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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29 15:01:26

울름 전투



1. 개요2. 상세

1. 개요

시기 1805년 10월 8일 ~ 10월 20일
장소 신성 로마 제국 뷔르템베르크 베르팅엔, 융잉엔, 엘힝엔, 울름
원인 영국에 대한 나폴레옹의 전략적 목표 실패와 새로운 전략적 목표로 인한 오스트리아 진공
오스트리아 제국군과 러시아 제국군의 연합시도
교전
세력
프랑스 제1제국 오스트리아 제국
최고
지휘관
나폴레옹 1세카를 마크 폰 라이버리히
병력 80,000여 명 70,000여 명
피해 경미궤멸
결과 프랑스군의 승리
영향 러시아군의 고립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식 직후 벌어진 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첫 번째 국면을 차지하는 전역이다.

당시 나폴레옹은 제2차 이탈리아 전쟁을 성황리에 마무리짓고 종신 통령에 취임해 프랑스의 사회 제도나 여러 제도를 완성시키면서 당시의 혁명군을 대육군으로 재창조하고 사단 제대를 도입하는 등 군제를 개혁했고, 그러한 조치가 처음으로 결실을 거둔 사례였다. 손자병법에서 말한 '피를 적게 흘리고 이긴 승리가 제일 좋은 승리'라는 말이 그대로 적용되는 전투이다.

2. 상세

오스트리아 제국의 카를 마크 폰 라이버리히 장군(Karl Mack von Leiberich)은 라인강 전선 유지의 관건은 독일의 슈바르츠발트의 간극을 메우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독일 중부를 중립지대로 간주했고, 그의 계획에서 가장 중요했던 지역은 바로 바이에른뷔르템베르크의 접경지대에 자리한 울름이었다. 울름을 장악하고 지켜냄으로써 러시아 제국군이 합류할 때까지 버티고 러시아군이 합류하면 나폴레옹의 군대를 격멸하는 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울름의 시가지에는 요새화된 고지대 미헬스베르크가 있었고, 마크 장군은 이를 이용하여 프랑스군에게서 도시를 지킬 수 있으리라 믿었다.

마크 장군의 첫 계획은 바이에른 국경을 넘어 오스트리아와 바이에른 연합군을 결성하고 울름 일대를 장악하는 것이었다.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2세는 팔츠-바이에른의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를 포섭하고자 했으나, 나폴레옹의 원조 약속에 넘어간 바이에른 왕국군뷔르츠부르크로 물러나 프랑스 편에 가담했다.

오스트리아 제국군이 바이에른 국경을 넘는 순간 나폴레옹 역시 움직임을 취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이미 오스트리아의 전략을 간파하고 있었고, 오스트리아의 예상대로 움직임으로써 오스트리아군을 기만하려 했다. 마크의 오스트리아군이 울름에 진을 치는 동안 기만작전을 펼치기로 한 프랑스 대육군은 우회 기동을 실시해 오스트리아군의 북쪽에서 측면을 칠 계획이었다. 그렇게 될 경우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군과 뮌헨을 지나는 보급선을 가로막을 수 있었다.

1805년 9월 25일, 프랑스군의 3군단과 6군단이 슈투트가르트로 향했으나 마크의 군대는 10월 3일에야 프랑스군이 자신의 측면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눈치챘다. 이에 따라 오스트리아군은 도나우 강을 따라 경계를 강화하고 주력은 울름에서 대기하며 경계했다. 10월 8일, 전날 도나우 강을 건넌 란의 5군단과 뮈라의 기병 예비대가 프랑스군을 저지하기 위해 달려온 프란츠 아우펜베르크 장군의 군과 마주치면서 전투가 개시되었고, 아우펜베르크의 부대는 베르팅엔에서 절반 이상이 포로로 잡히며 괴멸되었다.

이때 나폴레옹은 마크가 남쪽으로 탈출을 계획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남쪽에는 오스트리아의 요한 대공이 티롤 수비대를 이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크 장군은 오히려 북상해 다뉴브강을 건너 프랑스군의 후방을 양분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의 부대는 군츠부르크를 도하지점으로 선택했지만 시도했지만, 이곳에는 이미 네의 6군단 휘하의 3사단이 말러 장군의 지휘하에 배치되어 있었다. 10월 9일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오스트리아군은 분전했으나 결국 패퇴했다.

