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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영의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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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72번 | ||||||||||||||||||||||||||||||||||||||||||||||||||||||||||||||||||||
결번 | → | 성기영 (1987) | → | 조창수 (1988~1989) | |||||||||||||||||||||||||||||||||||||||||||||||||||||||||||||||||
{{{#ff9933 [[태평양 돌핀스|태평양 돌핀스]] 등번호 81번}}} | |||||||||||||||||||||||||||||||||||||||||||||||||||||||||||||||||||||
김성근 (1989~1990) | → | 성기영 (1991~1993) | → | 고원부 (1994~1995) |
성기영 成基永 | |
출생 | 1937년 10월 11일 ([age(1937-10-11)]세) |
경상북도 달성군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부산상업고등학교 (졸업) |
포지션 | 유격수, 2루수 |
투타 | 우투우타 |
소속팀 | 육군 야구단 대한통운 야구단 조선미곡창고 야구단 해운공사 야구단 크라운맥주 야구단 한일은행 야구단 |
지도자 | 상문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1975) 부산상업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1976~1979) 경북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1979~1980) 대구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1981~1982) 영남대학교 야구부 감독 (1982~1988) 롯데 자이언츠 감독 (1987) 태평양 돌핀스 2군 감독 (1991~1993) 쌍방울 레이더스 2군 감독 (1993)[1] 쌍방울 레이더스 1군 수석코치 (1993~1994)[2] 쌍방울 레이더스 2군 감독 (1994~1995)[3] |
프런트 | 해태 타이거즈 전력분석원 (1996~2000) 삼성 라이온즈 스카우트 부장 (2001~20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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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야구 선수 출신 코치, 감독.2. 선수 경력
부산상고 출신으로 미창 야구단 등에서 뛰며 한국실업야구에서 활동하다 은퇴했다. 국가대표 2루수로서 50~60년대를 풍미한 선수다.3. 지도자 경력
은퇴 후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경북고에서 류중일, 대구고에서 강기웅, 롯데에서 윤학길 같은 선수들을 길러낸 바 있다.3.1. 롯데 자이언츠 감독 시절
롯데가 강병철 감독과의 갈등으로[4] 인해 재계약을 포기하고, 원래는 수석코치 역할을 하던 도위창(일본명 도이 쇼스케) 코치를 임명하려고 했지만, 외국인 코치, 더군다나 일본인을 감독으로 앉히는 것에 대한 여론이 그다지 좋지 않자 차선책으로 당시 영남대학교 감독이던 그를 선택한다.그러나 이 당시 롯데는 프런트가
3.2. 구단 프런트 시절
고교 후배인 김응룡이 해태 타이거즈 감독을 하던 당시 해태의 스카우터였다.그 뒤 김응룡이 삼성 라이온즈로 옮겨가자 같이 이동하여 스카우트 부장을 지냈고 삼성 왕조 멤버들이 대거 드래프트로 입단하게 된다. 휘하 스카우트들의 의견도 잘 존중해줬는데[7], 공교롭게도 그렇게 성기영 밑에서 경력을 잘 쌓고 삼성 스카우트팀장이 된 이성근[8]이나 최무영[9] 모두 팀장으로서는 썩 좋은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2007년 삼성에서 퇴사하였고 이후 일구회 감독을 맡는 등, 야구 원로로 활동하고 있다.
4. 여담
- 경북고 감독을 하기 전인 1970년대 초반 여자 농구 코오롱 구단에서 5년 정도 감독직을 맡은 적이 있다. 야구 감독으로는 특기할 점.
5. 관련 문서
[1] ~9월 24일[2] 1993년 9월 25일~1994년 6월 12일[3] ~6월 13일[4] 일명 과자값 사건으로 이희수 코치의 재계약을 두고 계약금을 롯데제과의 과자값에 비유해 구단에 짤렸다(...). 까자값 사건이라고도 회자된다.[5] 구단에서 86시즌 1승밖에 못 거둔 양상문을 트레이드하기 위해 정구선, 우경하, 정성만을 받고 임호균 등을 주는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대놓고 타격 보강을 위한 트레이드였으나 정구선을 제외한 나머지 두 명은 제 몫을 못해 주었고 아이러니 하게도 청보로 넘어간 양상문은 청보의 에이스가 돼 버린다.[6] 이후 1990년 김진영 감독, 2002년 우용득 감독, 2015년 이종운 감독, 2019년 양상문 감독 등이 부임 첫 해에 물러났다. 김진영, 우용득, 이종운은 해임이었고 양상문은 자진 사퇴의 탈을 쓴 사실상의 해임이었다.[7] 2002년 1차 지명자로 윤길현 대신 권혁을 뽑거나 2005년 2차 1라운드로 부상 경력으로 다들 지명을 우려했던 오승환을 지명한 것 등이 이성근의 건의에 따라 정해졌는데, 당시 스카우트팀 책임자는 성기영이었다.[8] 2008년부터 2011년까지, 2015년부터 2016년까지 스카우트팀장으로 재직. 스카우트 시절 자신이 건의했던 오승환의 성공 사례에서 뭔가 꽂혔는지 이후 신장과 상관 없이 상체가 잘 발달된 선수들을 선호했는데, 2016년 1차 지명자로 다른 스카우트들이 최충연을 지명하자 한 것과 달리 혼자서 김승현의 1차 지명을 주장했다가 결국에는 자신의 의견을 굽혔고 김승현은 부상에 유급 경력 때문에 2차 1라운드 때 삼성 순번까지 밀렸다. 2017년 2차 1라운드로 최지광을 지명했는데, 당시 최지광은 지명 이전까지 작은 신장 때문에 5라운드 이내에 지명받는 게 목표라고 했을 정도였다. 2017년 신인 드래프트 이후 2016년 말 안현호 단장이 경질되면서 그 여파로 같이 해직됐다.[9] 2012년부터 2014년까지, 2018년부터 2022년까지 스카우트팀장으로 재직. 스카우트 팀원으로서 2000년 1차 지명자로 장준관 대신 배영수 지명을 관철한 일화가 있으나, 스카우트팀장으로서는 소위 홍대픽을 남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나 전임자 이성근이 해직된 것과 달리 최무영은 당시 단장인 홍준학의 비호 아래 정년퇴임하면서 삼성 팬들의 분노를 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