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스터리츠 전투 | ||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의 일부 | ||
시기 | 1805년 12월 2일 | |
장소 | 오스트리아 제국 모라바 아우스터리츠 | |
원인 | 영국에 대한 나폴레옹의 전략적 목표 실패와 새로운 전략적 목표로 인한 오스트리아 진공, 울름 전역 대패에 대한 오스트리아-러시아 제국 연합의 반격 | |
교전 세력 | 프랑스 제국 | 오스트리아 제국 러시아 제국 |
최고 지휘관 | 나폴레옹 1세 | 프란츠 1세 알렉산드르 1세 |
병력 | 75,000여 명 | 85,000여 명 |
피해 | 사상자 8,200여 명 장비, 물자 피해 경미 | 사상자 15,000여 명 포로 12,000여 명 중포 180여문 손실 |
결과 | 나폴레옹과 프랑스군의 압도적인 승리 | |
영향 |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와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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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병사들이여, 짐은 그대들에게 만족하노라.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그대들은 짐이 기대했던 대담한 용맹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그대들은 불멸의 영광으로 그대들의 독수리 훈장을 장식했다. 그대들은 오늘 단 하루만에 러시아 제국 근위대의 군기를 포함한 40개의 깃발과 120문의 대포, 20명의 장군을 포함한 3만 명이 넘는 포로들이라는 영원히 빛날 전과를 올렸다.
"병사들이여, 짐의 민중들은 그대들을 기쁘게 맞이할 것이다. 그대들이 '나는 아우스터리츠의 전장에 있었다.'고 말하기만 하면 프랑스의 민중들은 '보라, 여기 진정한 용사가 있다.'라고 말하리라."
아우스터리츠 전투 직후 나폴레옹의 훈시.
(영어) Battle of Austerlitz"병사들이여, 짐의 민중들은 그대들을 기쁘게 맞이할 것이다. 그대들이 '나는 아우스터리츠의 전장에 있었다.'고 말하기만 하면 프랑스의 민중들은 '보라, 여기 진정한 용사가 있다.'라고 말하리라."
아우스터리츠 전투 직후 나폴레옹의 훈시.
(프랑스어) Bataille d'Austerlitz
(독일어) Schlacht bei Austerlitz
1805년 12월 2일, 오스트리아 제국의 보헤미아 왕국 산하 모라바 지역에 위치한 아우스터리츠[3]에서 벌어진 프랑스 제1제국과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 간의 결전. 프랑스 제1제국의 나폴레옹 1세, 오스트리아 제국의 프란츠 1세, 러시아 제국의 알렉산드르 1세가 모두 참여해서 3제(三帝) 회전이라고도 한다.[4]
오스트리아 전쟁을 종식시키고,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을 와해시킨 전투이며 동시에 나폴레옹 전쟁 기간 동안 나폴레옹이 보여준 최고 수준의 전술적 재능이 빛난 전투였다. 나폴레옹 본인 및 프랑스 제1제국에게 있어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이었으며, 그의 적들에게 도대체 어떻게 해야 나폴레옹을 이길 수 있냐는 절망을 안겨준 전투.
2. 배경
1805년 당시 나폴레옹의 원래 전략적 목표는 영국에 상륙한 후 런던을 정복하고 대프랑스 동맹의 맹주 역할을 하던 영국한테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었으나, 피에르 빌뇌브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해군이 영국 해군에 쫓겨 카디스 만에 고립되면서 나폴레옹의 영국 상륙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전쟁 수행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전략적 목표가 시작도 못해보고 대실패로 돌아간 상황에서 나폴레옹은 기민하게도 즉시 새로운 전략적 목표를 수립했다. 즉, 대프랑스 동맹의 맹주는 영국이지만 실제 대륙에서 프랑스에 주도적으로 맞서는 역할은 오스트리아 제국이 맡고 있으니, 오스트리아를 두들겨패고 동맹에서 이탈시키면 지상전에 제약이 큰 영국으로선 대프랑스 동맹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하에 전격적인 오스트리아 공격을 개시한 것이다.
이때 오스트리아 제국군은 단독으로 프랑스를 이기기 어렵다 판단하고, 동방의 강대국 러시아 제국과 손잡고 프랑스와 그 동맹국을 공격한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전격적인 기동으로 울름 전역에서 오스트리아군 주력 4만이 궤멸되고 포로로 잡히는 대참패를 겪는다. 이 시점에서 오스트리아군의 잔여 병력은 얼마 되지 않았고, 결국 나폴레옹은 수도 빈에 무혈입성한다.
프란츠 2세는 잔여 병력과 함께 도망쳐서 알렉산드르 1세가 직접 이끄는 러시아 제국군과 합류했다. 나폴레옹은 남아있는 오스트리아군 잔당과 러시아군 연합을 무너뜨려야만 끝이 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러시아 또한 나폴레옹만 박살내면 프랑스 제1제국이 무너질 것이라 판단하며 전투에 돌입했다.
3. 전투 직전
전반적인 전장 환경은 프랑스군에게 매우 불리했다. 프랑스에서 이제는 진짜 이름만 남은 신성 로마 제국 한복판도 아니고, 그 너머 오스트리아까지의 거리는 굉장히 길었다. 단기 결전으로 한번에 적을 꺾지 못하면 그대로 보급이 말라 무너질 판. 심지어 이미 11~12월에 진입해 초겨울이 찾아온 상황이라 여기서 결판을 짓지 못하면 철군 말곤 답이 없는 상황.그러나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이라고 마냥 유리한 건 아니었다. 오스트리아군이 울름 전역에서의 참패하는 바람에 오스트리아의 주력군은 날아가버렸기에 이들도 사실상 남은 전력은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원정군인 러시아군 뿐이었다.
