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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1-20 19:26:45

사사키 마모루

사사키 마모루의 주요 수상 이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역대 키네마 준보 베스트 텐
파일:키네마준보.png
각본상
제41회
(1968년)
제42회
(1969년)
제43회
(1970년)
하시모토 시노부
(사무라이 반란 / 일본의 가장 긴 날)
사사키 마모루
오시마 나기사
타무라 츠토무
후카오 미치노리
(교사형)
타무라 츠토무
(소년)
제44회
(1971년)
제45회
(1972년)
제46회
(1973년)
야마다 요지
미야자키 아키라
(가족 / 남자는 괴로워 4)
사사키 마모루
오시마 나기사
타무라 츠토무
(의식)
쿠마시로 타츠미
(이치조 사유리: 젖은 욕정 / 하얀 손가락의 장난)
하세베 케이지, 쿠마이 케이
(시노부가와)

역대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파일:20210222_223227.jpg
각본상
제25회
(1971년)
제26회
(1972년)
제27회
(1973년)
야마다 요지
미야자키 아키라
(가족 / 남자는 괴로워 4)
사사키 마모루
오시마 나기사
타무라 츠토무
(의식)
이시모리 후미오
(약속 / 여행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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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51538><colcolor=#ffffff> 사사키 마모루
佐々木守|Mamoru Sasaki
파일:사사키 마모루.png
출생 1936년 9월 13일
일본 제국 이시카와현 노미시
사망 2006년 2월 24일 (향년 69세)
도쿄도 신주쿠구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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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각본가, 방송 작가, 만화 스토리 작가
활동 1960년 ~ 2006년
학력 이시카와현립 코마츠고등학교 (졸업)
메이지대학 문학부 (일본문학과 / 학사)
배우자 사사키 나오코

1. 개요2. 생애3. 작품 목록
3.1. 영화3.2. 드라마3.3. 만화3.4. 애니메이션
4. 여담5. 외부 링크

1. 개요

일본각본가, 방송 작가, 만화 스토리 작가.

2. 생애

이시카와현의 농촌 노미시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 전후에 창간된 수많은 어린이 잡지에서 모험소설을 애독했으며, 신문과 문집 만들기에 열중했다. 고교 졸업 후, 상경해 메이지대학 문학부에 진학했다. 아동문학에 특히 큰 관심을 보였으며, 아동문학 연구부에 소속하기도 했다. 또 연구지 '작은 동료'의 동인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대학 시절부터 스나가와 투쟁에 참여하는 등 좌익 운동권 활동을 하였으며 이 때문에 제도권에 취업을 못하고 있다가 라디오, TV, 영화 시나리오 작가 일을 시작한다.

대학교 4학년 때부터 교육영화작가협회의 기관지 '기록영화'의 편집자 겸 발행인을 맡아 오시마 나기사, 마츠모토 토시오, 이시도 토시로 등과 알게 되었다. 이후 오시마 감독이 쇼치쿠 퇴사 후 설립한 독립영화 제작사 소조샤에 참가해 조감독을 맡았으며, 1967년 개봉한 영화 〈닌자무예장〉부터는 오시마의 밑에서 많은 시나리오를 작성했다. 타무라 츠토무와 함께 〈감각의 제국〉 이전 오시마의 각본 작업 파트너로 유명했다. 〈교사형〉, 〈돌아온 술주정뱅이〉, 〈신주쿠 도둑 일기〉, 〈도쿄전쟁전후비화〉 등 오시마가 만든 정치적인 영화 각본은 사사키, 타무라와 공동 작업으로 탄생했다.

오시마의 소개[1]로 영혼의 파트너라 할 만한 짓소지 아키오를 만나게 되며 평생 친구로서 같이 지내며 작품활동을 같이했다. 짓소지는 후일 인터뷰에서 사사키에 대해 "발상은 기발. 하지만, 구성은 단단하다. 이상적인 각본가였다"라고 평했다. 이 콤비가 만든 대표작이 바로 〈울트라맨〉의 서성괴수 자미라가 등장하는 〈고향은 지구[2]〉이며 지금도 울트라맨 최고의 에피소드로 꼽는 사람들이 많다. 그외에도 명작 에피소드가 많으며 보통 울트라맨 팬들은 킨조 테츠오, 우에하라 쇼조, 이치카와 신이치, 사사키 마모루 이 4명을 쇼와 울트라맨 4대 작가로 꼽는다.

