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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8 22:37:40

신경현/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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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마추어 시절2. 프로 시절
2.1. 2009년2.2. 2010년2.3. 2011년2.4. 2012년2.5. 2013년

1. 아마추어 시절

군산시 출신으로 군산상고동국대를 졸업하고 1998년 한화에 2차 1순위 지명된다.

군산상고 시절에는 탁월한 신체조건과 공격과 수비 모두 뛰어난 천재형 포수로 평가받으면서 '군산야구천재'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래서 고교 졸업 당시 쌍방울은 그를 입단시키려고 노력했지만 대학행을 막지는 못했다. 부질없는 가정이지만 신경현이 이 때 바로 프로에 왔다면 오늘날의 박경완은 없었을 지도 모른다. 대학시절에도 대학 최고의 포수 중 한명으로 자리잡으면서 만능포수라는 평가를 받았고, 96년 회장기 전국대학야구 춘계리그에서 동국대를 우승으로 이끌면서 대학 최우수 포수상을 받았다. 국가대표선수로도 뛰면서 그 성적을 입증했다.

2. 프로 시절

한화에 2차 1번으로 지명, 큰 기대를 받으면서 1998년 프로에 입단한다. 현대 유니콘스의 등장 이후 계약금이 급격하게 올라갔던 시대였음을 감안하더라도 포수 유망주가 2억 6천의 계약금을 받은 것으로 그 기대치를 알 수 있다. 심지어 한화 이글스가 신경현을 지명하기 위해 고의패배를 했다는 소문까지 돌 정도였다.

이러한 큰 기대를 받고 입단한 신경현이었지만 프로의 벽은 높았고 강병철 감독은 신경현의 몸 상태를 탐탁지 않아했기에 2주 내에 10kg를 감량하라는 명령을 했다. 실패시 벌금 200만원을 내는 조건을 붙였는데 연봉이 고작 2,000만원일때라 필사적으로 감량하다가 그만 허리에 부상을 입고 만다.[1]부상으로 기대만큼의 활약을 보이지 못한데다 선배 조경택을 밀어내지 못한 그는 2001시즌 종료 후 상무에 입대한다.

상무 야구단에서 실력을 갈고닦은 그는 곧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 제대하자마자 한화의 주전 포수자리를 차지했다. 밀어치기 위주의 타법으로 안정적인 타율을 기록하면서 수비력에서도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이도형심광호와의 주전경쟁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하였다.[2]

2006년 팔꿈치 부상을 입는 시련을 겪기도 했으나[3] 결국 주전 자리를 지켜내 한화 포수들 중 최초로 연봉 1억을 넘기기도 했으며[4], 2007년에는 4할의 도루저지율을 기록하기도 했었으며 2008년 올림픽 브레이크 이전까지 팀의 호성적과 함께 부동의 안방마님으로 자리를 굳히고 있었다.

그러나 20대부터 각종 부상에 시달리다보니 성장이 정체되어 기대치만큼의 성장을 이루진 못했으며 나이가 30이 넘어가면서 부상이 만성화되자 조금씩 기량이 떨어지며 수비가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2.1. 2009년

2009년은 정민철, 송진우, 문동환 등의 투수진의 주전 멤버들이 전부 빠져나가고 유원상, 김혁민, 안영명 등이 그 자리를 대신하기 시작한 해였다.

급격한 세대교체로 인해 지금까지 고참 투수들과 배터리를 짰을 때는 안 나타나던 문제가 연이어 터지기 시작했고, 나날이 얻어터지는 젊은 투수들의 문제까지 겹쳐 포수로서의 자질을 의심받아 한화이상군 1군 투수코치와 신경현만 방출하면 우승한다는 말이 돌을 정도로 많은 비난을 받았다. 이 당시에 주로 욕먹던 것들은 '스트라이크도 볼로 만드는 궁극의 역미트질'과 고의사구를 연상케 하는 빠져서 볼 받기, 제구력 안 좋은거 아는 신인선수들에게 바깥쪽 핀포인트 요구하기 등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한화 이글스의 주전 포수였고, 대체로 거론되던 박노민과 이희근은 어디까지나 백업이었다. 특히 류현진과의 궁합이 팀내 포수들 중 최고라고 평가받으면서 류현진 등판일에는 거의 어김없이 배터리로 뛰었고, 류현진도 항상 신경현 볼배합대로 던진다고 이야기하면서 그를 높게 평가했다. 동료 투수뿐만 아니라 현장 지도자 및 야구해설자들에게 신경현의 편안한 리드는 항상 칭찬의 대상이었다. 다만 이순철은 깠다. 근데 순페이는 안 까는 사람이 없잖아

세월이 흐른 시점인 현재에 당시를 돌이켜보면 사실 팀에 총체적인 문제가 터지기 시작한것이었지만 당시에는 신경현이 대표로 비난을 받으면서 대체자로 백업출장을 하던 박노민이희근이 주로 거론됐다. 이 때문에 가끔 "신경현은 무난한 포수인데 투수들이 못 따라가는거다"와 "류현진이 그냥 대단한거다"라는 토론이 생기기도 했다. 그러나 전자의 의견은 대체로 소수파였다.

