 시간이 지날수록 쇼펜하우어에게 비판적이게 된다.[19] 브라이언 매기, 트리스탄 코드, 김병화 역, 2005, '8장 바그너, 쇼펜하우어를 발견하다' 부분 참조.[20] 안타깝게도 프랑크푸르트에 위치한 쇼펜하우어가 살았던 집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전쟁통에 폭격으로 파괴되었다.[21] 요아힘 페스트, 히틀러 평전, 137p, 1997 푸른숲[22] Rudolf Kayser, Albert Einstein: A Biographical Portrait,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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