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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3 17:14:33

순국칠사묘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군의 전쟁범죄와 그로 인한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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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급 전범
평화에 대한 죄
사형수
기무라 헤이타로 도이하라 겐지 도조 히데키 마쓰이 이와네 무토 아키라
이타가키 세이시로 히로타 고키
복역수
가야 오키노리 고이소 구니아키 기도 고이치 도고 시게노리 미나미 지로
사토 겐료 스즈키 데이이치 시라토리 도시오 시마다 시게타로 시게미쓰 마모루
아라키 사다오 오시마 히로시 오카 다카즈미 우메즈 요시지로 하시모토 긴고로
하타 슌로쿠 호시노 나오키 히라누마 기이치로
피의자[1]
히로히토 천황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 고노에 후미마로 코다마 요시오 고이즈미 치카히코
구즈 요시히사 기시 노부스케 나가노 오사미 니시오 도시조 다니 마사유키
다다 하야오 다카하시 산키치 데라시마 겐 도쿠토미 소호 마사키 진자부로
마츠오카 요스케 사사카와 료이치 사토미 하지메 쇼리키 마츠타로 스마 야키치로
아모 에이지 아베 겐키 아베 노부유키 아오키 카즈오 아카기 고헤이
안도 기사부로 오카와 슈메이 오타니 게이지로 이사하라 히로이치로 이와무라 미치요
하시다 구니히코 혼다 구마타로 혼조 시게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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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 C급 전범
일반 전쟁범죄, 인도에 반한 죄
피의자 약 5,700여 명[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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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다 순 배열
[1] 불기소 피의자, 재판 전 사망자 포함. 공식적으로는 이들은 무죄이다.
[2] 개별 사건의 중복 피고인까지 합계되었으며, 이 밖에 추축국 피점령지 내 부역자, 기소유예자가 포함된 수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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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殉國七士墓.jpg

1. 개요2. 매장자 명단3. 배경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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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ruby(殉国七士廟, ruby=じゅんこくななしびょう)]

일본 아이치현 니시오시 산가네 산 위에 있으며 나고야 철도 가마고리선 히가시하즈역에서 가까운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 판결을 받고 처형된 7명의 추도비와 제단 등이 설치된 묘지로 가끔씩 추도식이 열린다.

그것이 알고싶다의 취재에 따르면 입구 비석의 글씨는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가 썼다고 한다.

2. 매장자 명단

이곳의 비석 안의 유골함에 담긴 7구의 인물들은 다음과 같은데 전술한 것처럼 저 7명 전부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당한 A/B형 전범들이다.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는 절대 A형 전쟁범죄만 저질렀다고 사형시키지 않았으니까 실제로는 B, C형 전쟁범죄도 크게 저지른 것으로 판명난 자들이기도 했다.

3. 배경

이 묘가 어떻게 생겨났는 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한데 원래 A급 전범들은 사형이 확정되고 나서 1948년 12월에 사형이 집행되었고 화장 후 유골은 비행기로 태평양 한가운데에 뿌려졌다.# 하지만 고이소 구니아키의 변호사였던 산몬지 쇼헤이가 화장했던 화장장에서 그나마 수거하고 남은 한 항아리 분량의 유골 조각과 재를 수습한 것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수거하고 남은'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화장장에서 시체를 어떻게 다루는지 알고 있었던 데다 미군이 태평양에 뿌리려고 바로 뒤에서 기다리는 상황에서 수거하고 남았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설령 가능하다고 해도 한 항아리만큼이나 모였다는 것은 어떻게 봐도 화장 과정에서부터 작심하고 빼돌린 것으로 봐야 한다.

물론 그 유골을 유족에게 돌려줬거나 정상적인 장례를 치르고 묘를 조성했다면 그렇게 비난할 일은 아니지만 그들은 시즈오카현에 있는 관세음보살상인 코아칸논(興亜観音)상 [4] 밑에 10년 간 숨겨 두었다. 이것까지도 당대의 분위기를 봐서 그렇다고 하더라도 1958년에 그 유골을 다시 꺼낸 다음 이들이 조성한 게 바로 순국칠사묘다.

4. 기타



[1] 버마에서 대규모 민간인 학살을 저지른 죄목으로 처형당했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실제로 기무라 헤이타로가 학살을 저질렀다는 자료는 없다. 다만 기무라가 버마 전선에 영국군이 진공하자 탈영을 감행해 7만명 이상의 아군을 죽음으로 몰고 간 장본인인 것만큼은 사실이다.[2] 다만 적어도 난징 대학살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등 그의 부하들이 독단적으로 저질렀던 것이었고 당시 마쓰이는 병석에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난징 대학살만큼은 마쓰이의 직접적인 악행이라고 볼 수 없다.[3] 다만 히로타의 사형 판결에는 여러 의문점이 남아 있는데 중일전쟁 발발의 최고 책임자 고노에 후미마로의 책임을 덮어쓰고 사형되었다는 설이 있다. 참고로 고노에는 패전으로부터 넉 달 뒤인 12월 자택에서 자살했다.[4] 흥아관음. 흥아는 직역하면 '아시아를 흥하게 한다'는 뜻으로 실제로는 대동아공영권을 가리키는 단어다. 대동아공영권이 어떤 사상인가를 생각하면 관음상에 저런 이름을 붙인 의도부터가 매우 불순하며 마쓰이가 생전에 중일전쟁에서 전사한 일본군을 추모하려고 세웠다.[5] 물론 전사자 추모용으로 야스쿠니가 좋은 곳인 것도 아니다. 더 좋은 곳도 있는데도 그곳은 아예 무시하다시피 하니까. 진짜 무명의 전몰 장병들을 위한 추모지이면서도 극우들이 일부러 무시하고 있는 치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이 대표적이다. 심지어 여기는 국립묘지도 모자라서 미국의 국방장관이나 야스쿠니를 비난하는 일본공산당도 참배한다. 자민당, 공명당, 입헌민주당 의원들도 참배하는지는 불명.[6] 다만 적어도 히로타 고키마쓰이 이와네만큼은 억울하게 사형당했다는 의견이 많다. 기무라 헤이타로는 적어도 민간인 학살만큼은 누명을 쓰기는 했지만 태평양 전쟁의 개전에 관여한 것만으로도 억울하게 사형당했다고 보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