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6-26 01:59:52

승정원

승지에서 넘어옴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삼사 의정부 국왕 직속

삼군부 오위 비변사 오군영 속오군
<rowcolor=#f0ad73> 고려 중앙정치기구 · 대한제국 중앙정치기구
}}}}}}}}} ||
<colbgcolor=#c00d45,#94153e><colcolor=#f0ad73> {{{+1 승정원}}}
承政院 | Royal Secretariat[1]
파일:승정원.png동궐도에 묘사된 승정원 청사 '은대'
설립 1400년(정종 2)
폐지 1894년(고종 31)
국가 조선
소재지 한성부 창덕궁 궐내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와룡동))
주요 업무 왕명 출납·국왕 비서 사무
국가안전보장에 관한 정보 관리
설립 이전 중추원
폐지 이후 승선원(承宣院,1894)
궁내부 시종원(侍從院,1895)

1. 개요2. 역사3. 승정원의 별칭들4. 조직과 업무5. 관련 기록물
5.1. 은대조례5.2. 승정원일기
6. 승지 진급 사례

[clearfix]

1. 개요

승정원()은 조선 시대 왕명의 출납을 맡았던 임금 직속의 비서기관으로, 오늘날 대통령비서실에 해당한다. 조보의 발행처이기도 했으니 행정안전부의 기능도 일부 수행했다.

2. 역사

한국사에서 국왕의 독자적인 비서기구는 신라의 집사부에서 출발하여 고려 중기부터 체계화되기 시작했다. 고려 성종 때는 중국 송나라의 추밀원과 은대사를 모방해 중추원과 은대, 남북원을 두어 군사 기밀과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도록 했다. 현종 때는 세 기관을 대신해 중대성을 두었는데, 이후 중대성을 혁파하고 중추원만을 설치해 군사와 왕명 출납을 관장하도록 했다. 이런 조직체계는 조선 정종 때까지 이어졌다.

조선 건국 직후 삼군부의 설치로 중추원 추밀은 기능을 잃고 사실상 태조와 개국공신들의 원탁회의와 같은 노릇을 하게되어 실질적으로 승지의 왕명 출납 기능만 남게 되었다. 정종 2년(1400년) 중추원을 혁파하고 군무는 온전히 의흥삼군부에 넘긴 뒤 국왕 직속기관으로 승정원을 분리시키고 승지를 승정원 소속으로 하는 직제 변경이 이뤄졌다. 이듬해인 태종 1년(1401년) 태종의흥삼군부를 다시 승정원에 흡수시키고 승정원을 승추부로 바꾸어 이름만 바뀐 채 예전 제도로 되돌렸다. 또한 도승지, 좌·우 승지, 좌·우 부승지를 지신사[2], 좌·우 대언, 좌·우 부대언으로 개칭했으며 동부대언과 당후관을 새로 설치했다.

신설된 동부대언은 지신사와 4대언이 각각 이(吏)·병(兵)·호(戶)·예(禮)·공조(工曹)를 담당하는 것에 이어 형조(刑曹)를 담당하게 했다.

이어 태종 5년(1405년) 군사 관련 업무를 병조에 넘기고 국왕 직속 기관으로서 필요한 부분만 남기는 개편과 함께 이름을 다시 승정원으로 고쳤고, 세종 15년(1433년) 지신사를 도승지(都承旨)로, 대언을 승지(承旨)로 개칭하며 승정원 제도가 거의 완성됐다. 이 체제는 이후 경국대전에 그대로 등재되어 조선 후기까지 이어진다.

갑오개혁(1894년) 이후로는 승선원으로 개편되었고, 1895년 궁내부 산하에 신설된 시종원에서 업무를 이어받았다. 궁내부 시종원은 경술국치 직후인 1910년 9월 1일, 한국통감부[3]에 의해 폐지되었다.

3. 승정원의 별칭들

약칭은 정원(政院)이었으며, 가장 잘 알려진 별칭으로는 후설(喉舌)을 꼽을 수 있다. 목구멍과 혀라는 뜻으로, 임금의 명을 들이고 내가는 조직으로서 임금의 입 기능을 한다는 뜻이다. '후원(喉院)'이라고도 불렀으며 시경에 나오는 "왕명을 출납하니 왕의 목이요 혀로다(出納王命 王之喉舌)"에서 유래했다. 여기에서 '후설지신(喉舌之臣)'이라는 말도 유래했다.