2.2. 2010년

2010년에도 시즌 초에는 삽을 너무 푸고 수비에서 여러가지로 답답한 모습을 보이면서 욕을 먹으면서 시작했으나, 시즌이 진행되면서 감을 잡기 시작하더니 도루저지율에서도 박경완에 이어서 2위를 랭크, 안경을 쓰고 경기에 뛰기 시작하더니 놀랍게도 커리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시즌 두자릿수 홈런을 기록했다. 게다가 홈런을 기록한 주요 경기들이 류현진 선발 경기들이었던지라 기억에 강렬하게 남았고, 타율이 조금 낮고 팀의 성적이 꼴지라는 치명적인 문제를 제외하면 공격부문에선 신경현 최고의 시즌이었다.

LG전에 유독 잘 쳤다. LG전 타율 0.361에 4홈런 9타점을 기록했다. 5월 13일 청주에서는 LG를 상대로 연타석 투런 홈런을 기록하면서 한화의 시즌 첫 스윕을 이끌었고, 6월 9일 잠실에서 LG 마무리 오카모토를 상대로 역전 투런홈런을 뽑아내기도 했다.

여담으로 이 해 같은 포수 포지션의 조인성도 안경을 쓰고 커리어 하이를 기록, 두 안경쓴 포수가 동시에 커리어하이를 찍으면서 H2노다 아츠시가 한 대사[5]가 명장면으로 인터넷에서 유행하는데 일조했다.

2.3. 2011년

전년도 커리어하이를 찍은 반동인지 1할의 타율과 1할의 도루저지율이라는 부진한 성적으로 시즌을 시작, 결국 자진해서 2군을 갔다가 5월 말에 1군에 복귀하나 제 역할을 못해줬으며, 류현진을 제외한 투수와 배터리를 맞췄을 때는 제 몫을 해주지 못했다. 전반기 당시 부상이 악화된건지 경기를 뛰면서 상당히 몸을 사리면서(혹은 제대로 몸을 쓰지 못하면서) 경기를 뛰었는데, 대표적인 경기로 7월 3일 홈송구를 놓친 경기와 7월 19일, KIA전에서 홈송구를 놓친 경기 등이 있었다. 병살타를 치고도 1루까지 최선을 다해 뛰지 않는 산책주루에 투수의 패스트볼이나 바운드 볼시 몸을 던져 잡으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플레이 등을 보여줬다. 추가로 고질병으로 언급되던 역미트질도 여전했다.

전년도에 10홈런을 쳤던 타격도 하락세를 보여서 2할 초반에서 타율이 올라갈 기미가 없었으며 장타도 없었다.

올스타 브레이크 이후에는 컨디션을 회복하고 다시 주전으로 출장하기 시작, 최종적으로 후반기 타율 3할을 넘겼으며 도루저지율 3할 5푼대를 기록하며 준수한 성적을 보여주었다. 2011시즌 한화 이글스의 후반기에서 이대수와 함께 방심할 수 없는 하위타선을 만들었다.

8월 20일경 두산전에서 더블스틸을 허용하면서 다시 까이기도 했으나 9월 3일 넥센전에서 손승락에게 동점타를 쳐낸뒤 다음날 4일 넥센 선발 브랜든 나이트에게 만루 홈런을 쳐내고 도루저지도 하면서 아직 팀에 기여하기도 했다. 부상으로 한동안 빠져있던 류현진이 오랜만에 선발로 나온 경기(9월 8일)에서 류현진에게 선발승을 안겨주는 결승타를 쳐내기도 했다.

시즌이 끝나고 정리해보면 평균치로 보면 성적이 크게 하락했으며, 컨디션에 따라 성적이 크게 왔다갔다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분명하게 노쇠화가 왔으며 본래 규정타석을 못 채우던 선수였긴 했으나 이젠 규정타석이 아니라 출전하는 게임 숫자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후반기에는 분명하게 주전에 걸맞은 성적을 내면서 아직은 죽지 않았음을 보여줬기도 했지만, 이게 야구선수로서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이 해에 유독 오른쪽 무릎에 파울 타구를 많이 맞았는데, 파울 타구에 맞고 교체된 바로 다음날 경기에서 포수요원 부족으로 무리하게 연장전에 출장하자마자 또 맞거나, 하루에 4차례 맞거나. 덩치가 커서 그런건지... 몸에 공 끌어들이는 자석을 달아놨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왔다.