이러한 이유와, 그동안 나폴레옹에게 신나게 두들겨터진 경험을 바탕으로 프란츠 2세와 오스트리아 측 장군들은 요새에 들어가 농성하는 지연전을 제안했다. 문제는 오스트리아군이 거의 소멸하다시피한 상황에서 그들의 발언은 영향력이 극히 미미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빈이 함락되면서 역시 원정군인 러시아군에 대한 보급 지원도 순탄치 않았던 탓에 러시아 측은 보급 다 떨어지기 전에 단기 결전으로 결판 짓기를 주장했고 결국 러시아의 주장이 관철되었다. 나폴레옹의 프랑스군과 처음으로 제대로 부딪쳐보는 러시아는[5] 나폴레옹의 전술적 천재성을 오스트리아의 허풍 정도로 치부하고 있었고, 혈기 넘치는 젊은 차르 알렉산드르 1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총사령관 미하일 쿠투조프는 더 후퇴하여 곧 합세할 프로이센 왕국의 증원군을 기다릴 것을 주장했다. 쿠투조프의 말을 들었더라면 프랑스군은 보급 고갈을 감당할 수가 없을 것이므로, 프로이센 왕국군이 도착하면 제 아무리 나폴레옹이라도 철군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패배해 프랑스가 제해권을 반영구적으로 상실하면서 프랑스 내부의 분위기도 흉흉하여 나폴레옹이 철군할 경우 한동안 프랑스 내부의 혼란을 정리하느라 힘을 쓰지 못할 상황이었기 때문의 쿠투조프의 주장은 타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제 아무리 공작위를 가진 고위 귀족인 쿠투조프가 후퇴를 간언해도, 전공에 혈안이 난 알렉산드르 1세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6] 차르의 권위가 절대적인 러시아에서 차르가 싸우자는데 귀족들이 막아봐야 답이 없는 상황. 게다가, 프랑스군의 배치 상태가 이곳 저곳에 흩어져 있어 제대로 집결하는데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릴 상황인 것이 주전파에게 더욱 힘을 실어주었다.
특히, 다부가 이끄는 3군단이 아직 전장에 합류하지 못한 상태였는데 이것은 마치 하늘이 내린 기적의 기회로 보였다. 러시아군이 보기엔 3군단이 전장에 합류하면 전투에서 이길 가망이 없었기에, 프랑스군을 공격한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오판이 있었는데, 3군단의 병력은 단 5천여 명으로 여단 5개 규모였던지라 애초에 별 영향력이 없는 합류하나 마나인 수준이었던 것.
한편, 프랑스군 입장에서도 전술하였듯 상황은 썩 달갑지 않았는데, 어찌되었든 러시아군의 병력이 상당하고, 프랑스군의 배치 상태는 군단인 척 하는 단 5개 여단 규모 병력인 3군단이 빠져있는 것을 감안해도, 전반적으로 엉망인 상황인건 사실이었으며, 겨울이 다가온 상황이라 여기서 조금만 틀어져도 철군은 커녕 궤멸 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일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프랑스군에서도 전투 직전까지 나폴레옹 휘하 장군들이 전술적 불리함을 주장하며 철군을 제안하고자 했다. 장드디외 술트와 조아킴 뮈라, 장 란 세 원수가 철수를 제안하기로 하고 대표로 장 란이 나폴레옹과 면담하여 철수를 제안했으나 나폴레옹은 이를 거부했다.
나폴레옹으로써도 울름 전역에서 대승을 거뒀음에도 트라팔가르 해전 패배라는 치명적인 악재로 인해 울름 전역의 승리가 말짱 도루묵이 된 상태라 이대로 철군했다간 본국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감당이 될리가 없는 입장인데다가, 지금 철군했다가 프로이센 왕국이 참전해버리는 순간 제해권을 상실한 상태로 육상에서도 위기에 처하는 최악의 실패로 향할 판이었기에 결전을 시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란, 뮈라와 함께 철수를 제안하기로 한 술트가 갑자기 우리 4군단은 폐하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우고 적을 쳐부술 것입니다, 황제 폐하 만세!라며 뒤통수를 쳐서 란의 분노를 사 결투 신청을 받기도 했다.
이때 프랑스군의 전력 및 편제는 다음과 같았다.
* 총지휘관 나폴레옹 1세
- 총병력 72,200명 / 중포 151문
* 제국 근위대 : 지휘관 나폴레옹 1세, 실질 지휘관 장바티스트 베시에르- 병력 5,500명 / 중포 24문
* 1군단 : 장바티스트 베르나도트- 병력 13,000명 / 중포 24문
* 3군단 : 루이니콜라 다부 - 전투 당일 오전에 합류했다.- 4,300명(이중 기병 830명) / 중포 12문
* 4군단 : 장드디외 술트- 23,600명 / 중포 35문
* 5군단 : 장 란- 12,700명 / 중포 20문
* 척탄병사단 : 니콜라 우디노- 5,700명
* 기병대 : 조아킴 뮈라- 7,400명 / 중포 36문
한편 이에 맞서는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의 의사 결정권은 사실상 러시아군, 특히 알렉산드르 1세에게 넘어가 있었다. 쿠투조프는 일부 오스트리아군 지휘관들과 함께 결전 회피를 제안했으나 알렉산드르 1세에게 밟히고 숙소에 짱박혀 버렸다. 거기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결전의도를 숨기고자 사신을 보내 휴전을 제안하는 기만책을 치고 있었다.
