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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7 01:19:21

신태윤

1. 곡성군 출신 독립운동가, 신태윤2. 강화군 출신 독립운동가, 신태윤

1. 곡성군 출신 독립운동가, 신태윤

파일:신태윤.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백당(白堂)
본관 평산 신씨[1]
출생 1884년 6월 15일
전라도 창평현 서면 주산리
(현 전라남도 담양군 고서면 주산리)
사망 1961년 8월 27일[2]
전라남도 곡성군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1040호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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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태윤은 1884년 6월 15일 전라도 창평현 서면 주산리(현 전라남도 담양군 고서면 주산리)에서 의관(議官) 신석용(申錫龍)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신숭겸의 31세손으로, 어렸을 때 한학을 배우다가 1904년 창흥의숙(昌興義塾, 현 창평초등학교)에 입학하여 1년간 신식교육을 받은 뒤 광주농업학교로 진학했다. 1906년 졸업한 그는 서울로 상경하여 관립한성사범학교에 입학했고, 1908년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1909년 곡성보통학교의 훈도로 취임했다. 한편, 그는 나철과 교유하면서 대종교 신자가 되었다.

1914년, 신태윤은 곡성군 곡성면 학정리 삼인동에 선조의 사당을 짓는다는 명목을 내세우며 비밀리에 단군전을 건립했다. 그는 단군의 위패를 모셨고, 개천절과 어천절(음력 3월 15일)에 제향을 지냈다. 그러면서 곡성군의 청년들을 끌어모았으며, 훈도들의 복장인 금테모자에 칼을 차는 일본식 복장을 하지 않고, 우리 고유의 한복인 행전 매고 짚신을 신고 다녀 일본인의 미움과 감시를 받아왔다.

1919년 3월 중순, 신태윤은 곡성군에서 3.1 운동이 전개되지 않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곡성보통학교 숙직실 뒤의 냇물에서 물고기를 잡아다가 끓여먹고 있던 정래성(丁來聖)·김중호(金仲浩)·양성만(梁成滿)·박수창·김기섭(金基燮)·김태수(金泰洙) 등 청소년을 불러놓고,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독립만세운동을 전해주고, 곡성에서도 빨리 만세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들 청년들이 이에 찬성하자, 3월 26일 정래성의 집에 모이도록 하여 시위운동에 필요한 태극기와 격문(檄文)을 작성케 하는 등, 사전준비를 갖추게 하였으며, 곡성 장날인 3월 29일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거사하기로 결정하는 한편,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우리의 역사를 먼저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김중호에게 『조선역사』 서적을 주고 거사 당일의 성공을 위하여 동료 훈도 및 마을 유지들에게 독립만세시위에 동참할 것을 역설하였다.

예정일인 3월 29일 보통학교 3·4년생과 동리 청년들 수십명이 장터에 모이자 그는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장터안을 시위행진하다가 일제 관헌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후 1919년 8월 18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2년형이 확정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때 그의 가산은 전부 몰수되었다.

출옥 후 곡성군을 떠난 신태윤은 1923년 서울로 이주하여 장훈학교(長薰學校)에서 봉직하면서 배달 겨례의 역사를 다룬 <정사(正史)>를 편찬했으나 총독부에 의해 판매금지 조치를 받았다. 1925년에는 대종교의 교리를 다룬 <삼일신고강의(三一神詁講義)>를 발간했으며,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동으로 내려가 초산학교(草山學校)에서 자제들을 가르치는 한편 그곳에서도 단군전을 비밀리에 세워 제향을 계속했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가 심하자 전라남도 장성군 북일면으로 이거하여 신흥리에 신흥학교(新興學校)를 세웠고, 1926년 서울에서 6.10 만세 운동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장성군에서도 독립만세시위를 벌이려 했지만 거사가 발각되어 미수에 그쳤다. 이로 인해 장성군에서도 활동이 여의치 않게 되자 인근의 순창군 복흥면 상리로 옮겨 칩거했다. 1928년에는 담양 남면의 지곡학교(芝谷學校)에 근무하면서 지곡리 만수동에 단군전을 설치했다.

1929년 곡성군으로 귀환한 신태윤은 옛 동지들을 규합하여 삼인동 소재의 단군전을 곡성면 학정리 봉황대(鳳凰臺)에 이건하여 중창하고 야음을 틈타 개천절과 어천절에 제향을 지냈다. 또한 이전에 출간하려 했다가 실패했던 <정사>를 1935년에 자비로 출간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은밀히 교류하려 했으나 일제의 감시가 심해 여의치 않았다. 이후 창씨개명신사참배를 강요받았지만 거부하고 세상과 인연을 끊고 은거했다.

1945년 8.15 광복 후, 신태윤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곡성군 건국준비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단군전봉양회(檀君殿奉護會)와 단군성조보본회(檀君聖祖報本會)를 조직하여 전 곡성군민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1946년 내내 전라북도 여러 지방을 순회하면서 국사를 강의하였으며, 1947년 광주사범학교의 교유(敎諭)를 맡고 자신이 집필한 역사서 <정사>를 교과서로 사용했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1949년 무등산 자락에 조선대학교가 설립되자 사학과 교수에 취임하여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무소속으로 전라남도 곡성군 선거구에 출마하였다가 후보직을 사퇴했다. 그 뒤 6.25 전쟁 시기 불타버린 봉황대 단군전을 곡성군민의 협찬을 받아 중창했으며, <대한사략(大韓史略)>을 편찬했다. 1960년 4.19 혁명 때 조선대학교 사학과 학생들이 학생운동에 힘쓰는 걸 독려했으나 5.16 군사정변 이후 사학과가 폐과 조치되자 교수직에서 물러났고, 1961년 8월 27일 곡성군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신태윤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2년 11월 1일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안장했다.

2. 강화군 출신 독립운동가, 신태윤

성명 신태윤(申泰允)
생몰 1884년 11월 13일 ~ 1932년 11월 5일
출생지 경기도 강화군 길상면 길직리
사망지 경기도 강화군
추서 대통령표창

신태윤은 1884년 11월 13일 경기도 강화군 길상면 길직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18일 강화군 읍내 장터에서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했다가 체포된 뒤 공소 불수리 처분을 받았다. 이후 조용히 지내다 1932년 11월 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9년 신태윤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1] 사간공파.[2] 대전현충원묘적부에는 1962년 3월 30일 별세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