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BCD0BC> 프랑스 왕국의 도핀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 라파엘라 María Teresa Rafaela de España | ||
이름 | 스페인어 | 마리아 테레사 안토니아 라파엘라 데 보르본 이 파르네시오 (María Teresa Antonia Rafaela de Borbón y Farnesio) |
프랑스어 | 마리 테레즈 앙투아네트 라파엘 드 부르봉 (Marie Thérèse Antoinette Raphaëlle de Bourbon) | |
출생 | 1726년 6월 11일 | |
스페인 마드리드 레알 알카사르 | ||
사망 | 1746년 7월 22일(향년 20세) | |
프랑스 왕국 베르사유 베르사유 궁전 | ||
장례식 | 1746년 8월 6일 | |
프랑스 왕국 생 드니 대성당 | ||
배우자 | 프랑스의 도팽 루이 (1744년 결혼) | |
자녀 | 마리 테레즈 | |
아버지 | 펠리페 5세 | |
어머니 | 파르마의 엘리사베타 공녀 | |
형제 | 카를로스 3세, 마리아나 빅토리아, 필리포 1세, 루이스, 마리아 안토니아 페르난다 | |
종교 |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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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와 파르마의 엘리사베타 공녀의 3남 3녀중 차녀로 프랑스의 도팽 루이의 첫 번째 아내이자 프랑스 왕국의 왕세자비(도핀)이다.2. 작위
- 스페인의 인판타 마리아 테레사 라파엘라 전하 Her Royal Highness Infanta Maria Theresa Raphaela of Spain (1726년 6월 11일) ~ 1745년 2월 23일)
- 프랑스의 도핀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Dauphin of France(1745년 2월 23일 ~ 1746년 7월 22일)
3. 생애
3.1. 스페인의 공주
1726년 6월 11일, 스페인 레알 알카사르에서 펠리페 5세와 이사벨 왕비의 차녀로 태어났다. 풀네임은 마리아 테레사 안토니아 라파엘라였으나 공식 석상에서는 마리아 테레사 라파엘라로 불렸고 종종 마리아 테레사로 불리기도 했다.3.2. 결혼
마리아 테레사 라파엘라가 결혼하기 전부터 스페인 왕실과 프랑스 왕실은 사이가 매우 안 좋았다. 일단 아버지 펠리페 5세가 루이 15세의 즉위 초부터 프랑스 왕위를 탐내며[1] 위트레흐트 조약마저 어기고 사국 동맹 전쟁을 벌였고 이로 인해 사이가 벌어진 두 왕실의 결속을 다시 다지기 위해, 루이 15세와 마리아 테레사 라파엘라의 큰언니 마리아나 빅토리아와의 혼인 동맹이 성사됐지만 이 혼담마저 1725년에 프랑스 측에 의해 일방적으로 파기당했다.[2] 그후 루이 15세는 폴란드 공주 출신이었던 마리아 레슈친스카와 결혼했다.이러한 두 왕실의 적대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루이 15세는 장남 루이 페르디낭과 마리아 테레사 라파엘라와의 혼담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1739년 8월 루이 15세의 장녀였던 루이즈 엘리자베트가 마리아 테레사의 작은 오빠인 스페인의 펠리페 왕자와 결혼할 시기에 마리아 테레사 라파엘라도 5촌 조카인 루이 페르디낭과 약혼했다. 다만 어머니 이사벨 왕비의 영향으로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을 때까지 스페인 궁정을 떠나지 않았다.
1744년 12월 18일 마드리드에서 프랑스의 도팽 루이 페르디낭과 대리혼을 치르고 1745년 1월 스페인을 떠났으며 1745년 2월 21일 프랑스의 베르사유에 도착했다. 공식 결혼식은 1745년 2월 23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치렀으며 루이 르네 드 로앙 추기경이 혼인성사를 집전했다.
3.3. 프랑스의 도핀
프랑스의 왕세자비(도핀)가 된 마리아 테레사 라파엘라는 프랑스에서 마리 테레즈 라파엘이라고 불리게 되었다.마리 테레즈 라파엘은 프랑스 왕실에서 시어머니 마리 왕비 다음으로 서열이 높은 여자 왕족이었으며 사보이아의 마리아 아델라이데 공녀 이후 32년 만에 나타난 프랑스 왕세자비(도핀)이었다. 2월 24일 도팽 부부를 위한 유 트리 무도회가 열렸다. 이 행사는 루이 15세의 정부 퐁파두르 부인이 베르사유에 도착한 날이기도 했으며 여러 왕족들이 참석했다.
