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제국군의 영관급 장교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word-break:keep-all" | <colbgcolor=#29176e> 정령 正領 | |
| 육군 陸軍 | 구연하 | 길영수 | 노백린 | 신재영 | 신태준 | 어담 | 윤철규 | 이건영 | 이근형 | 이민식 | 이태래 | 조철희 | 현흥택 | |
| 해군 海軍 | - | |
| 부령 副領 | ||
| 육군 陸軍 | 강찬희 | 권태한 | 김성은 | 김연시 | 김익남 | 김재은 | 김정우 | 김종원 | 김학안 | 민긍호 | 민영선 | 민영옥 | 박기양 | 박선빈 | 박원교 | 박이병 | 박준성 | 백남신 | 송문섭 | 신성균 | 신좌균 | 안종환 | 안준옥 | 왕유식 | 유혁로 | 윤원구 | 윤진우 | 윤치성 | 이기동 | 이남하 | 이민굉 | 이민섭 | 이민하 | 이병우 | 이인영 | 이창구 | 이해원 | 장기렴 | 장봉환 | 장석조 | 전영헌 | 정두원 | 조민희 | 최낙주 | 한필상 | |
| 해군 海軍 | - | |
| 참령 參領 | ||
| 육군 陸軍 | 강창희 | 강한준 | 구상조 | 구완희 | 구의조 | 구철조 | 권성찬 | 권우섭 | 권종록 | 권종석 | 권중락 | 권중빈 | 권태직 | 권태철 | 김관호 | 김교준 | 김규한 | 김기원 | 김동만 | 김명제 | 김명환 | 김양한 | 김용래 | 김용삼 | 김원계 | 김유현 | 김윤창 | 김응선 | 김인수 | 김준모 | 김증집 | 김진호 | 김한경 | 김한정 | 김혁 | 김현대 | 김현태 | 김형배 | 김희선 | 남기창 | 남명선 | 남정식 | 민대식 | 민영원 | 민영재 | 박두영 | 박문병 | 박승환 | 박영철 | 박유태 | 박태기 | 박태환 | 방영주 | 방흥주 | 백낙균 | 백낙만 | 백낙완 | 백응준 | 서경춘 | 서상조 | 서정규 | 성창기 | 성하영 | 송우영 | 신림 | 신명기 | 신우균 | 신응희 | 신창희 | 신태근 | 신태희 | 신택희 | 신학 | 심상련 | 심횡택 | 안규승 | 안종익 | 안창용 | 양규열 | 양주흥 | 오성묵 | 오창성 | 우기정 | 유돈수 | 유동열 | 유봉열 | 유석규 | 유승동 | 유완 | 유진형 | 윤건 | 윤석천 | 윤영기 | 윤영성 | 윤자설 | 윤현구 | 이갑 | 이규식 | 이규증 | 이기표 | 이길환 | 이대규 | 이동식 | 이동휘 | 이두황 | 이명하 | 이민승 | 이민직 | 이민화 | 이범칠 | 이병규 | 이선재 | 이성규 | 이수봉 | 이승원 | 이승칠 | 이승현 | 이승희 | 이용관 | 이용구 | 이용문 | 이용승 | 이용한1 | 이용한2 | 이재항 | 이재화 | 이정복 | 이조현 | 이종관 | 이종림 | 이준구 | 이태현 | 이한성 | 임상초 | 임재덕 | 장기승 | 장달헌 | 장용진 | 장운택 | 전면조 | 전우기 | 전재흥 | 정관수 | 정관조 | 정광철 | 정우창 | 정익용 | 정인환 | 정태석 | 정희봉 | 조성훈 | 조영규 | 조인순 | 조존우 | 조중만 | 조중완 | 조희문 | 진학순 | 채항묵 | 최진태 | 하상기 | 한석로 | 한인교 | 한정호 | 한진행 | 한횡수 | 함은준 | 현상건 | 홍우형 | 홍진길 | 홍진식 | 홍창걸 | 홍태윤 | 황준성 | |
| 해군 海軍 | - | |
| ※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황제·황태자 제외 | ||
| }}}}}}}}} | ||
1. 개요
- 한자: 宋文燮
구한말의 군인. 최종 계급 육군 부령.
2. 생애
- 1886년 수문장
- 1890년 연일군 현감
- 1891년 내금위장
- 1897년 1등군사(대위) 임용
- 1905년 군부 경리국 과장
- 1906년 2등 사계에서 보병 부령[1] 병과 전환 / 육군연성학교 부
- 1907년 제대
승정원일기의 첫 등장 시기를 보면 1860년대생으로 추정된다.
1899년에는 국민교육회에 성금을 냈다. # 대한천일은행의 설립 청원에 이름을 올리고 주주총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
1905년에는 본인 소유의 도장을 잃어버렸다며 황성신문에 광고를 냈다. 비파동(琵琶洞)[2]에 거주하고 있다. 本人의 姓名下一心章아라 刻 圖章을 本月十三日遺失하엿스니
1906년에 현역 부령 시절에 소송에 걸린 게 황성신문에 보도되었다. 송문섭이 의성군수 이인성에게 공금 수만 냥을 지인에게 지급하도록 부탁했다. 해당 인물이 반환하지 않아 송문섭에게 소를 제기하였다. 義倅將訴 평리원에 넘겨질 거란 얘기가 돌았는데 곧 송학중이란 사람이 광고를 내어 송문섭이 공금을 주라고 한 게 아니라 자신이 이인성에게 받은 거라고 하였다. 昨日本雜報內平院不遠이란데 對야 그해에 아들인 성래(聲來)가 아편을 피다 순검에 체포되었다가 방면된 일이 보도되기도 했다. 연何白放
1907년에는 송문섭의 부인이 진명부인회에 찬조금을 냈다. 진명부인회 제회 연죠금
1909년에는 일본인에게 빌린 돈을 갚지 않아 감옥에 갇힌 내용이 황성신문에 보도되었다. 이 기사에선 전 참령으로 보도되었다. 似是債關
1910년 7월 15일에는 송문섭의 아들인 성래가 유흥에 빠져서 기생에게 진 빚으로 비파동의 집안 재산이 강제 집행을 당한 게 보도되었다. 蕩子敗家 같은 달 21일에 송문섭은 구희문(具熙文)과 함께 구속되었다. 宋具被捉 화투 도박을 한 혐의이다. 宋具花局 23일 보도에 따르면 일본인 사기꾼으로 유명한 핫토리 겐노스케(服部健之助)와 관련하여 기소당했다. 被損幾何 송문섭 외에도 전 부위인 이승익(李昇翼)[3], 전 군수인 유진찬(兪鎭贊)도 함께 기소되었다.
1913년에는 아편을 핀 혐의로 순사에 체포되어 제1심에서 징역 5개월형을 받고 항소했단 내용이 매일신보에 보도되었다. 기사에서 54세로 보도된 점을 볼 때 1858년생에서 1860년생(한국식 나이 기준)으로 추정된다. 송문섭의 징역 불복
1914년에는 아들인 극래(克來)가 언급되었다. 극래는 아버지의 재산으로 주색잡기를 즐기다가 아편에 빠졌는데 중독이 심해서 거리에서 부랑자 생활을 하다가 경찰에 잡혔다. 기사 내용으로 볼 때 당대 서울 사람들은 송문섭이 아편 혐의로 잡힌 게 아들의 죄를 뒤집어 쓴 것이라 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浮浪者의 말로, 아비 징역시키던 부랑자의 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