이러던 와중, 연합군 지휘관들은 주전장 아우스터리츠에서 가장 중요한 전술적 요지인 프라첸 고지를 프랑스군이 선점하지 않고 방치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오스트리아 및 러시아 지휘관들은 아니, 그 나폴레옹이 저런 결정적 실수를? 등의 반응을 보이며 프랑스군이 범한 결정적 실수를 놓치지 않고 12월 1일 프라첸 고지를 선점했다.
그런데 이것은, 해당 지역을 제대로 정찰하지 않은 동맹군의 치명적인 오판이었다. 프라첸 고지는 언제까지나 주변에 비해 뜬금 없이 툭 튀어 올라온 지형이라 고지였고, 높이는 고작 12m였는데다, 주변에 둘러싸여 고립된 지형이었다. 그러니까, 올라가서 아래를 향해 공격하며 농성하기에는 적절해도, 정작 거기서 나와서 진격하기에는 아주 많은 하자가 있는 계륵 같은 지형이었던 것이다. 이런 자연적 축성물 노릇을 하는 지형은 적의 기동을 방해할 때 의미가 있는데, 이 지형은 적이 지나가지 못하게 하는데만 유리했지 적의 기동을 강제할 수는 없었다.
결정적으로 3군단의 증원을 기다리며 고립되어 있는 병력이 따로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고지는 거기서 한참 멀었다. 12m 높이에서 포격을 날려봐야 제대로 닿지도 않는 것이다. 이 병력을 방치하면 당연히 이들이 고지를 우회해 기동하여 아주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우려가 있었다. 그러니, 고립된 병력을 공격하는데 하등 도움이 되지 않고, 단지 프랑스군 주력이 주둔한 위치에서 그들이 내려오는 것을 방해하기에만 유리한 지형은 기동에 있어 해로운 점만 가득했다.
그렇다고 문제의 고지를 방치하면 프랑스군 주력이 내려와서 고지를 점거하여 동맹군에게 아주 훌륭한 포병 볼링 맛을 보여줄 판이었다. 그러니 해당 고지를 점령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이 고지는 고립된 병력을 위한 아주 훌륭한 원거리 요새 노릇을 해준 것이다.
결국 이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확보한 최고의 입지는 고립된 병력이라는 기동 방해물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해, 문제의 12m 고지는 반드시 점령해야만 하는데 가치는 없는 아주 훌륭한 자연 길막 지형으로 작용했다. 즉, 동맹군은 좋던 싫던 고립된 병력과 12m 고지를 동시에 공략해야하는 2중 전선을 강요당했다. 즉, 그들의 병력은 반토막 난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당시 동맹군 배치 상황 상, 해당 고지에 틀어박혀 참호를 파든 벽을 치든 하더라도, 그대로 거기에 고립되어 포위당한다는 것이었다. 12m 높이는 포병의 포격 각을 매우 크게 방해하므로 분명 이점이 있지만, 그건 당장 누가 지원을 올 수 있을 때나 의미가 있는 이야기. 이미 빈이 함락된 상태였기에 나폴레옹 입장에서는 그냥 돌아서 가면 된다.
여기에 더해 더 심각한
그나마 저 멀리서 1만 3천여명 규모의 예비 병력이 있는 상황이었기에, 고지를 점거후 축성물을 쌓으면서 프랑스군의 발을 묶고, 해당 병력이 도로를 막아버리면 이기진 못해도, 어떻게든 패배는 면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동맹군은 고지를 점령후 프랑스군을 공격한다는 최악의 선택지를 골라버렸다.
전투 전날인 12월 1일 오후 6시의 전장 배치도. 연합군 주력이 중앙 고지대를 점령하고 있다(출처 : 위키피디아).
중앙 고지대를 점령한 연합군은 곧 프랑스군의 우익이 본대에서 남쪽으로 너무 떨어져서 텔니츠와 조콜니츠 방면에 배치되어 있고, 숫자도 빈약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연합군이 만약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서 프랑스군의 우익을 격파할 수 있다면, 이후에 크게 배후로 돌아가서 프랑스군 주력의 뒷통수를 맛깔나게 후려칠 수 있을 형국이었고, 그 사이 중앙의 고지대는 지형적 이점을 살려서 프랑스군의 주공을 상대로 굳건히 버틸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뿐만 아니라 안그래도 연합군은 남쪽으로 빈과 연결되는 길을 확보하기 위해 남쪽으로 충분한 병력을 배치할 필요가 있던 터였다. 상황이 완벽하게 돌아가자 승리에 대한 행복회로를 돌린 연합군은 다음날인 12월 2일 아침 일찍 프랑스군의 우익을 급습하기로 결정하였다.
