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 - 싱가포르 - 브루나이의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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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주 Negeri Singapura | State of Singapore 新加坡州 | சிங்கப்பூர் மாநிலம் | |
주기 | |
Majulah Singapura 전진하는 싱가포르 | |
정보 | |
주가 | 전진하는 싱가포르 (말레이어: Majulah Singapura) |
면적 | 670 km²[1] |
인구 | 1,841,600명(1964년) |
민족 구성 | 중국인, 말레이인, 인도인, 유럽인 등 |
수도 | 싱가포르 |
국가 원수 | 유솝 빈 이샥 (Yusof Ishak, يوسف بن إسحاق) |
총리 | 리콴유 (Lee Kuan Yew, 李光耀) |
공용어 | 영어 |
국어 | 말레이어 |
종교 | 기독교, 불교, 도교, 이슬람교 등 |
화폐단위 | 말레이시아 링깃(RM) |
존속 기간 | 1963년 9월 16일 ~ 1965년 8월 9일[2] |
독립 이전 | 영국령 싱가포르 |
탈퇴 이후 | 싱가포르 공화국 |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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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63년 통일 말레이시아 연방에 편입되어 1965년 반강제 독립[3] 이전까지 존재했던 말레이시아의 일개 주(州)이던 시절의 싱가포르다.1963년에 리콴유와 유수프 빈 이삭이 지도자인 싱가포르는 말라야 연방에 가입을 하였고 연방의 가맹국으로서 연방에 가입한 다른 구 해협식민지들인 페낭, 이포, 말라카와 마찬가지로 즉시 말레이시아의 일개 주로 승격되었다.
싱가포르는 과거 해협식민지의 일부였던 페낭주나 말라카 주 등처럼 사실상 하나의 도시가 주 전체를 아우르는 작은 주였고 영국 식민지가 되면서 쿨리로 청나라 남방에서 들어온 화교 화교 인구가 매우 많았다. 거기에 타밀인들도 소수치고는 꽤 많은 5%나 섞여있어서 이에 따라 독립 후 화교들을 식민 잔재라 여겼던 말레이인들과 화교+타밀인들 간 갈등이 발생했다.
결국 1964년 7~8월에 걸쳐 말레이인과 화교가 함께 많이 사는 지역인 칼랑(Kallang)/겔랑(Geylang) 등 동부 지역에서 폭력 사태가 발생했다.
말레이시아의 다른 주들은 싱가포르가 화교가 다수인 주라는 걸 안 좋게 보고 언젠가는 싱가포르의 화교들을 추방하거나 싱가포르 주를 말레이시아에서 축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싱가포르에서도 말레이시아에 가입하면서 생길 인종갈등, 자유항으로서의 지위 박탈, 그리고 싱가포르와 중앙 연방정부와의 경제적/정치적 갈등을 우려하였다.[4]
철저한 말레이시아의 애국자였던 리콴유는 도시국가는 나라 구실을 못 하는 만큼 당연히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에 잔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결국 말레이시아 본토와 싱가포르 주 간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이 시점에서 싱가포르가 더 이상 말레이시아에 잔류할 수 없었다.
특히 잘못하다 싱가포르를 찍어 누르기라도 하면 페낭과 이포, 말라카 등 타 해협식민지 형제들이 반발로 독립을 시도할 수 있었으며 브루나이도 말레이시아 가입을 희망해 더욱 일이 꼬여버렸다. 페낭 및 이포는 화교 비율이 싱가포르보다도 높은지라 연쇄반응이 충분히 우려될 상황이었다.[5]
그리고 1965년 8월 9일 말레이시아는 화교들이 힘을 잡아[6] 말레이시아를 장악하는 것을 우려했으며 결국 리콴유는 더이상 말레이시아 잔류가 불가능함을 알고 홀로서기를 준비한 끝에 싱가포르 독립을 선언했으며 본국에서는 싱가포르 주를 말레이시아에서 축출한다.
이에 따라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에서 독립해 싱가포르 공화국으로 출범하여 아시아 유일의 도시국가가 되었다.
독립국가 싱가포르는 부미푸트라 정책에 의해 억압당하던 수많은 중국계 말레이시아인들과 역시 미움받던 인도네시아 곳곳의 중국계 인도네시아인들의 싱가포르 이주 장려 정책[7]으로 싱가포르의 인구를 불린다.[8]
[1] 1964년 기준[2] 강제 독립[3] 일방적인 축출은 아니고 말레이시아 측에서 싱가포르 축출을 논의하려 하자 리콴유와 유수프 빈 이삭이 알아서 독립을 염두에 두고 선수를 쳤으며 축출 형식으로 독립을 승인받았다. 쫓겨나기 전 알아서 나간 것이다.[4] 그리고 이러한 우려는 추후 현실화되었다.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 가입 당시 조인한 조약에서는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의 단일 시장에 편입되는 조건으로 세수의 40%를 말레이시아 중앙정부로 납부하고 동부의 낙후된 사바와 사라왁 주들에 대부분 무이자로 대출을 주는 것으로 합의하였으나 1965년 7월 말레이시아 경제부 장관이 싱가포르가 중앙정부에 납부하는 세수를 60%로 늘릴 것을 요구하였다[5] 사실 페낭에서 원래 독립 여론이 강했다. 그러나 싱가포르를 떼어낸 후 더이상의 분리독립을 불허하면서 페낭은 결국 독립하지 못했다.[6] 당시에도 그렇지만 지금도 말레이시아 전역에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인구는 상당하며 이들은 말레이시아 경제를 사실상 좌지우지하고 있다.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은 말레이시아 곳곳에 흩어져 산다. 어떻게 보면 마냥 제노포비아에 의거한 선동은 아닌 것인게 말레이인들의 경제력이 너무나 낮기 때문이다.[7] 특히 말레이시아에서 말레이인 우대정책 부미푸트라 정책 시행된 탓에 유독 말레이시아 곳곳의 중국계 말레이시아인들이 싱가포르로 이주했다. 이들을 따라 인도계 말레이시아인들과 이슬람화로 박해가 시작된 구 해협식민지 내 영국계 유대인들도 대거 싱가포르로 남하했다.[8] 1975년 베트남 전쟁의 종전 이후 부터 1991년 중월전쟁의 잔여 국지전 종전 이전까지 수많은 중국계 베트남인과 원주민인 킨족 출신 베트남인 난민들의 유입 역시 싱가포르의 인구를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