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 멕시코 합중국 제59대 대통령 미겔 데라마드리드 우르타도[1] Miguel de la Madrid Hurtado | |
<colbgcolor=#006847> 출생 | <colcolor=#000000,#e5e5e5><colbgcolor=#fff,#191919>1934년 12월 12일 |
멕시코 콜리마 주 콜리마 | |
사망 | 2012년 4월 1일 (향년 77세) |
멕시코 멕시코시티 스페인 병원 | |
학력 | 멕시코 국립자치대학교(법학 / 학사) 하버드 대학교 정책·행정대학원(행정학 / 석사) |
재임 기간 | 제59대 대통령 |
1982년 12월 1일 ~ 1988년 11월 30일 | |
직업 | 정치인 |
종교 | 가톨릭 |
국적 | 멕시코 |
정당 | |
경력 | 예산계획부 장관 제59대 멕시코 대통령 (1982 - 19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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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멕시코의 제59대 대통령.2. 생애
1934년 멕시코의 콜리마 주에서 태어났다. 변호사였던 아버지는 아들이 두 살일 때 암살당했고, 할아버지는 과거 콜리마의 주지사를 지낸 인물이었다.1970년부터 72년까지 멕시코 국영 석유 회사인 페멕스에서 일했고, 루이스 에체베리아 정부에서 여러 관직을 맡았다. 1979년에는 호세 로페스 포르티요 정부에서 예산계획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1982년 제도혁명당의 대선 후보로 지명되었다. 1982년 대선을 앞두고 경제위기가 터졌지만, 마드리드가 포르티요와 거리를 둔데다가 타 야당 후보가 딱히 변변치 않았기 때문에 74.3%로 여전히 압승을 거두었다.
3. 대통령 재임기
마드리드가 대통령에 취임할 당시의 멕시코는 1976년의 금융위기를 상쇄하기 위해 석유 산업을 육성시켰을 때였다. 그러나 포르티요 정부는 석유 가격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 믿고 재정 낭비를 했다가 결국 석유값이 폭락하면서 사상 최악의 인플레이션에 직면하게 되었다.결국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마드리드 정부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시행하였다. 1155개의 국영기업 중 750개를 민간에 매각하는 등 멕시코 경제를 글로벌한 자유시장경제 체제로 변화시켰다. 그러나 미국에 과도하게 의존하게 되고 근로자들의 실질 소득이 감소하는 등의 부작용도 속출했다. 또한 재정긴축 정책은 유가하락 기조가 유지되는 바람에 물가상승을 제어하지 못했으며, 외채는 여전히 폭발적으로 증가했던것은 매한가지였다. 또한 신자유주의 정책에 반발한 제도혁명당 내의 좌파 성향 당원들이 탈당해 민주혁명당으로 분당되었다.[2]
1985년 9월에는 수도인 멕시코시티를 직격한 진도 8.0의 대지진이 일어났다. 멕시코시티는 누에바에스파냐 시절 테노치티틀란을 감싸던 텍스코코 호수를 매립하여 만든 도시여서 지반이 약했고 고도성장기 시절 부실공사로 지은 건물들이 많았다. 이런 이유로 약 9,500명이 사망하고 3만여명이 다치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그러나 당시 멕시코 정부의 미적지근한 대응[3]은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양극화가 심화되었던 상황과 맞물려 많은 분노를 일으켰고, 이로 인해 제도혁명당에 대한 지지율이 급감하게 되었다.
1983년 지방선거때부터 국민행동당과 대중사회당, 멕시코 통합사회당 등 야당진영이 선전하는 일이 잇따라 일어나기 시작했고, 1986년에 일어난 치와와 주지사 선거에서의 부정선거 파문에 대응하기 위해 마드리드 정부는 여러가지 선거 개혁을 실시했다. 먼저 비례대표 하원의원의 수를 100명에서 200명으로 늘렸다. 또한 상원은 각 주와 멕시코시티에서 각각 2명씩 선출하고 3년마다 선거를 치르게 했다. 또한 주마다 지방법원이 설립되었다.
