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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ruby(殉国七士廟, ruby=じゅんこくななしびょう)]일본 아이치현 니시오시 산가네 산 위에 있으며 나고야 철도 가마고리선 히가시하즈역에서 가까운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 판결을 받고 처형된 7명의 추도비와 제단 등이 설치된 묘지로 가끔씩 추도식이 열린다.
그것이 알고싶다의 취재에 따르면 입구 비석의 글씨는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가 썼다고 한다.
2. 매장자 명단
이곳의 비석 안의 유골함에 담긴 7구의 인물들은 다음과 같은데 전술한 것처럼 저 7명 전부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당한 A/B형 전범들이다.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는 절대 A형 전쟁범죄만 저질렀다고 사형시키지 않았으니까 실제로는 B, C형 전쟁범죄도 크게 저지른 것으로 판명난 자들이기도 했다.- 이타가키 세이시로: 이시하라 간지와 함께 만주사변의 주범.
- 기무라 헤이타로: 육군차관으로서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의 개전을 조력.[1]
- 도이하라 겐지: 신멸작전의 주범.
- 무토 아키라: 중일전쟁 발발 당시 확전파의 일원. 루거우차오 사건으로 발발한 교전을 확전시켜 중일전쟁으로 확장.
- 마쓰이 이와네: 중지나 방면군 사령관으로 난징을 점령.[2]
- 히로타 고키: 일본 제국 제32대 총리대신. 중일전쟁 시기 총리.[3]
- 도조 히데키: 일본 제국 제40대 총리대신. 태평양 전쟁의 총사령관.
3. 배경
이 묘가 어떻게 생겨났는 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한데 원래 A급 전범들은 사형이 확정되고 나서 1948년 12월에 사형이 집행되었고 화장 후 유골은 비행기로 태평양 한가운데에 뿌려졌다.# 하지만 고이소 구니아키의 변호사였던 산몬지 쇼헤이가 화장했던 화장장에서 그나마 수거하고 남은 한 항아리 분량의 유골 조각과 재를 수습한 것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수거하고 남은'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화장장에서 시체를 어떻게 다루는지 알고 있었던 데다 미군이 태평양에 뿌리려고 바로 뒤에서 기다리는 상황에서 수거하고 남았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설령 가능하다고 해도 한 항아리만큼이나 모였다는 것은 어떻게 봐도 화장 과정에서부터 작심하고 빼돌린 것으로 봐야 한다.물론 그 유골을 유족에게 돌려줬거나 정상적인 장례를 치르고 묘를 조성했다면 그렇게 비난할 일은 아니지만 그들은 시즈오카현에 있는 관세음보살상인 코아칸논(興亜観音)상 [4] 밑에 10년 간 숨겨 두었다. 이것까지도 당대의 분위기를 봐서 그렇다고 하더라도 1958년에 그 유골을 다시 꺼낸 다음 이들이 조성한 게 바로 순국칠사묘다.
4. 기타
- 야스쿠니 신사는 명분은 전사자 추모용[5]이고 일본의 전쟁범죄 이전에 만들어진 것이지만 이곳은 오직 전범들을 위해 만든 것이다. 그것도 그나마 잘못된 방법으로 국가에 충성한 사람들을 추도하는 식이기 때문에 전쟁범죄를 비판하는 등 최소한의 양심이라도 지키는 게 아닐 정도다. 물론 전범이라고 해도 가족들은 찾을 수 있게 유골을 빼돌려 묘를 조성하는 정도까지야 사람이 할 수 있다고 쳐도 이 시설은 명칭부터가 그냥 전쟁범죄를 '순국'이랍시고 아예 대놓고 찬양하는 곳이기 때문에 변명의 여지가 전혀 없다. 결국 이 곳의 존재 그 자체가 일본 사회가 아직까지도 과거에 대한 청산을 제대로 안 했다는(혹은 할 생각이 없다는) 명백한 증거다. 이쯤 되면 그 악명 높은 야스쿠니 신사조차도 한 수 접어야 될 정도로 정말 답이 없는 곳이라고 볼 수 있다.[6]
- 1960~70년대에 가장 격렬한 적군파 계통 무장투쟁 조직이었던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이 이곳의 비석을 폭파해 버린 적이 있다.
- A급 전범들의 후손들도 이 무덤을 아주 싫어하는지 마쓰이 이와네의 손주는 이 무덤을 두고 '내 조부께서 이딴 쓰레기 같은 놈들과 같이 잠들어 계신다고?'라고 분노했다고 한다. 마쓰이 이와네는 부하의 죄를 뒤집어쓴 점도 있으니 화낼 만하긴 하다.
[1] 버마에서 대규모 민간인 학살을 저지른 죄목으로 처형당했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실제로 기무라 헤이타로가 학살을 저질렀다는 자료는 없다. 다만 기무라가 버마 전선에 영국군이 진공하자 탈영을 감행해 7만명 이상의 아군을 죽음으로 몰고 간 장본인인 것만큼은 사실이다.[2] 다만 적어도 난징 대학살은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등 그의 부하들이 독단적으로 저질렀던 것이었고 당시 마쓰이는 병석에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난징 대학살만큼은 마쓰이의 직접적인 악행이라고 볼 수 없다.[3] 다만 히로타의 사형 판결에는 여러 의문점이 남아 있는데 중일전쟁 발발의 최고 책임자 고노에 후미마로의 책임을 덮어쓰고 사형되었다는 설이 있다. 참고로 고노에는 패전으로부터 넉 달 뒤인 12월 자택에서 자살했다.[4] 흥아관음. 흥아는 직역하면 '아시아를 흥하게 한다'는 뜻으로 실제로는 대동아공영권을 가리키는 단어다. 대동아공영권이 어떤 사상인가를 생각하면 관음상에 저런 이름을 붙인 의도부터가 매우 불순하며 마쓰이가 생전에 중일전쟁에서 전사한 일본군을 추모하려고 세웠다.[5] 물론 전사자 추모용으로 야스쿠니가 좋은 곳인 것도 아니다. 더 좋은 곳도 있는데도 그곳은 아예 무시하다시피 하니까. 진짜 무명의 전몰 장병들을 위한 추모지이면서도 극우들이 일부러 무시하고 있는 치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이 대표적이다. 심지어 여기는 국립묘지도 모자라서 미국의 국방장관이나 야스쿠니를 비난하는 일본공산당도 참배한다. 자민당, 공명당, 입헌민주당 의원들도 참배하는지는 불명.[6] 다만 적어도 히로타 고키나 마쓰이 이와네만큼은 억울하게 사형당했다는 의견이 많다. 기무라 헤이타로는 적어도 민간인 학살만큼은 누명을 쓰기는 했지만 태평양 전쟁의 개전에 관여한 것만으로도 억울하게 사형당했다고 보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