1970년에는 TV 드라마의 상식을 뒤집은 코미디물 〈오니모츠 코니모츠〉를 발표했다. ‘탈드라마’를 표방해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최종회 시청률은 29.2%를 기록했다. 또한 1974년부터는 야마구치 모모에와 우츠이 켄이 주연으로 출연한 히트 드라마 〈붉은 시리즈〉의 메인 각본가 중 한 명으로 활동했다. 그 외에도 다큐멘터리와 음악 프로그램 구성, 만화 원작과 소설, 작사가 활동 등 폭넓은 분야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70년대 중반부터는 다시 아동문학의 중요성을 깨닫고 주로 어린이를 위한 작품에 전념하게 되었다.

만화 스토리 작가로도 왕성하게 활동했다. 1970년부터 1975년까지 미즈시마 신지와 함께 야구만화 〈남자 바보 고시엔〉을 연재해 큰 인기를 끌었다. 미즈시마의 출세작이 되었고, 제19회 쇼가쿠칸 만화상을 수상했다. 이 작품 이후에는 당시 신인이었던 아다치 미츠루와 함께 수많은 야구만화를 발표했다. 또 80년대부터는 〈아들을 동반한 검객〉의 그림 작가 코지마 고세키와 함께 많은 시대극 만화, 순정만화 작가 카와하라 유미코와 함께 청춘 만화를 발표하기도 했다.
확실히 반대되는 입장인 건 맞지만, 텔레비전에서는 반체제 쪽을 주인공으로 삼을 수는 없어요. 그런 기획을 써도 통과되지 않겠죠. 다만, "시라누이 일족"이나 "독립 환상단"처럼 이 일본에서 국가 체제에 단호하게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게 좋지 않겠냐는 생각이 있어요(웃음). 단호하게 국가와 싸우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보고 싶었어요. 자기 만족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는 그 감정을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해요.
사사키 마모루 #
좌익 사상가였으며, 평생 일본 정부를 부정했다고 한다. 현재의 일본은 여러 나라를 강제 융합시켜서 만든 괴뢰 정권이며, 이 모든 책임은 천황에 있고 오키나와, 홋카이도를 원주민들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그의 작품에도 드러나는데 오시마 나기사의 대표작에서는 노골적으로 일본 우익과 천황제를 비판했다. 특촬물에서도 변하지 않아 〈아이언 킹〉에서는 악역으로 나오는 집단이 일본 정부에게 나라를 빼앗겨 다시 되찾으려고 하는 자들로, 다분히 류큐아이누를 의식하고 있다. 〈울트라맨 22화〉도 이러한 내용이라는 설이 많다. 잘 보면 국가에 배신당하거나 소중한 걸 빼앗긴 사람들이 복수를 하러 나타난다는 전개가 상당히 많다.

1982년에는 ATG츠부라야 프로덕션이 제작하는 초대 울트라맨의 리메이크 작품인 〈울트라맨 괴수성서〉의 각본을 담당할 예정이었으나 천황 일가를 비판하는 내용이 있다고 하여 제작은 중지되었다. 후에 이 작품의 소재 일부를 재활용해 〈울트라 Q 더 무비 별의 전설〉이 제작되었고, 1990년에 개봉했다. 이 작품의 핵심인 '울트라맨에 의해 지켜졌음에도 결국 자신이 침략자가 된 지구인'이라는 소재는 소설 〈Another Genesis〉에서 활용되었다.