나폴레옹은 이제 뮈라와 네에게 서쪽으로 진군하여 울름에 대한 포위망을 굳히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네 원수는 적이 북쪽에서 활발한 움직임을 보인다는 첩보를 입수했고, 이에 북쪽에 다수의 부대를 배치할 것을 주장했으나, 뮈라 원수는 황제의 명령에 따라야한다고 거부하여 결국 피에르 뒤퐁의 사단만이 도나우 북쪽 기슭에 남게되었다.

10월 11일, 마크 장군의 오스트리아군은 울름에서 북쪽을 통해 탈출을 시도했는데, 1,000명이 안되는 지원 기병을 포함해도 5,000명에 불과한 병력을 가졌던 뒤퐁은 10,000명의 기병과 25,000명의 보병으로 이루어진 오스트리아군을 맞이하게 되었다. 하지만 뒤퐁은 과감한 판단과 공격적인 지휘로 울름 교외의 융잉엔 시가지를 장악했고, 이에 마크는 이 프랑스군이 적군의 전부가 아닌 선봉대에 불과하다고 잘못 믿게 되면서 소극적인 작전으로 일관하게 되었다. 이미 물이 오를대로 오른 프랑스 대육군은 오스트리아군의 진격을 시가전으로 격퇴했으며, 뒤퐁은 수적 열세 상황에서도 보병 전력으로 간신히 왼쪽 측면을 지켜냈다. 기병대는 오스트리아 기병에게 패배했지만, 우익의 붕괴를 막아내며 상대의 시선을 분산 시켰다. 4대 1의 수적 열세의 상황에서 뒤퐁은 1대 1 수준의 교전비를 내는 경이로운 전투력을 보였으며, 거의 자신들 병력과 맞먹는 숫자의 포로를 잡았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이미 지쳤고 피해가 컸으며 오스트리아군의 추가병력이 충원될 수 있다고 판단하여 밤새 빠르게 퇴각했다.

10월 12일 이제 나폴레옹은 예상과 달리 마크의 오스트리아군이 함정에 갇혀 여전히 울름에 있었고, 탈출의 기미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 마크는 오히려 프랑스군의 도나우 강 북쪽 보급선을 노리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이제 뮈라와 네 간의 논쟁에서 네가 옳다는 판결을 내렸고, 네의 군단으로 도나우강 북쪽 전선을 보강했다.

한편 융잉겐에서 패전한 마크는 부대를 재편하고, 부대를 4개로 나누어, 우선 슈바르첸베르크[1]에게는 울름 시가지를 사수하도록 명령하고, 옐라치치에게는 남쪽으로 내려가 티롤을 지키게 했다.[2] 그리고 다시 한번 도나우 강을 통해 탈출을 시도했다. 10월 13일 오후, 울름 밖으로 오스트리아군 2개 부대가 출격했다. 요한 리쉬 장군이 이끄는 1개 부대는 동쪽의 엘힝엔으로 향해 그곳의 다리를 장악하여 프랑스군의 도강을 막고자 했다. 이때 베르넥 장군이 이끈 다른 부대는 중포를 가지고 북으로 향했다. 리쉬는 엘힝엔 시가지에서 프랑스군 소규모 부대를 몰아냈고 방어 태세를 견고하게 하였다. 오스트리아군의 계산대로라면 프랑스군이 엘힝엔에 있을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나폴레옹과 네는 뒤퐁과의 연결을 목표로 하고 있었고, 이를 위한 최단 경로는 엘힝엔의 다리를 건너는 것이었다. 10월 14일 휘하 병력을 이끈 네는 도나우 강 남쪽으로 이동하여 엘힝엔 근처에 다다랐다. 엘힝엔은 평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마을이 있는 언덕이 있고, 이 언덕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포병을 이용해 오스트리아군의 경계 병력을 몰아낸 네 원수는 다리를 건너 진군했다. 1개 연대가 시가지를 뚫고 총검돌격으로 언덕 꼭대기에 위치한 사원을 점령했다. 사단의 나머지 병력은 평야를 가로질러 오스트리아 기병과 격돌했고, 리쉬의 보병대를 붕괴시겼다. 이 전투에서 승리를 얻은 공으로 네 원수는 엘힝엔 공작의 작위를 받았다. 전투 당일 저녁 무렵 네는 10킬로미터 떨어진 울름을 향해 전진했다.