정략결혼임에도 불구하고 도팽과 도핀 부부는 사이가 좋았다고 하는데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남편 도팽 루이와 첫날 밤을 치르지 못해서 마리 테레즈 라파엘의 입지는 약했지만 처신을 잘 하여 남편 루이는 물론 시부모였던 루이 15세와 마리 왕비의 신뢰를 받았다. 왕세자비였던 마리 테레즈 라파엘은 아름답고 위엄있고 종교적으로 독실했으며, 교육을 잘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수줍음이 많았던 마리 테레즈 라파엘은 시아버지 루이 15세의 정부였던 퐁파두르 부인과는 그닥 가깝지 않아서 한동안 프랑스 궁정에서 고립되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마리 테레즈 라파엘과 도팽 루이가 퐁파두르 부인이 루이 15세와 마리 부부를 멀리한다고 해서 싫어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난 후 부부는 서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3.4. 사망
1746년 7월 19일 마리 테레즈 라파엘은 딸 마리 테레즈를 출산했지만 3일 만에 향년 2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남편 도팽 루이는 아내의 죽음에 매우 슬퍼했다. 오죽하면 루이 15세가 루이를 마리 테레즈의 침대에서 억지로 떼어놔야 했다. 더군다나 마리 테레즈 라파엘이 죽기 13일 전 그녀의 아버지 펠리페 5세도 사망했다. 도팽 부부의 딸인 마리 테레즈도 1년 만에 요절했다.마리 테레즈 라파엘의 이복오빠인 페르난도 6세는 막내 여동생인 마리아 안토니아를 도팽 루이의 후처로 제안했지만 루이 15세가 거절했다. 이후 도팽 루이는 아우구스트 3세의 넷째 딸인 작센의 마리아 요제파와 재혼했다.[3]
4. 가족관계
4.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 라파엘라 (Maria Theresa Raphaela of Spain) | <colbgcolor=#fff3e4,#331c00> 펠리페 5세 (Felipe V) | <colbgcolor=#ffffe4,#323300> 프랑스의 루이 왕세자 (Louis, Dauphin of France) | |
루이 14세 (Louis XIV) | |||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 (Maria Theresa of Spain) | |||
바이에른의 마리아 아나 빅토리아 (Maria Anna Victoria of Bavaria) | |||
바이에른 선제후 페르디난트 마리아[4] (Ferdinand Maria, Elector of Bavaria) | |||
사보이아의 엔리케타 아델라이데[5] (Henriette Adelaide of Savoy) | |||
엘리사베타 파르네세 (Elisabeth Farnese) | |||
파르마의 공세자 오도아르도 파르네세 (Odoardo Farnese, Hereditary Prince of Parma) | |||
파르마 공작 라누초 2세 파르네세 (Ranuccio II Farnese, Duke of Parma) | |||
이사벨라 데스테 (Isabella d'Este) | |||
노이부르크의 도로테아 조피 (Dorothea Sophie of Neuburg) | |||
팔츠 선제후 필리프 빌헬름 (Philip William, Elector Palatine) | |||
헤센다름슈타트의 엘리자베트 아말리 (Elisabeth Amalie of Hesse-Darmstadt) |
4.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1녀 | 마리 테레즈 공주 (Princess Marie Térèse) | 1746년 7월 19일 | 1748년 4월 27일 |
[1] 펠리페 5세의 조카였던 루이 15세는 즉위 당시 고작 5살이었고 유아 사망률이 높던 시대상 요절할 가능성도 컸기 때문에 펠리페는 이 점을 주목하여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공식적으로 포기했음에도 프랑스 왕위에 대한 욕심을 드러냈다.[2] 루이 15세와 파혼한 마리아나 빅토리아는 훗날 주제 1세와 결혼해서 포르투갈의 왕비가 되었다. 그리고 루이 15세와의 파혼으로 앙금이 남은 마리아나는 자신의 딸들을 프랑스 왕가로 시집 보내지 않았다.[3] 마리아 테레사의 오빠 카를로스 3세의 왕비 작센의 마리아 아말리아의 여동생이다. 카를로스 3세는 도팽 루이의 5촌 숙부이기도 하니 카를로스 3세와 도팽 루이는 5촌임과 동시에 동서 지간이 된 것.[4] 페르디난트 2세의 외손자이다.[5] 사보이아 공작 비토리오 아메데오 1세와 프랑스의 크리스틴의 셋째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