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이름 | 러시아어: Семён Александрович Чернецкий 영어: Semyon Alexanderovich Tchernetsky 한국어: 세묜 알렉산드로비치 체르네츠키 |
출생 | 1881년 10월 24일, 러시아 제국 오데사 |
사망 | 1950년 1월 13일, 소비에트 연방 모스크바 |
복무 | 러시아 제국군(1903 - 1917) 소련군(1918 - 1949) |
최종 계급 | 육군 소장 |
주요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
주요 서훈 | 스탈린상 레닌훈장 적기훈장 |
소련의 군악 지휘자이자 작곡가, 음악 교수. 알렉산드로프 앙상블의 창립자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프처럼 소련 군악계에의 시조이면서, 초기 소련 행진곡의 본좌라고 할 수 있는 사람 중 하나이며 그 공로로 1936년에 러시아 연방 공화국 공훈예술할동가(Заслуженный деятель искусств) 칭호를, 1946년에는 2급 스탈린상(Сталинская премия)을 수상했다. 체르네츠키는 현재 러시아 연방 국방부 군악대(Военно-оркестровая служба Вооружённых Сил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로 이어지는 소련 국방인민위원부(Народный Комиссариат обороны)[1] 군악대의 창립자이면서 지휘자로 복무했으며, 1946년 건강악화로 활동을 중단할 때까지 100곡 이상의 행진곡을 작곡했다.
2. 생애
2.1. 초기
본명은 솔로몬(Соломон)으로, 체르네츠키는 1881년 러시아 제국 오데사의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체르네츠키의 부모는 모두 음악업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바이올린 강사이면서 바이올리니스트이기도 했고 어머니 또한 피아노 강사였다. 체르네츠키에게는 누이가 세 명 있었는데 이들도 모두 피아니스트로 성장했다. 또한 결정적으로 그의 사촌, 그리고 외삼촌이 바로 군악대 지휘자이자 작곡가로 근무했다. 물론 이런 천혜의 환경 속에서 당연히 체르니츠키는 음악에 대해 빨리 눈을 뜰 수 있었는데, 생애 처음 음악을 교육받은 것도 어머니를 통해서였다. 체르니스키는 음악에 두각을 보여 1892년부터 1893년까지 키쉬뇨프(Кишинёв)에서 외삼촌인 이삭 체르네츠키(Исаак Чернецкий)가 군악지휘자로 근무하고 있었던 제24 루벤스키 용기병 연대(24-й Драгунский Лубенский полк)의 악단(오케스트라)에서 트롬본을 배울 수 있었다. 1893년에서 1897년까지는 '오데사 황립 러시아 음악협회(오데사 음악교육원)'에서 피아노 반주에 대한 수업과 트롬본 교습을 받았다.그러나 1900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경제적인 궁핍이 찾아오자, 체르네츠키는 음악교육원 과정을 마치지 못한 채 키시뇨프에서 군악지휘자로 근무하던 외삼촌인 이삭 체르네츠키에게 위탁된다. 체르네츠키는 여기서 삼촌의 도움을 통해 그동안 좌절되었던 음악학교 과정을 졸업할 수 있었는데, 이때 군악계에 몸을 담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체르네츠키에게 외삼촌의 존재는 매우 중요했는데, 처음에는 제24 용기병 연대의 군악지휘자였던 외삼촌의 조수로 활동하다가 1903년에는 제14포병여단(14-я артиллерийская бригада)의 군악지휘자가 된다. 또한 이 해에 발생한 키시뇨프 유태인 박해(Кишинёвский погром)가 발생하자 그는 자위조직에 참가하였다가 심각한 부상을 입어 왼쪽 눈의 시력을 잃게 된다.
그후 체르네츠키는 1908년까지 제14포병 여단의 지휘자로 근무하였고, 이후에는 오데사의 제60 자모스츠키 보병 연대(60-й Замосцкий пехотный полк)에서 근무했는데, 동시기에 지휘업무 뿐 아니라 각종 학교와 교육시설에서 음악을 가르쳤다. 1911년 체르네츠키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음악원(Петербургская консерватория)에 들어가서 1917년까지 지휘, 기악, 작곡 과정을 수료했다.