2011 시즌 종료 후 FA 자격을 획득, FA선언 의사를 밝혔고,# 11월 16일, 2011년도 FA자격자 중 처음으로 2년에 옵션포함 7억으로 계약을 맺었다.

2.4. 2012년

한상훈이 주장을 맡음으로써 3년간 맡아온 주장 자리를 내놓게 됐다. 그리고 주장자리와 함께 프로 커리어의 사실상 마지막 해를 지내게 된다.

정범모에게 주전자리를 완전히 뺏기고 백업으로 밀려났으며, 백업에서도 제 역할을 못 해줬다.

73경기 출장하여 타-출-장 0.181-0.253-0.181라는 타율과 장타율이 똑같은 비율스탯을 기록. OPS는 0.434에 불과해 김태균의 출루율 보다도 낮은 수치를 기록했으며 홈런, 2루타, 3루타가 모두 0개로 장타도 없어졌다. 전부터 노쇠화가 심해지던 수비도 극악으로 안좋아져 도루저지율은 0.270으로 하위권에 그쳤으며 블로킹, 포구 등에서도 더 이상 주전으로 뛸 수 없는 상태임을 보여줬다.

2.5. 2013년

시즌 시작 이후 다채로운 신인 포수들의 등장과 함께 잊혀졌고, 시즌 도중 2군에서조차 출장기록이 없다는 것을 팬들이 발견해 의구심을 자아냈다. 얼마 뒤 구단 측에서 신경현을 공익근무중인 선수들에 대한 전담 코치로 선임했다고 밝혔다.#. 사실상 선수로서는 은퇴로 보여지며, 코치로서의 첫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FA 연봉을 그대로 수령하는 꽤나 비싼 코치다. 포스트 신경현의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의 갑작스런 퇴장을 아쉬워하는 팬들이 꽤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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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2013년 8월 29일 은퇴를 결정했으며, 9월 14일 삼성과의 홈경기를 통해 16년 현역 선수생활을 마감하는 은퇴식을 가졌다. 선발투수 데니 바티스타가 1회에만 2실점하며 불안하게 출발했으나 타선이 끈기있게 따라붙어 4:3으로 역전승을 만들어내는데 성공, 팀 선배의 은퇴를 빛내주었다. 본인은 은퇴 후 지도자를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9월 25일에는 엠스플의 류현진의 선발등판 경기 리뷰에 등장하였다.

10월 7일 류현진의 첫 포스트시즌 선발경기에 SPOTV에서 해설로 데뷔했다. 해설 신인이라 약간 버벅거리기는 하지만 의외로 말솜씨가 좋은 편이며 해설에 있어서도 투수의 볼배합을 읽어주는듯 상당히 좋은 해설을 하였다. 10월 15일 류현진의 NLCS 경기에 앞서서도 류현진은 같은 실수를 두 번 연속 반복할 선수가 아니라고 말했고, 정말로 류현진은 그 모습을 보여줬다.

11월 13일에는 류현진과 인연으로 인해 이병규, 김현수 등과 함께 같이 런닝맨에 출연했다고 한다. 방송은 11월 24일에 나왔으며, 류현진과 같이 팀을 짜고 초능력 야구를 하였다. 출연 야구선수 게스트들 중 가장 예능감을 폭발시키며 일명 인생경기를 했다는 드립들이 나왔다.

후반기 들어 류현진 관련 경기에 리뷰/해설로 등장하고 류현진과의 인연으로 예능 프로그램에도 출연했기 때문에 은퇴 후에도 류현진에게 업혀가는 느낌을 준다는 평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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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부상은 이후 커리어 끝까지 그의 발목을 잡는 요소 중 하나가 된다.[2] 이도형은 부상으로 인해 포수를 거의 포기하고 지명타자로 나오게 된다.[3] 대신 백업인 심광호의 출전 비율이 높아지게 되었다.[4] 사실 신경현 이전 포수들의 역량을 감안하면 1억 이상을 받을 수준의 포수가 없었다. 이글스 사상 가장 뛰어난 성적을 올린 유승안이 주전으로 뛰던 시절은 선수들 연봉대가 낮아서 논외.[5] 안경 쓴 포수는 조심해야 한다구. 저 말을 한 본인도 안경 쓴 포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