다른 말로 '은대(銀臺)'라고도 불렀는데, 말 그대로 은(銀)빛 건물(臺)이라는 의미로 '동궐도' 등에는 승정원이 위치한 건물 이름이 '은대'로 나와 있다. 승정원 승지 6인을 '은대학사'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는 중국 송나라 대에 궁궐 은대문 안에 비변사를 두고 황제에게 올리는 문서를 주관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4. 조직과 업무

<rowcolor=#f0ad73> 경국대전
1485년(성종 16)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rowcolor=#f0ad73> 구분 품계 관직 정원 비고
승지
承旨
정3품 도승지都承旨 1 대통령비서실장 + 정무수석비서관
좌승지左承旨 1 -
우승지右承旨 1 -
좌부승지左副承旨 1 -
우부승지右副承旨 1 -
동부승지同副承旨 1 -
- 정7품 주서注書 2+α[A] 국정기록비서관
승정원일기
아전
衙前
서리書吏 28 승지 직속 각 1명씩 6명
그 외 22명
}}}}}}}}}
정3품(正三品) 승지(承旨)조선 초기에 도승지는 반드시 이조 업무를 담당했지만 다른 승지들은 순서에 구애받지 않고 업무를 맡기도 했다.[6] 세조 이후 더 이상 승지가 육조의 지사(知事)를 맡지 않게 되면서, 왕의 전담 비서로서의 성격이 강해졌다. 그럼에도 여섯 승지는 각각 이방(吏房), 호방(戶房), 예방(禮房), 병방(兵房), 형방(刑房), 공방(工房) 승지로서 육조의 보고 체계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승지들은 도승지를 포함하여 서열에 관계 없이 자신들의 전문 분야에 따라 직무를 분담했다.승지들은 왕의 그림자 같은 존재였다. 한국 사극에서는 환관 또는 내시가 왕을 시종하면서 왕의 명령을 전하고 혼잣말을 받아주고 하지만, 실제로 그 자리에서 그런 일을 한 것은 승지였다. 왕과 승지가 같이 있는 것은 왕 혼자 있는 것과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승지들은 모두 같은 품계이다. 말석이라는 동부승지라고 해도 정3품이면 당상관으로 수군절도사와 같은 품계이다. 그러나 승지들 간의 위계는 매우 엄격했다. 관품이 동일하다 해도 요즘 직장으로 치면 선임이나 선배가 아니라 상사 대접을 한다 해도 좋을 정도였다. 왕의 면전에서 도승지보다 먼저 발언했다는 이유로 도승지가 다른 승지에게 불같이 화를 낸 사건도 있었다. 성종조의 일로, 도승지 현석규를 제외한 나머지 다섯 승지가 무고죄를 적용받게 생긴 피의자를 뇌물을 받고 구명하기로 하고, 동부승지 홍귀달이 총대를 매고 왕 앞에서 간했다. 이 내용도 문제인 데다 심지어 현석규가 형방을 맡고 있던 상황에서 서열도 낮고 담당자도 아닌 다른 승지가 관련 사건에 대해 먼저 발언하자 도승지 현석규가 왕(성종) 면전에서 팔을 걷어 올리면서(!) "너 홍귀달이"[8][9]라며 막말을 하며 주먹 싸움 직전까지 간 일이 있다. 이에 승지 모두가 파직되었으나, 유일하게 뇌물을 먹지 않은 현석규만 후에 특진.[10][11]

승지의 임명은 서열순으로 이뤄져 이 서열을 뛰어넘는 임명은 불가능했다. 한마디로 동부승지부터 위로 하나씩 올라가야 했다는 말. 다만 김종직의 경우처럼 우부승지, 좌부승지를 건너 뛴 사례도 있어서 엄격한 규칙이라기보다는 관례인 듯하다.

근무규칙도 엄격해서 도승지 앞에서는 담배를 피우거나 관모를 벗어서는 안 됐다. 특히 이등병동부승지는 승정원내 좌석도 서벽 말석 가장 구석진 곳이었으며 당직 배분에도 많은 불이익이 있었고, 근무 1년간 병가를 포함해 어떤 사유로도 결근해서는 안 되는 근무 규칙이 있어 이를 어기면 상사(...) 승지들로부터 대찬 까임을 받아야 했다.

정7품(正七品)
이들은 하룻동안 일어난 모든 사건과 발언들을 기록해야 했으므로 승정원일기는 초서체에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구어체로 기록했다. 때로 놓친 부분이 있으면 춘추관 소속의 사관들과 서로 기록을 대조하며 채워나가기도 했다고 한다. 오늘날로 치면 국정기록비서관.

이밖에 경국대전 규정에 의거해 사인, 하례 등을 두었다.

5. 관련 기록물

5.1. 은대조례

이처럼 승정원의 업무가 많고 관련 규정과 절차 등도 복잡한 데 비해 승정원의 인원들은 빨리 회전되는 경향이 있었다.[12] 따라서 업무 숙지도가 중요했고, 업무 규정집도 따로 필요했다. 이를 위해 몇 차례 규정집이 만들어졌는데, 가장 마지막인 고종 7년(1870년) 흥선대원군의 명령으로 간행된 승정원 업무 규정집이 은대조례다.

은대조례에 앞서 은대편고라는 규정집도 있었는데, 은대조례는 은대편고가 너무 복잡하고 자세해서 업무에 참고하는 데 어려움이 있어 내용을 간추려 정리한 것이다. 상술한 승정원의 업무 규정 중 상당수는 은대조례에 실려있는 내용이다.

