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 멕시코 합중국 제55대 대통령 아돌포 로페스 마테오스 Adolfo López Mateos | |
<colbgcolor=#006847> 출생 | <colcolor=#000000,#e5e5e5><colbgcolor=#fff,#191919>1909년 5월 26일 |
멕시코 멕시코 주 산 프란시스코 아티자판 후아레스 에비뉴 11번지[1] | |
사망 | 1969년 9월 22일 (향년 60세) |
멕시코 멕시코시티 | |
학력 | 톨루카 과학 문학 연구소 |
재임 기간 | 제55대 대통령 |
1958년 12월 1일 ~ 1964년 11월 30일 | |
직업 | 교사, 정치인 |
종교 | 가톨릭 |
국적 | 멕시코 |
정당 | |
경력 | 노동복지부 장관 제55대 멕시코 대통령 (1958 - 19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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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멕시코의 제55대 대통령.2. 출생
공식적으로는 멕시코 주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멕시코시티로 이주하여 성장했다.3. 출생의 비밀
출생지에 대한 의혹이 있었다. 태어난 곳이 뭐가 문제인가 싶겠지만, 멕시코는 대선 출마에 속지주의 원칙을 적용하기 때문에 반드시 멕시코 영토 안에서 태어나야 한다.의혹에 따르면 사실은 과테말라의 치말테낭고 주 파티시아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실제로 상원 의원이 되기 전, 과테말라 출생 증명서 사본이 멕시코 상원과 법무장관에게 제출되었으며 증인들도 있었다.
이에 마테오스도 자신과 관련된 문서들을 제출했는데 막상 출생 증명서는 없어서 의혹이 더 증폭되었다. 그러나 상원에서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마테오스를 멕시코 출생으로 인정했다.
그리고 친아버지의 정체와 관련된 다른 논란이 있다. 공식적으로는 1915년에 마리아노 로페스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되어 있지만, 실제 마리아노 로페스는 아돌포가 태어나기 5년 전인 1904년에 폐렴으로 죽었고, 진짜 아버지는 곤살로 데 무르가(Gonzalo de Murga)라는 바스크계 스페인인이었다는 의혹이 2016년에 제기된 바 있다.
4. 생애
톨루카 연구소를 졸업하고, 그곳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중 호세 바스콘셀로스 전 교육부 장관을 만나게 된다.그리고 1929년 대선에서 바스콘셀로스를 대선 후보로 지지하였다. 그러나 바스콘셀로스가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카예스의 후광을 얻은 파스쿠알 오르티스 루비오에게 패하고, 불복하며 반란을 촉구하자, 투옥되었다가 미국으로 쫓겨났다. 마테오스도 박해를 피해 과테말라로 도피했다.
귀국 후 멕시코 국립자치대학교에서 4년간 공부하고 법학 학사를 취득하였다.멕시코 주지사 비서, 제도혁명당 대표 비서를 지내며 정계에 입문한다.
1946년, 국제사법재판소 멕시코 대표로 발령난 이시드로 파벨라의 뒤를 이어 상원의원에 당선되었다. 이후 아돌포 루이스 코르티네스 정부에서는 노동복지장관을 역임했다.
1957년 제도혁명당 후보로 결정되었고, 이듬해 당선에 성공하여 대통령이 된다.
5. 대통령 임기
마테오스의 재임 당시 멕시코는 빠른 경제 성장을 이룩하고 있었다.정책적으로 좌클릭을 하여 1959년에는 철도 노동자들의 봉급을 올려주고, 그들의 권리를 옹호하였다. 그러나 파업은 용납하지 않아서 파업이 일어나자 수천 명을 해고했다. 그 외에도 교사나 전화교환원의 노동운동을 군대로 무력진압한 적이 있다.
농업 정책에서는 무려 1600만 헥타르의 토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했다. 이는 라사로 카르데나스 이래 유례없는 규모였다. 또한 농작물 가격을 안정시키기 위한 국영 식량회사를 설립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공공사업을 추진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국가공무원 사회서비스국과 국립아동보호국을 설립했고, 1960년에는 전력 산업을 국영화했다. 또한 초등학교 교과서를 무상화하여 사실상 초등교육을 무상으로 전환했고, 차플테펙 공원에 톨텍, 올멕, 아스텍 문명 등의 유물을 모아놓은 국립인류학박물관을 세웠다.
공업 생산 역시도 증가하여 자동차, 화학, 석유과학, 기계, 제지산업 등이 눈에 뜨게 발전했다.
외교적으로는 쿠바 혁명 이후 미국이 라틴아메리카에 쿠바와 단교할 것을 요구하자, 이를 거부하고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와도 계속 외교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미국과의 관계는 계속 중시하여, 1962년 존 F. 케네디의 방문 때 리오그란데 강의 흐름 변화로 생긴 국경선 분쟁을 100년만에 해결하였다.
이듬해 1963년 라틴아메리카 비핵화 선언을 발표하여 다음 대통령인 구스타보 디아스 오르다스에 의해 틀라텔롤코 조약이 발효되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했다. 또한 미국 외의 국가를 순방한 첫 멕시코 대통령이었다.
1964년 같은 당의 구스타보 디아스 오르다스가 당선되면서 퇴임한다.
6. 퇴임 후
퇴임 후 오르다스 대통령으로부터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 위원장에 임명되었지만 1966년 건강상 이유로 사임했다. 이듬해 1967년 뇌출혈로 쓰러졌다. 그 후 기관지 절개술로 말을 하지 못하게 되고 보조기를 차는 등 몸이 망가져 갔다. 결국 2년간 뇌사 상태로 있다가 1969년 멕시코시티에서 사망했다.7. 여담
- 재임 시절 관저에 입주하지 않고, 자택에서 출퇴근했다.
- 멕시코의 경제성장 시절을 상징하는 대통령 중 한 명인데다가, 사회적으로도 많은 발전을 이루어낸 대통령이다 보니 현대에도 평가가 높은 대통령이다.
- 대한민국과 멕시코가 수교했을 당시 대통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