4. 전투 경과
하지만 그게 다 나폴레옹의 큰 그림이었다. 나폴레옹의 계획은 프라첸 고지를 점령한 연합군이 신나게 남쪽으로 밀고 내려와 프랑스군의 우익을 찌를 때, 곧바로 중앙을 공격해 적을 분단시킨 뒤 포위 섬멸하는 것이었다. 프랑스군의 우익은 숫적으로 빈약해 보였지만 사실은 방어에 유리한 지형지물이 많았다. 덤불이나 나무, 개울, 수로 등이 존재해서 방어에 유리했으며, 텔니츠와 조콜니츠는 각각 마을과 작은 성이었다. 프랑스군은 이러한 엄폐물을 잘 활용할 수 있도록 사격에 뛰어난 경보병과 이를 지원할 일부 보병과 포병들을 배치하여 방어 태세를 갖추어 놓았다. 이 때문에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이 대형을 맞춰 질서 정연하게 공격하기가 힘들었고, 결국 수적 이점을 살리기도 힘들었다. 뿐만 아니라 연합군이 미처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정보가 있었는데, 다부의 증원군이 남쪽에서 강행군을 하며 접근해오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프랑스군의 우익이 전투 초반만 버텨준다면 다부 군단이 적절한 시간에 도착해서 구원을 해줄 수 있었다.문제는 연합군의 진격이 혼선을 빚으면서(...)[7] 이 계획이 엎어질 뻔했다. 어쨌거나 연합군은 텔니츠와 조콜니츠 방면에서 프랑스군을 향해 진격했고, 반담과 생틸레르 휘하의 프랑스 사단은 저지대에 드리워진 연무에 몸을 맡기고 잠복 중이었다.
오전 8시경, 연합군의 첫 번째 종대 병력이 텔니츠 마을을 공격했고, 이 지역을 방어하던 프랑스 3 보병 연대를 수차례 반복 돌격 끝에 기어이 밀어내고 3연대를 골드바흐 강쪽으로 쫓아냈다. 그러자 이 작전의 핵심이 기동력에 달렸다는 것을 간파한 다부의 3군단은 이틀에 걸쳐 110km를 주파해 빈에서부터 급속행군으로 전장에 도착한 후, 1개 여단을 이끌고 텔니츠의 연합군을 간단히 밀어냈고, 마을 반대편까지 뚫고 들어가다가 오스트리아 경기병에게 반격당하는 바람에 상황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연합군은 다시금 텔니츠를 점령했지만, 프랑스 포병대의 포격이 마을 입구를 뒤덮는 바람에 진격이 멈췄다.
그곳으로부터 조금 위에 있는 조콜니츠에서는 연합군 두 번째 종대가 첫 번째 돌격을 감행했다가 프랑스군 26 경보병 연대, 코르시카 저격병 연대와 이탈리아 저격병 연대에게 학살당했다. 이에 격분한 랑제론 장군[8]은 포병대로 마을에 직접 포격을 가한 뒤 세 번째 종대를 전진시켜 마침내 경보병들을 도시에서 밀어냈다. 프랑스군은 후퇴하는가 싶더니 곧바로 전열을 재정비하고 반격해 러시아군을 물리치고 마을을 재점령했다. 하지만 러시아군이 반격하여 다시 조콜니츠를 점령당한다. 그렇게 연합군은 조콜니츠를 확실하게 점령하나 했으나, 다른 프랑스군 부대가 반격해서 다시 조콜니츠를 점령했다. 이후 계속 조콜니츠에서 난전이 벌어졌지만, 프리앙의 공격 이후 프랑스군은 조콜니츠를 완벽히 사수했고, 연합군 예비대 대다수가 이곳에서 증발하면서 전황은 나폴레옹의 계획대로 흘러가게 되었다.[9]
그리고, 12월 2일의 아침 8시 45분경, 프랑스군이 전투의 승패를 결정짓게 될 반격을 시작하였다.
오전 8시 반에 술트를 부른 나폴레옹은 저 고지 꼭대기까지 올라가려면 얼마나 시간이 필요하겠는지 물었고, 술트는 20분이면 충분하다고 대답했다. 대답에 만족한 나폴레옹은 15분 뒤 공격을 개시하라고 지시했다. 그렇게 생틸레르의 사단이 프라첸 고지로 진격했고, 쿠투조프는 나폴레옹의 전술을 눈치채고 연합군의 분단을 막으려 프라첸 고지를 향해 전력을 쏟아부었지만 기껏해야 한번에 3개 대대만 동원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이 고지에서 프랑스군과 그 2배에 달하는 연합군이 박터지는 싸움을 벌인 끝에 연합군의 네 번째 종대는 증발하면서 연합군은 꿈도 희망도 잃은 상태에서 체념하는 듯 했지만, 여기서 또 다른 연합군 병력이 나타났다. 조콜니츠로 돌격을 감행했던 두 번째 종대의 일부 병력[10]이 어처구니없는 행군 명령 때문에 낙오했다가 곧바로 돌격해서 난전을 벌인 것이다. 그들은 지친 프랑스군을 밀어내는 듯 했지만 탄약을 소진한 프랑스군의 총검 돌격 앞에 여름철 이슬마냥 증발해버렸고, 프랑스군은 그렇게 연합군의 중앙을 돌파하는데 성공했다.
한편 북쪽에서는 반담이 술트의 또 다른 사단을 이끌고 프라첸 고지 북쪽에 우뚝 솟은 슈타레 비노흐라디를 향해 돌격했다. 그의 부대는 연합군 첫 번째 부대를 코앞에서 산탄을 날리는 방식으로 제압하고 5개 대대에 달하던 두 번째 부대도 파괴적인 근거리 포격전 끝에 물리치며 마침내 프라첸 고지의 양쪽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러시아군의 남은 예비대라고는 근위대뿐이었는데, 콘스탄틴 대공은 근위대 보병들을 이끌고 프라첸 고지를 기어올라 1개 대대를 밀어내다가 두 번째 대대의 사격에 격퇴당했고, 다음 이어진 공격의 주축을 맡은 근위 중기병 연대가 탈진한 보병진을 갈아엎으며 프랑스 4연대의 1개 대대를 박살내고 독수리기를 탈취했다.