5.2. 승정원일기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승정원일기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6. 승지 진급 사례

승지 이동이 잦은 경우라면 도승지가 정3품 당상 통정대부 자급이겠지만, 인사이동이 늦어지면 통정대부 자급을 뛰어넘는 경우가 발생한다. 이렇게 되면 행 도승지(行 都承旨)가 된다.

성종조의 김승경(金升卿)의 승지임명 사례를 보면 임명일자가 몇몇 부정확하기는 하지만, 2년 2달만에 동부승지에서 도승지로 진급했다. 다른 승지들도 앞서서/뒤이어 동부승지, 우부승지, 좌부승지, 우승지, 좌승지, 도승지 순으로 진급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좌부승지 손비장이 우승지 홍귀달로 바뀐 건 예외.

또 성종조에는 세조조부터 이어온 훈구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을 등용하였다. 그런게 이렇게 등용된 사림이 임금을 막상 너무 꼿꼿하게 대하자 이에 진저리를 느낀 것. 그래서 무인 출신을 승지로 임명한 사례도 있었다. 단 승지들이 당연히 겸직하던 경연관이나 춘추관 관직은 맡지 못하게 했다. 이를 '무승지'라고 해 당시 정계에 상당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모양. 이후 성종은 무승지를 시작으로 무인의 문관직을 강력하게 밀고 나갔지만 문신들의 눈치를 보던 무신들의 소극적 움직임으로 큰 재미를 보지는 못했다. 게다가 이후 경국대전이나 대전회통에서 무승지의 필요성이 강조되긴 했지만 성종 이후 시대에서 무승지가 나오는 일은 없었다고...

또 중종 17년(1522) 2월 6일에 어떤 사건으로 승지 6명을 동시에 파직을 시킨 사례도 있었는데 이는 개국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로 인해 일을 대신하기 위해 지중추부사(종2품) 윤은필과 장례원판사(정3품 당하) 최세절을 급히 가승지로 임명한 일도 있었다.# 이후 이 두 명은 승지인사가 정식발표 할 때 우승지와 우부승지에 제수됐다고... 보통 승지는 동부승지부터 차례차례 올라가는게 관례인데 이례적인 사건이라 하겠다.

성종 8년 8월 17일 동부승지
성종 8년 8월 26일 우부승지
성종 9년 4월 30일 좌부승지
성종 9년 9월 6일 우승지
성종 9년 11월 14일 좌승지
성종 10년 10월 25일 도승지
성종 12년 8월 25일 가선대부 행 도승지
[1] 공식 영문 번역 표기.[2] 태종 때 황희가 지냈던 지신사가 바로 이 지신사다.[3] 조선총독부1910년 10월에 들어선다.[A] 가주서假注書[5] 10.26 사건박정희 전 대통령이 참석한 인사들에게 술을 따라줄 때 김계원 당시 비서실장과 김재규 당시 중정부장에게 각각 "도승지, 포도대장, 한 잔 받으시오" 라고 했다는 일화가 알려져 있다. 그러나 포도청은 수도권의 치안을 담당했던 기관이라서 오늘날 서울특별시경찰청장과 경기도남부경찰청장, 경기도북부경찰청장, 인천광역시경찰청장이 군인 신분인 것과 같기 때문에 의금부의 수장 판의금부사에 빗대는 것이 더 정확하다. 물론 권위주의 독재 시절 당시의 중정부장은 대통령 다음 가는 사실상의 권력 2인자로서 군, 경찰, 검찰 등의 주요 권력기관은 물론이고, 심지어 입법부의 핵심적 교섭을 담당하거나, 행정부의 일부 업무와 지방자치단체의 권한까지 주무를 정도의 막강한 권력을 자랑했기에, 과거 조선시대나 민주화 이후의 그 어떤 직책에 대입하든지 애매하다.[6] 이를테면 단종의 선위 당시 옥새를 전달한 예방승지(禮房承旨)는 우승지가 아닌 동부승지 성삼문이었다.[7] 국가안보실장은 병조판서에 더 가까웠다.[8] 현대 기준으로도 엄청난 결례이다. 이름을 부르는데 금기를 가지고 있는 한국문화에선 관직명이나 로 부르는 게 예의이며, 정말 친한 사이여도 로 불렀다. 현석규가 홍귀달보다 훨씬 나이가 많다고 하더라고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아무튼 홍귀달은 저 사건 이후로도 관직생활 잘 하다가 무오사화 때 숙청되었고, 갑자사화에도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이후 복권되었다.[9] 성종실록 82권 성종 8년 7월 17일 임오 4번째 기사[10] 이후 현석규는 형조판서, 평안도 관찰사를 거쳐 의정부 우참찬까지 올랐으며 성종 11년(1480) 사망하였다.[11] 현석규는 요새 말로 하자면 트러블 메이커였다. 성정이 억세고 거칠어 조정 내에서도 다른 신료들과 숱하게 마찰을 빚었다. 그나마 성종이 총애해서 유야무야 넘어가긴 했지만. 현석규는 팔을 걷어 붙인 일에 대해 더워서 그랬다고 마지 못해 해명했다.[12] 사실 인사이동이 너무 빠르고 잦다는 점은 조선시대 내내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