멕시코시티 대지진으로 성난 민심은 그대로 대선에서까지 이어졌고, 1988년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 라사로 카르데나스 전 대통령의 아들인 콰우테목 카르데나스에게 정권을 내줄 위기에 처한다.
실제로 개표 중반까지 콰우테목 후보가 우세했지만 최종 개표 결과 여당의 카를로스 살리나스 데 고르타리 후보가 당선되었다. 제도혁명당에서 의도적으로 개표소를 정전시킨 후에 투표함 바꿔치기를 통해서 자당 후보를 50%를 겨우 넘는 득표율로 부정선거로 당선시킨 것이다. 훗날 마드리드는 자서전에서 이 선거가 부정선거였음을 시인하고 당시에 사용되었던 투표용지는 1991년에 전부 소각했다고 밝혔다.[4][5]
4. 퇴임 후
결국 2000년 대선에서 결국 야당에 정권이 넘어갔을 때도 데 라 마드리드는 자신이 멕시코 민주화에 어느 정도 기여한 바가 있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면서 "때가 되어 멕시코 사회가 성숙하면 결국 야당이 정부를 장악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하여 제도혁명당의 각료들을 당황시키기도 했다.말년에는 국영출판사 대표직을 맡으면서 비교적 조용히 지냈다. 그러다가 2009년에는 자기가 부정선거까지 저질러서 당선시킨 살리나스가 정부 비자금을 횡령하고 그의 동생인 라울 살리나스가 마약 거래자나 정부 관련 계약을 독점하고, 부정축재를 하는 것을 눈감아 주고 있다고 비난하고, 살리나스를 후계자로 지명한 것을 후회한다고 말하여 파문을 일으켰다.
그래놓고 2시간 뒤에는 라디오 인터뷰를 자청해 건강 악화로 인한 심신 허약과 착란 상태에서 말한 것이라며 비난 내용을 철회했다.
5. 사망
급성 신부전과 만성 폐쇄성 폐질환으로 장기간 입원 생활을 하다가 2012년 4월 1일에 향년 77세로 별세했다. 당시 펠리페 칼데론 대통령은 "나라를 위해 가장 크게 헌신한 위대한 멕시코 대통령이었다"고 애도를 표했다.6. 여담
-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당시 대통령이다. 당시 우승국은 아르헨티나로, 2022년 카타르 월드컵 이전까지 시상식에서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이 우승컵을 받는 것을 지켜본 마지막 개최국 국가원수였다.
마라도나와 데 라 마드리드[6] |
- 미겔 데 라 미드리드의 아들 엔리케 데 라 마드리드 역시 제도혁명당 소속 정치인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엔리케 페냐 니에토 정부에서 관광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2024년 멕시코 대통령 선거에 제도혁명당 소속으로 출마할 대권주자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상 로망스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2] 마드리드 시절에 탈당해 민주혁명당에 합류한 사람 중 한 명이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현 대통령이다.[3] 마드리드는 민족주의적 편견 때문에 국제사회의 구조 활동까지 거절했다.[4] 만일 이 선거에서 콰우테목이 당선되었다면 제도혁명당에게는 상당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한국에 대입하면 박정희의 자녀가 민주당 후보로 나와 보수정당 후보를 꺾고 대통령이 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PRD의 전신이 PRI의 진보 계파인데데다 PRI의 우경화에 반발하여 PRD가 만들어졌을 만큼 1:1로 대입할 수는 없다.[5] 이후 콰우테목 카르데나스는 1997년 멕시코시티 시장이 선출직으로 바뀌자 출마해 당선되었다. 대선에도 그 후 두 번씩 출마했지만 결국 당선되지 못했다. 대신 정치적 제자인 오브라도르가 2018년에 당선, 이후 2024년 대선 때 AMLO의 정치적 동지인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파르도가 당선되었다.[6] 데 라 마드리드 옆은 헬무트 콜 당시 서독 총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