말년에는 각본가 활동보다는 자신의 고향 이시카와현의 발전을 위해 힘썼다. 이시카와현 현지에서 시청할 수 있는 민방국이 적었기 때문에 케이블 TV 회사의 설립에 진력해 사장으로 취임했고 #, 2002년 11월부터는 이시카와현에 온천시설과 극장이 모여있는 복합시설의 관장도 맡았다. 그러다가 2006년 2월 24일 오전 1시 10분, 췌장암으로 도쿄도 신주쿠구의 병원에서 향년 6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장례식은 가까운 가족만 참석하여 진행됐고, 상주는 아내 나오코가 맡았다. #

3. 작품 목록

3.1. 영화

3.2. 드라마

한국에선 아무래도 일본 고전 TV 드라마가 알려져있지 않고 볼 방법도 없다보니 주로 울트라맨과 특촬물 위주로 소개하게 되었다.

3.3. 만화

스토리 작가로 참여한 작품들.

3.4. 애니메이션

4. 여담

5. 외부 링크


[1] 짓소지와 자주 협업한 촬영감독 나카보리 마사오는 후일 인터뷰에서 "오시마 씨는 짓소지 감독이 영상 표현만 쫓아가고 있다고(완성 작품을 보고) 화가 나서, 거기서 나이가 가까운 사사키 마모루 씨를 소개했습니다."라고 말했다.[2] 짓소지는 이 에피소드에 대해 "연출은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가 있었지만, 사사키 마모루의 각본은 훌륭했다고 생각한다"라고 평했다. #[3] 각본 뿐만이 아니라 스태프로도 참여했다.[4] 재일조선인 문제를 다룬 영화로 유명하다[5] 극좌 성향으로 유명한 아방가르드 감독이다.[6] 담당 에피소드가 적은데 이는 친구인 짓소지 아키오가 직접 각본을 작성하는 시도를 도왔기 때문이며 다른 에피소드에 아이디어를 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7] 방사능 피폭과 복수를 소재로 했는데 소재에 문제가 있어서 결번 에피소드가 되어 환상의 12화라고 불린다.[8] 사건의 원인이 일본 육군이 오가사와라 제도에서 현지인들을 학살하고 빼앗은 보물 때문에 시작되었다는 내용으로 본작이 방영된 1968년 당시에 있었던 오가사와라 제도 반환 건과 맞물려 나온 에피소드라고 한다. 오가사와라 제도 반환에 대한 이야기도 극중에 나온다. 구일본군이 숨긴 자금이 있다는 말은 그때나 지금이나 소문으로 많이 나돌며 이를 이용하여 사람을 속여 금품을 갈취하는 사기 행위는 지금도 문제가 되고 있다. 그 자금에 대한 이야기를 사람들은 "M자금"이라고 부른다. 해당 도시 전설의 내용은 오가사와라 사건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치치지마 식인 사건과 비슷하지만 그 관계는 알 수 없다.[9] 방사능 피폭 피해자에 대해서 다룬 에피소드. 극중 대사로 "과학자? 과학자가 무엇을 했나? 원폭이나 수폭을 발명했을 뿐이지 않나." "틀렸다고 말할건가? 아니, 틀렸을지도 몰라. 하지만 내가 하지 않으면 대체 누가 쿄코를 고쳐준단 말인가? 일본인가? 아니면 원폭을 떨어뜨린 미국인가? 아무도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어."가 있다.[10] 사사키 마모루 아니랄까봐 국가전복 세력을 소재로 삼았다.[11] 정확히는 방영 초기엔 인기가 있었다. 문제는 같은 시간대에 경쟁 프로그램으로 마징가 Z가 나타나서 망해버렸다.[12] 감독은 쇼와 시대 영화계의 거장 중 한 명인 이치카와 곤.[13] 평론가 카라사와 슌이치는 사사키 마모루에게 이 말을 듣고 택시를 많이 탔다고 한다.[14] 今野勉. 독립 TV 프로그램 제작사 'TV 맨 유니온'의 창립자. 수많은 드라마나 다큐멘터리 제작에 종사한 유명 연출가.[15] 오시마 나기사, 이시도 토시로, 타무라 츠토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