이를 확인한 나폴레옹이 곧바로 근위 기마 샤쇠르(엽기병) 연대와 기마 척탄병 연대를 출격시킨다. 이에 맞서 콘스탄틴은 카자크 기병대와 근위 기병대를 투입하였고, 나폴레옹이 자신의 경호 대대까지 쏟아부었음에도 수적 우세를 굳건히 하며 혈투를 벌였다.
어쨌든 전투는 연합군 쪽으로 기울고 연합군의 수적 우세가 힘을 발휘하는듯 했지만, 이미 승기는 프랑스군에게 넘어가 있었다. 연합군의 예비병력은 고갈된 상태였지만, 프랑스군의 예비병력은 충분한 전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 바티스트 드루에의 프랑스 2사단이 체커 대형으로 러시아군의 옆구리를 찔러 러시아군의 반격을 꺾고 프랑스 기병대를 구원했다. 뒤이어 근위 기마 포병대가 방열을 마치고 러시아 기병들을 향해 산탄을 퍼붓자 러시아 기병대는 말머리를 돌렸는데, 마침 프랑스 기병대가 역습을 하려던 시점에 근위대 보병들 사이로 도망치며 대형을 흩뜨려놓는 엄청난 트롤링을 저질렀다. 눈앞에서 벌어진 절호의 기회에 프랑스 기병들은 그 일대를 무인지경으로 내달리며 마음껏 러시아군을 도륙했다.
그렇게 연합군 중앙이 증발하는 동안, 북쪽에서는 리히텐슈타인의 러시아 중기병대가 켈레르만의 경기병 사단을 향해 돌격했다. 켈레르만은 압도적인 적을 맞아 선전을 벌이다가 중과부적으로 밀려, 뒤를 봐주던 아군 보병의 배후로 물러났다. 다만 러시아 기병대가 했던 것처럼 보병들의 진형을 가르며 그 사이로 도망치는 병크는 저지르지 않았다. 뒤이어 투입된 2개 흉갑 기병 사단이 남은 러시아 중기병대를 쫓아내며 북쪽에서도 상황이 종료되었다.
한편 상황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아무런 명령도 받지 못한 바그라티온은 마침내 프라첸 고지 북쪽에서 란의 전선을 감싸기로 하며 엽병 연대에 측면 우회를 명령했지만, 프랑스 17 경보병 연대와 노획당한 오스트리아군 경포가 뱉어내는 가공할 화력 앞에 궤멸당하고 후방으로 패주했다. 이득을 본 란은 반격했지만 러시아 포병대에게 격퇴당했고, 군단 포병대를 동원해 대 포병전을 감행한 끝에 엄청난 피해를 입으며 러시아 포병들을 물리쳤다. 곧바로 기병대와 함께 전장으로 달려든 란은 바그라티온을 쫓아내며 패주하는 러시아군을 추격하려 했지만, 뮈라의 명령 때문에 추격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러시아군 핵심 병력이 생존하게 되는 계기를 제공했다.
동시에 남쪽에서는 죽어라 싸운 끝에 조콜니츠 성곽에 겨우 발을 걸칠 수 있었던 러시아군이 서쪽과 북쪽에서 공격을 받은 끝에 전멸했고, 남은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돌격한 오라일리 기병 연대가[11] 프랑스 5개 용기병 연대를 물리치며 선전했지만, 그들 역시 프랑스군 포병의 가공할 화력에 무너져내리면서 전투는 종료되었다.[12]
12월 2일 오전 9시의 전장 배치도. 연합군 좌익의 공세는 저지되었고 전선 중앙의 프라첸 고지로 술트의 부대가 공세를 펼치고 있다.
그 와중에 프랑스군 우익 공세에 투입되었다 마지막 돌격을 당한 연합군 좌익은 퇴로가 막혀 남쪽의 얼어붙은 사츠칸 호수를 통해 도망쳤는데, 나폴레옹은 이를 바라보다가 포병대에게 "적병이 아니라 호수 표면을 노려라!" 라며 호수를 향해 포격할 것을 지시했다. 그 결과 얼어붙은 얼음이 포격으로 깨지면서 도망치던 연합군 다수가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13]
12월 2일 오후 2시, 전투 종결 시점의 전장 배치도. 전열을 유지한 연합군 부대는 전무하며 프랑스군의 거센 추격이 이어지고 있다.
5. 결과 및 영향
"우리는 거인의 손 안에 있는 난쟁이들이다."
아우스터리츠 전투 이후 대불동맹이 처한 상황에 대한 차르 알렉산드르 1세의 말
프랑스군은 총 투입병력 72,000명 중 전사자 1,305명, 부상자 6,940명의 경미한 피해를 입은 반면, 연합군은 총 투입병력 85,000명 중 사상자만 최소 15,000명 이상에 약 12,000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보유하고 있던 120여 문의 중포를 모조리 노획당했다. 당장 가장 중요한 전리품으로 취급받는 군기만 해도 프랑스군은 1기를 잃었지만 대신 50기에 달하는 연합군 군기를 노획했다.아우스터리츠 전투 이후 대불동맹이 처한 상황에 대한 차르 알렉산드르 1세의 말
이런 수치상 결과 외에도 연합군은 잔존 병력을 거의 수습하지 못하여, 남은 병력으로 다시 한 번 싸워볼 기회조차 가지지 못했다. 설령 병력을 수습했다 하더라도 중포를 모조리 빼앗기고 기병대가 궤멸당해서 사실상 보병만으로 싸워야 하는 데 그랬다간 백전백패인지라 아무 의미 없었다.
