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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 로페스 포르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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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멕시코 합중국 제58대 대통령
호세 로페스 포르티요
José López Portillo
파일:포르티요.jpg
<colbgcolor=#006847> 본명 호세 기예르모 아벨 로페스 포르티요 이 파체코
(José Guillermo Abel López Portillo y Pacheco)
출생 <colcolor=#000000,#e5e5e5><colbgcolor=#fff,#191919>1920년 6월 16일
멕시코 멕시코시티
사망 2004년 2월 17일 (향년 83세)
멕시코 멕시코시티
학력 파일:멕시코국립자치대학교 로고 남색.png멕시코 국립자치대학교 (법학 / 학사)
재임 기간 제58대 대통령
1976년 12월 1일 ~ 1982년 11월 30일
서명
파일:호세 로페스 포르티요 서명.svg
국적 파일:멕시코 국기.svg 멕시코
정당
경력 재무 장관
제58대 멕시코 대통령 (1976 - 1982)

1. 개요2. 생애3. 대통령 당선4. 대통령 재임기5. 부패6.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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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멕시코의 제58대 대통령.

2. 생애

1920년 멕시코시티에서 태어났다. 정치인이 되기 전에는 멕시코국립자치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졸업 후 그 곳에서 교수를 역임했다.[1] 1959년 제도혁명당에 입당하여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1972년부터 1973년까지 국영 전기 회사인 CFE의 사장을 역임했고, 이후 어린 시절 소꿉친구였던 루이스 에체베리아 대통령에 의해 재무장관으로 임명되어 1975년까지 재직했다.

3. 대통령 당선

1977년 선거제 개혁 이전까지 멕시코에서 활동이 가능했던 정당은 여당인 제도혁명당과 우파 정당인 국민행동당. 공산당인 대중사회당 등 4개 정당 뿐이었다. 이 중 국민행동당만이 야당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대중사회당은 포르티요를 지지했고, 당시 국민행동당이 내분 끝에 결국 후보 선출에 실패하면서 포르티요가 단독 출마하게 되었다. 다만 선거 제도상 무투표 당선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대선 투표 자체는 진행되었다. 이는 멕시코 역사상 유일한 단독 출마 당선이다.

4. 대통령 재임기

포르티요 시대는 멕시코 석유 붐으로 대표되는 석유 산업에 대한 막대한 투자로 대표된다. 당시 멕시코는 에체베리아 정부의 경제 실패로 인해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때 국영 석유 기업인 페멕스베라크루스 주타바스코 주에 매장된 막대한 석유를 발견했고, 이를 통해 경제 발전을 이어가려 하였다. 그리하여 석유 생산량이 3배로 증가했고, 당시 멕시코는 세계 4위의 생산국으로 이름을 올렸으며 1977년부터 1981년까지 경제성장률은 연 9%대를 기록하였고, 1인당 국민소득도 1977년 1314달러에서 1981년 3812달러로 3배 가까이 늘어났다. 물론 이 시기 멕시코의 물가상승률은 연 20%대로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지만 임금상승률은 그 보다 훨씬 높았고, 고임금 일자리도 많이 창출되었기 때문에 멕시코인들은 즐거운 비명을 질렀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임기 말에 미 연준 의장 폴 볼커가 금리를 21%까지 올렸고, 이 상황에서 유가하락이 시작되자, 자본도피가 일어나면서 심각한 재정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급기야 페소 가치를 개처럼 지키겠다고 선언하기도 했지만 별다른 진전은 없었고, 퇴임 후에는 그가 가지고 있던 호화 저택 5채가 도그 힐(Dog Hill)로 불리며 조롱당했다. 그리고 이 개처럼 발언은 포르티요가 사망한지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포르티요 하면 회자되는 발언이다.

결국 포르티요를 이은 미겔 데 라 마드리드카를로스 살리나스는 재정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경제 정책에서 우클릭하여 신자유주의 정책을 실시하게 되었고, 이는 제도혁명당에서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를 비롯한 좌파 성향의 당원들이 탈당하는 원인이 된다.

1977년 선거 개혁을 실시하였다. 하원의원 수를 지역구 300명, 비례대표 100명으로 총 400명으로 선출하도록 바뀌었으며, 정당 등록 조건을 완화해 새 정당들이 창당되는걸 도왔다. 그 결과 여전히 제도혁명당의 압도적인 1당 우위제였기는 했으나 1979년 총선에서 야당의원들의 비율이 멕시코 하원의 1/4을 차지하는 수준으로 어느정도 늘어나게 된다. 그 외에도 전임자들의 더러운 전쟁 당시 정치적 억압을 완화했으며, 게릴라들을 사면했다.

외교적으로는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사망한 후 스페인과의 외교 관계를 재개하였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처음으로 멕시코에 방문하기도 했었다. 1981년에는 칸쿤에서 최초이자 유일한 남북반구 정상회의가 열렸다.

5. 부패

미극의 칼럼니스트 잭 앤더슨은 정보 소식통을 인용하여 포르티요가 6년의 재임 기간 동안 국고에서 10억 달러 이상을 횡령했다고 주장했다. 안 그래도 상당히 호화스러운 삶을 살고 있던 포르티요여서 그러한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된다. 또한 자신의 친인척들에게 공직을 뿌려댔다. 대표적으로 자신의 아들인 호세 라몬에게 관광부 장관 자리를 주었다. 이러한 친족주의 인사는 안 그래도 악화되던 민심에 기름을 뿌렸다.

결국 차기 정부인 마드리드 정부는 대대적인 반부패 정책을 발표했으며 포르티요 전 대통령을 기소하는 것도 고려했다. 그러나 결국 포르티요에게 가장 협력한 호르헤 디아스 세라뇨 전 페멕스 사장과 아르투로 "엘 네그로" 듀라조 전 멕시코시티 경찰서장을 감옥에 보내는 선에서 끝냈다.

6. 사망

포르티요는 1990년대 초 뇌졸중으로 부분적으로 마비된 이후 10년 동안 건강이 좋지 않았다. 2001년 그는 관상동맥우회술을 받았고 사망 당시에는 폐렴으로 치료를 받고 있었다.

[1] 이때 가르친 사람 중에 한 명이 뒷날 후임자가 되는 미겔 데 라 마드리드이다. 그러니까 데 라 마드리드의 은사인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