2.2. 소련군에서
러시아 혁명이 발생하여 러시아 제국이 결국 무너지고 소비에트 정권이 들어서자, 1918년에 체르네츠키는 자발적으로 노농적군에 합류하여 페트로그라드 군사위원부(Военный комиссариат) 휘하의 군악대 지휘자로 활동을 시작했고, 나중에는 페트로그라드 군관구 군악대 감독(инспектор)이 되었다. 이 감독이라는 자리는 현재의 군악대 단장과 비슷한 자리였다. 이 시기에 체르네츠키는 페트로그라드 주둔군 합동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도 겸임했다. 이 시기에 소련군의 인적 자원이 다 그랬지만,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아 전문분야에 능통한 사람은 희귀했다. 체르네츠키는 전문적인 음악 교육을 받은 인물이라 군악 부분에 있어서는 무척 주요한 인사였다. 그래서 1924년, 체르네츠키는 노농적군 군악대 전체의 감독역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1926년에는 모스크바 주둔군 합동 오케스트라를 조직하였으며 1932년부터 그들을 지도했다.체르네츠키는 1928년 노농적군 중앙회관(Центральный дом Красной Армии)의 교향악단를 창설하고 그들을 지휘하였다. 또한 1935년에는 소련 국방인민위원부 오케스트라를 창설하였는데 이것이 나중에 소련 국방부(Министерство обороны СССР) 오케스트라.[2] 의 전신이 된다. 체르네츠키는 이 군악단을 1949년까지 감독(단장) 자격으로 이끌었다. 이 외에도 체르네츠키는 활동을 중단할 때까지 소련 군악사에 굉장한 발자취를 남겼는데, 각 군관구나 주둔군, 군사대학, 사관학교 오케스트라 및 군악대의 창설에 관여하였으며 군악대의 활동 영역을 넓혀서 볼쇼이 극장에서의 군악 공연 등, 단순히 군악대가 군대 조직이라는 틀을 벗어나 사회 및 정치적인 부분, 혹은 문화, 대중적인 부분에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힘썼다.
체르니츠키는 결국 노농적군 군악단장의 자격으로 1945년 6월 24일에 붉은광장에서 거행된 소련의 전승열병식(Парад Победы)에서 소련군 통합 군악대를 지휘하였다. 전승열병식에서 그는 소장 계급을 가지고 있었으나 다른 장성급 장교와는 달리 1945년에 새로 제정된 녹색 예복이 아니라 회색의 1943년형 장군예복을 착용했다. 참고 이것은 제복의 격을 낮춘 것이 아니다. 이때 이오시프 스탈린도 다른 장군들과 달리 1943년형 회색의 원수예복을 입었다. 또한 역사적인 열병식에는 체르네츠키가 작곡한 여러 행진곡이 사용되었다.
2.3. 최후
1946년에 마비증상이 찾아오자 체르네츠키는 적극적인 활동을 중단한 수밖에 없었다. 1949년에는 완전히 은퇴하였으며 체르네츠키는 1950년 4월 13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유해는 노보제비치 묘지(Новодевичье кладбище)에 안장되었다.3. 대표곡
2021년 10월 24일 세묜 체르네츠키 탄생 140주년 기념 음악회에서 그의 대표곡을 연주하는 러시아 연방 국방부 중앙 오케스트라(Центральный военный оркестр МО РФ). 체르네츠키가 창설했고 또 은퇴 이전까지 단장으로 지도했던 자식 격이자 러시아군의 대표 군악단이다. 소련 행진곡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들어봤을 곡들이 많다.
- Салют Москвы - 모스크바의 축포[3]
- Слава Родине - 조국에 영광을
- Парад - 열병
- Марш танкистов - 전차병 행진곡
- Марш артиллеристов - 포병 행진곡
- Вступление Красной Армии в Будапешт - 노농적군의 부다페스트 입성
- Вступление Красной Армии в Бухарест - 노농적군의 부쿠레슈티 입성
- Герои Сталинграда - 스탈린그라드의 영웅들
- Украинский марш № 2 - 우크라이나 행진곡 2번
- Марш 8-й Гвардейской Дивизии - 제8 근위사단 행진곡
- Марш Ленинградских Гвардейских Дивизий - 레닌그라드 근위사단 행진곡
- Торжественный марш ”Рокоссовский” - 로코솝스키 축전행진곡
- Марш гвардейцев-миномётчиков - 근위 박격포병 행진곡
- Юбилейный встречный марш ”25 лет РККА” - 노농적군 25주년기념 개선행진곡
- Встречный марш Красной Армии - 노농적군 개선행진곡
이 외에도 수많은 곡들을 작곡하였으며 대부분 유튜브 검색으로 들어볼 수 있다.
소련 기간을 거치고 러시아 연방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행진곡들이 작곡된만큼, 열병식에 사용되는 음악들도 편곡 등을 통해서 새 곡으로 많이 대체되었으나, 1945년에 붉은광장에서 거행된 전승열병식 당시에는 게오르기 주코프와 콘스탄틴 로코솝스키가 등장할 때 연주된 노농적군 25주년기념 기념행진곡을 필두로, 마지막으로 군악대가 행진할 때 연주된 조국에 영광을에 이르기까지 체르네츠키의 행진곡이 주류를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