이는 연합군 지도부의 전쟁수행의지를 날려먹기에 충분했다. 프란츠 2세는 수도 빈과 주력부대까지 날려먹은 상태에서 러시아군까지 패퇴하자 멘붕에 빠져버렸고, 나폴레옹을 과소평가하던 알렉산드르 1세와 러시아군은 처음으로 나폴레옹과 그의 대육군(그랑 다르메)을 상대하며 제대로 쓴 맛을 보고 이후의 대프랑스 전략을 수정한다.
결국 러시아는 일시적으로 대프랑스 동맹에서 이탈했으며, 오스트리아는 아우스터리츠 전투 이틀 후인 12월 4일 나폴레옹에게 휴전을 제의했다. 마리아 테레사 황후는 프란츠 황제에게 편지를 써서 다시는 남편을 보지 못할까 두려우니 절대로 국가나 황제 자신에게 해가 될 일을 하지 말라고 간청하면서, 자신이 프랑스군의 포로가 되지 않게 해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프란츠 황제는 나폴레옹과 직접 대면하였고, 생각보다 예의 바른 나폴레옹의 모습에 생각보다 큰 감명을 받은 모양인데 황후에게 보낸 편지에게 나폴레옹과의 만남이 상당히 괜찮았다고 하면서 그가 프랑스인이 아님이 분명(...)하다고 평가했다.
오스트리아는 12월 27일 프레스부르크(브라티슬라바)에서 프랑스와 평화조약을 맺어 캄포포르미오 조약과 뤼네빌 조약으로 프랑스가 획득한 모든 영토의 지배권을 인정하고 베네치아를 프랑스의 괴뢰국 이탈리아 왕국에 할양하며, 프랑스의 똘마니인 바덴, 뷔르템베르크, 바이에른에게도 추가로 영토를 할양하고, 배상금 4,000만 프랑을 지불했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이 배상금으로 아우스터리츠 전투 참전용사들에게 인당 200프랑을 포상으로 뿌리고 유족과 부상자들에게도 연금과 위로금을 지급했다.
이로써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로 촉발된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은 완전히 와해되었다. 유럽의 전통적 강대국으로 프랑스와 자웅을 겨루던 오스트리아는 더 이상 힘이 남아있지 않았고, 1806년 라인 연방을 프랑스가 설립하자 천년의 역사를 가진 신성 로마 제국을 해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러시아는 잔뜩 움츠러들었으며, 참전을 고려하던 프로이센은 즉시 군사를 거두고 침묵했다.[14] 그리고 대프랑스 동맹을 주도한 영국은 트라팔가르 해전의 승리가 빛이 바래면서 내각이 교체되었다. 특히 영국의 해군력과 로스차일드의 자금력으로 나폴레옹을 무너뜨리려 무던히 힘을 썼던 영국 수상 소(小) 윌리엄 피트는 이 전투 소식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안 그래도 피트는 격무로 인한 피로와 스트레스, 앉은 자리에서 포트 와인을 3병 이상 마시는 등 과음으로 인해 몸이 많이 망가진 상태였는데 이 소식으로 인해 결정적으로 심신이 무너졌다. 결국 피트는 "지도를 말아두게. 앞으로 10년 정도는 지도 따윈 필요없을 거야(Roll up that map; it will not be wanted these ten years)."라는 말을 남기고 저승으로 호적을 이전했다.[15]
6. 의의
후대 전사가들은 나폴레옹이 치른 수많은 전투 가운데 가장 위대한 전투로 아우스터리츠를 가장 많이 고른다. 그만큼 전술적으로 완벽한 전투인데, 전장지형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자신의 의도를 숨기며 적이 패배의 길이라는 것도 모르는 채 자신이 의도하는 대로 움직이게 유도하는데 성공하고, 보병, 포병, 기병 3개의 군종을 적절하게 운용하여 최고의 효율성을 보여준데다, 휘하 원수들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곳으로 적재적소로 투입시켜 완벽한 타이밍의 공격으로 말 그대로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완벽이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다. 만약 1815년의 나폴레옹이 이때와 똑같았다면 워털루 전투쯤은 껌도 아닐 거라는 소리도 있다(…).[16]거기다 유리한 점이 있었냐 하면 없었고 오히려 상당히 불리했다. 전략적으로는 전 유럽이 적이었고, 울름 전역에서 오스트리아군 주력을 박살내버렸지만 트라팔가르 해전의 패전으로 빛이 바랬고 적지 가운데 고립된 상황이었다. 전술적으로는 울름 전역에서 승리했지만 그걸 유용하게 쓰기 어렵게 된 상황에서 프로이센이 참전을 고려했고, 장기 원정으로 지친 상태에 앞에는 싱싱한 러시아군이 버티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철수하는 게 당연했고 부하들도 철수하자는데 동의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결전을 걸어버린 것도 모자라서 전장 한가운데 있는 고지를 적에게 미끼로 내주는 작전을 짠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고지 점령은 상식 중의 상식이고, 전장에 먼저 와서 고지를 적에게 내준다는 발상 자체가 미친 짓이었다. 거기다 포병의 운용을 위해서라도 관측용 고지 확보가 필수인데 그것마저도 무시한 작전이었다. 상식적으로 보면 전략적, 전술적으로 지는 게 당연한 상황인데 나폴레옹은 이겼다.