같은날, 술트 원수의 4군단은 울름 남쪽의 메밍겐을 공격했다. 군대조직의 대가였던 술트의 4군단은 다른 군단의 2배에 달하는 25,000명의 병력을 자랑했으며, 이에 비해 메밍겐의 수비대는 6,000명에 불과했다. 결국 술트는 극소수의 피해만을 입은채 메밍겐 수비대의 대다수를 포로로 잡았고, 이제 울름의 포위망은 완성되었다.

이 패배로 오스트리아군은 울름 전역을 포기해야 했고, 페르디난트 대공은 야심을 틈타 남은 기병의 대부분을 이끌고 북쪽으로 탈출하여 보헤미아까지 도망칠 수 있었다. 슈바르첸베르크 역시 그와 함께 탈출에 성공했지만, 보병과 포병을 거느리고 탈출을 시도한 베르넥 장군은 운이 좋지 못했다. 나폴레옹은 뮈라 원수를 투입하여 그들의 뒤를 쫓았고, 이틀 간의 추격 끝에 네레스하임에서 베르넥의 뒤를 잡았으며, 베르넥 장군과 15,000명의 오스트리아 병사들은 포로로 잡혔다.

한편 네와 란 휘하 군단은 나폴레옹의 적의 숨통을 끊으라는 명령 하에 15일 오후 미헬스베르크의 오스트리아군에게 포격을 가했다. 대부분의 중포를 베르넥이 북쪽으로 가져가버렸기 때문에 오스트리아군은 이에 대응할 수 없었고, 울름을 지키던 미헬스베르크의 강화진지는 포격을 고스란히 얻어맞았다. 말레 장군이 있는 네 군단의 3사단은 진흙밭 경사를 뚫고 질주하여 강화진지를 공격했다. 처절한 백병전이 이어졌지만 마크의 '믿는 구석'이었던 미헬스베르크는 단 한번의 공격으로 프랑스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결국 마크의 나머지 군대는 울름 시가지에 완전히 갇힌 신세가 되었고, 절망만이 남아있었다. 나폴레옹은 고지에서 울름을 향해 마음껏 포격을 퍼부었다.

10월 18일 뮈라의 추격에 고전하던 베르넥이 트로히텔핑엔에서 항복했다. 마크 장군은 이제 유일하게 남은 러시아의 지원 병력만을 기다렸지만, 러시아군은 아직 보헤미아에 있었기 때문에 남은 선택지는 항복뿐이었다.

10월 20일, 바이에른 진공을 개시하며 이끌고 온 7만의 병력 중 6만 이상을 잃은 마크는 3일간의 교섭 끝에 드디어 항복했다. 그렇게 오스트리아의 주력 4만은 말 그대로 증발해 버렸다.[3][4]

이후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의 수도 까지 가는 길은 뻥 뚫렸고, 프랑스군은 그대로 진격해 들어가 또다른 적인 러시아의 주력을 찾아 헤맨다. 하지만 노련한 쿠투조프 장군은 훌륭하게 퇴각했고 역으로 나폴레옹을 함정에 빠뜨린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고 혈기만 왕성하던 한 황제에게 나폴레옹이 얼마나 먼치킨인가를 각인시켜준 한 번의 전투로 전쟁 자체가 끝장나며 대불동맹은 붕괴되었고 영국의 수상 윌리엄 피트는 충격으로 쇼크 먹고 더이상 지도 따위 필요 없을 거라는 말과 함께 즉시 저승으로 호적을 이전한다.
[1] 나중에 오스트리아군을 지휘해 나폴레옹을 상대로 라이프치히에서 승리를 거둔 그 사람이 맞다.[2] 이들은 일단 티롤까지 가는데는 성공했지만, 오주로 원수의 7군단에 추격당해 11월에 항복하게 된다.[3] 얼마나 심각한 손실이었냐면, 1차 오스트리아 전쟁을 마무리지은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대불 동맹군 대다수 인원이 러시아군이었고 자연히 오스트리아는 발언권이 낮아지게 됐다. 한 번 당해 본 사람 말을 안 듣고, 수적 우위의 자만감에 빠진 젊어서 혈기가 왕성하고 호기심이 하늘을 찔렀던 알렉산드르 1세의 무모한 도전은 당연히 대패배로 끝났으며 나폴레옹에게 일생일대 최고의 승리를 안겨주었다.[4] 당일인 10월 20일 다음 날, 프랑스와 스페인의 연합 함대가 넬슨 제독의 영국 및 대불 동맹 연합해군에게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개발살나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