진짜 흠잡을 곳이 없는 전투여서 일부 전사가들은 오히려 여기서 나폴레옹의 몰락이 시작된다는 의견도 제시한다. 아우스터리츠에서 너무나 완벽하게 이겨서, 군사적인 방면에서는 적수가 없다는 생각에 빠져들어서 이후의 대외정책에서 외교보다는 군사적 해결책에만 매달리게 된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이케다 리요코의 에로이카에서는 부하 장군들이 이대로 러시아군을 멀쩡히 보내주면 나중에 철저하게 준비해서 쳐들어올 것이니 끝까지 쫓아가서 박살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나폴레옹은 껄껄 웃으며 무시하는데... 러시아 원정 후에 결국 진짜 그렇게 되어버린다.
파리 오스테를리츠역은 이 전투의 승리를 기념해 만들어진 역이다.
7. 미디어
나폴레옹의 생애를 다룬 프랑스의 4부작 드라마 <나폴레옹>(2002)에서 묘사된 아우스터리츠 전투. 2부에서 나온다.
1960년작 영화 아우스터리츠가 바로 이 전투를 그리고 있다. 정확히는 영화의 전반부는 나폴레옹의 대관식과 뒤이은 정치적 환경을, 후반부가 아우스터리츠 전투를 보여주는데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아우스터리츠 전투를 다루는 유일한 영화로 남아 있다. 나폴레옹 전쟁을 다루는 영화 중 워털루가 흥행에 참패한 이후로 나폴레옹 전쟁의 영화화는 거의 금기시되고 있기 때문.
2023년에 개봉한 리들리 스콧 감독의 전기 영화에서도 등장한다. 작중에서는 러닝타임 문제로 프랑스군이 연합군을 매복해 포위 섬멸하는 부분만 등장하며, 막판에 빙판을 쏴 적들을 수장시키는 부분은 장엄함과 전쟁의 잔혹함을 드러내는 명장면 중 하나다.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의 역작 '전쟁과 평화'에서도 중요한 에피소드로 다뤄지는데, 이 소설을 영화화한 1967년작 소련 영화에서도 수만 명에 달하는 엑스트라가 동원되어 아우스터리츠 전투를 묘사했다.
일본의 하세가와 테츠야가 연재한 만화 진정남 나폴레옹에서 1권의 핵심 에피소드로 등장한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에서는 프랑스 진영이 공격받을때 나폴레옹의 대사에서 이 전투를 언급한다.
테메레르 시리즈에서도 2권에서 이 전투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상당히 중요한 전투였던지라 이 전투 결과로 인한 영국의회의 혼돈과 당시 영국 주식시장이 폭락하는 등 그 여파를 언급한다.[17] 여기서는 엘렌데일 경의 정치적 후원자인 윌리엄 피트 수상이 이 전투 결과에 대한 충격으로 앓아눕다가 사망했단 언급을 듣는다. 이후 3권에서 로렌스 일행이 오스만 제국에서 오스트리아로 넘어간 직후 그곳에 있던 오스트리아 장교의 입에서 한 번 더 언급되었다.
[1] 프랑스의 장 랍(Jean Rapp) 장군(가운데 팔을 뒤로 뻗고 손목에 부러진 세이버를 감고 있는 사람)이 포로로 잡은 러시아의 볼콘스키 대공(흰 제복에 딴 곳을 보고 있는 사람)을 나폴레옹에게 데려와서 설명중인 그림이다. 장 랍 장군은 이날 맘루크를 비롯한 프랑스의 정예 기병대를 이끌고 강력한 러시아의 기병대를 격파했다.[2] 해당 그림은 프랑스의 화가 프랑수아 제라드가 (François Gérard) 1810년 유화로 그린 아우스터리츠 전투의 기록화다. 그림에는 프랑스의 원수인 장 란과 자주 헷갈리는 장 랍이 중심 인물로 등장하는데 장 랍은 흔히 부관이나 참모로 번역되는 ‘aides-de camp’ 직책의 지휘관이었다. 그는 이날 나폴레옹을 곁에서 수행하는 부관임에도 직접 기병을 이끌고 돌진해 위기에 처한 중앙 공격의 활로를 열었고 러시아의 근위 기병 지휘관인 볼콘스키 대공을 포로로 잡았다.[3] 현재 체코 남모라바 주 브르노 동쪽에 위치한 슬라브코프우브르나.[4] 이것도 나름대로 상징적인 장면이라 할 수 있다. 그동안 유럽에서 황제는 기독교 세계의 수호자인 동시에 고대 로마 황제의 후계자여야 한다는 전통이 있었다. 그래서 신성 로마 제국은 가톨릭의 수호자이자 서로마 제국의 후예를, 러시아 제국은 정교회의 수호자이자 동로마 제국의 후예를 자처했다. 그런데 이러한 전통을 무시해 버리고 힘 하나만을 내세워 스스로를 황제라고 선포한 신흥 황제가 프랑스에 나타나 그들을 모두 격파해버린 것이다.[5] 알렉산드르 수보로프가 이끄는 러시아군이 프랑스 혁명전쟁에 참전해 스위스와 이탈리아 일대에서 프랑스군과 맞붙은 일이 있지만 나폴레옹과 직접 대결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6] 게다가 러시아의 동원병은 러시아 지리 특성상 고향을 떠난 후 다시는 돌아가지 못하는 입장이다. 거기에 그 많은 러시아군을 빈을 따인 오스트리아가 무한정 먹여 살리기도 곤란하여 마냥 니가와를 시전하기도 곤란했다.[7] 랑제론 백작의 군대가 진격 중에 맞닥뜨린 리히텐슈타인 대공의 기병대를 통과시키기 위해 멈춰섰다.[8] 원래는 프랑스 군인이었는데 프랑스 혁명 이후 리슐리외의 후손인 이르망 장 드 플레시와 함께 러시아에서 복무한다.[9] 지도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연합군이 효과적으로 프랑스군 우익을 공격하려면 반드시 조콜니츠와 텔니츠 방면으로 진군해야만 했다. 그런데 문제는 워털루 전투에서 휴고몽 농장에서의 영국군의 분전이 웰링턴에게 시간을 벌어주고 프랑스군의 예비대를 갉아먹은 것처럼 조콜니츠와 텔니츠도 그러했다는 점이다. 심지어 그냥 큰 농장에 건물들 몇개 있던 수준이던 워털루 전투의 휴고몽 농장과 다르게 조콜니츠와 텔니츠는 각각 작은 성과 마을이었고 이런 곳에 전열보병을 들이받은 연합군의 운명은 불보듯 뻔했으나 연합군이 공세를 이어가려면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결국 연합군이 여기서 전력 다수를 말아먹고 전투는 프랑스군의 승리로 끝났다. 전투를 계획하고 전장을 선택하는 나폴레옹이 얼마나 천재적인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10] 위에서 언급한 랑제론 백작의 부대.[11] 오스트리아 제국 내에 거주하던 폴란드인들(폴란드는 당시 나라가 분할되어서 뿔뿔이 흩어졌다)로 구성된 용기병(중기병) 연대였다. 강성한 기병전력을 보유했음에도 나폴레옹 전쟁 내내 프랑스 기병대에게 자존심을 구긴 오스트리아 기병대에 있어 헝가리 기병대와 함께 마지막 자존심을 지탱해준 용감하고 강한 기병대였다.[12] 나폴레옹은 이때 겨우 1개 중기병 연대에게, 경기병도 아니고 같은 중기병으로서, 5개나 되는 프랑스 용기병 연대가 패주한 사실에 화가 단단히 나서 용기병대들을 질책했다. 또한 오라일리 기병연대를 구성한 폴란드인들의 강한 전투력에 감명을 받았는지 포로로 잡힌 폴란드인 용기병에게 나폴레옹은 “내가 그대의 나라를 해방시켜 준 사실을 알고 있는가?” 물었고 그 폴란드인은 “잘 알고 있지만 나는 군인으로서 명령받은 대로 돌격했을 뿐”이라고 답했고 나폴레옹이 감탄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13] 얼음에 포격을 해서 연합군 다수를 차가운 물에 빠뜨려 죽였다는 것은 도시전설에 불과하단 말도 있다. 프랑스군의 포격으로 얼음이 깨진 게 아니라, 얼음 위로 말이 지나가고 대포 같은 무거운 짐을 옮기다 발생한 안전사고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물에 빠진 연합군 수천 명도 곧 프랑스군에게 구조된다. 실제로 전투가 끝나고 며칠 후 나폴레옹이 명령하여 호수의 물을 다 빼고 보니 사람의 시체는 2구 정도만 나왔고 오히려 말의 시체가 150구 정도 나왔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나폴레옹 블로거 Nasica의 글 아우스테를리츠의 태양을 참조할 것.[14] 프로이센의 사절 하우비츠 백작은 나폴레옹에게 협박에 가까운 최후 통첩문을 들고 왔지만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이었던 탓에 빈으로 쫓겨나 있었다. 그리고 아우스터리츠 전투의 결과가 전해지자 최후 통첩 서신을 찢어버리고 축하 서신을 써서 나폴레옹에게 전달했다. 그 서신을 본 나폴레옹은 "아무리 봐도 미리 써놓았다 받는 사람만 바꾼 편지로군" 이라고 신랄하게 비꼬았다.[15] 유럽 전체가 나폴레옹의 손아귀에 들어갔으니, 지도로 국경을 구분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의미. 그의 말은 어느 정도 들어맞았는데 아우스터리츠 전투 후 10년이 지나서 워털루 전투가 펼쳐지고 나폴레옹의 전설은 끝난다.[16] 만약 나폴레옹이 멀쩡하고 그의 원수들이 정정했다면 그루시가 맡았던 블뤼허 추격은 미셸 네가 맡아 더욱 유동적으로 전황을 조절했을 것이며, 영국군의 정면은 다부와 란이 맡고 거기에 뮈라가 이끄는 기병군단이 가세해 그야말로 개박살이 났을 것이다. 베르티에가 참모장인건 덤.[17] 일례로 이 전투 이전의 트라팔가르 해전에서는 해전 결과 영국의 패배로 오보가 난 바람에 당시 런던 주식시장이 완전폭락을 하는데 이때 영국에 있던 로스차일드 가문의 레이선 로스차일드가 폭락된 주식을 신속하게 사들여서 영국 주식시장의 큰손으로 성장하여 영국에 정착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헌데 트라팔가르 해전이 일어난지 얼마 안된 상황에 이런 충격적인 소식이 오보가 아닌 진짜 속보로 들리니 이번 폭락의 규모는 트라팔가르의 그것을 아득하게 뛰어넘었다고 한다. 심지어 트라팔가 전투의 오보로 때돈을 번 네이선 로스차일드도 이 전투의 소식으로 벌어들인 주식의 상당수가 파산이나서 템스강 수온을 잠깐 재러갈 생각을 할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