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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09 20:55:52

뿌리깊은 나무(SBS)/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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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극중 연도?3. 나름 반영을 잘 한 부분4. 현실 반영 오류

1. 개요

SBS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의 탐구 내용을 정리한 문서.
이 문서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문서가 설명하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을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2. 극중 연도?

드라마의 극중 시점은 셋 중 하나다, 하나는 세종 24년~25(1442년~1443년), 하나는 세종 26년(1444년), 마지막 하나는 세종 28년(1446년)이다.[1]

세종 28년의 경우 두 번째 예고편 영상에도 그렇게 나왔고, 극중에서 정기준이 밀본의 첫 회합 자리에서 "삼봉 선생께서 도적 이방원에 의해 돌아가신지 어느덧 48년"이라는 대사를 한다. 정도전은 1398년에 일어난 1차 왕자의 난으로 죽었으니 계산하면 극중 시점은 1446년이 맞다. 다만 이렇게 연도가 설정되면 역사적인 팩트가 엄청나게 꼬이는 부분이 상당히 많아서 문제가 된다.

세종 24~25년으로 본 것은 7화 심종수가 혜강 선생을 만날당시 "45년전 삼봉 선생에게 한 맹약을 지킬 때가 되었다"이라는 대사를 해서다. 세종 28년에서 45년전은 삼봉이 칼에 맞은지 3년이 지난 시점이므로 이 대사대로라면 적어도 세종 25년이거나 그 이전이라는 소리가 된다.

1444년이라 함은 최만리가 한글창제 반대 상소를 올리던 해의 일이며 작중에서 최만리가 상소를 준비하는 장면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또 밑에서도 나오지만 이순지가 칠정산 외편을 만들고 있는 발언을 하는데 사실 칠정산외편은 1444년에 완성을 보았다.

또 4화에서 세종이 이미 세자(후일의 문종)에게 하례 등을 맡겼음에도 자신을 번거롭게 한다고 따지고 있는데, 세자가 세종의 대리청정을 맡은 시기는 세종 24년(1442년)부터다. 5화에서 집현전 학자들이 삼각산 진관사에서 사가독서를 했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이 또한 1442년의 일이며, 김종서가 함길도 변경에서 돌아오는 장면이 4화에서 등장하는데 김종서는 1435년부터 함길도 도관찰사와 병마절도사를 겸하며 이후 7년간 북방의 경계와 수비를 맡았는데 임기를 마치고 올 무렵이 1442년[2]이다. 1446년설을 채택할 경우 김종서가 1445년에는 충청, 전라, 경상 3도의 도순찰사로 있다가 1446년 의정부 우찬성에 제수받기 때문에 드라마 상황상 맞지 않는다. 시대상으로 놓고 본다면 이 설을 도입할 시 꼬이는 부분이 얼추 맞아 떨어진다. 8화에서 가부조사 시행이 13년전이라 했는데 이는 세종 12년에 있었던 일이니 역산하면 1443년이 된다.

사실 따지기도 뭣한 게 드라마에선 정기준이 세종이 내불당을 지었다는 이유로 디스하는데 이 내불당이라는게 1447년에 지어진 것이다. 그 전의 내불당은 세종 15년인 1433년에 혁파되어서 신하들의 지지를 받았다. 상식적으로 불교 관련으로 디스할 거였으면 차라리 1442년 3월에 있었던 흥천사 사리탑 경찬회를 까는 게 나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스님만 1만 8천 명이 왔다고 하니까. 이런 건 퓨전 사극이라 어쩔 수 없을지도? 어쨌든 이쯤 되면 시청자들이 생각하기 나름이다.

3. 나름 반영을 잘 한 부분

퓨전 판타지임에도 어느 부분까지는 현실 반영에 신경쓰려는 티가 났다.
파일:external/pds23.egloos.com/f0018015_4eb4b1ceae790.jpg
* 프라모델 덕후? 자격루 모형이 등장하는데 이는 실제 자격루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실제로 자격루의 실제 모습은 우리가 알 고있는 모습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현재 남아 있는 모습은 자격루의 실제 모델 중 극히 일부이며 사진에 나온 모델에 나온 목조 건축물들은 시대가 지나면서 사라지고 파괴되었다.

4. 현실 반영 오류

위에 언급한 몇몇 장면을 제외하곤 전부 오류라고 봐도 무방하다. 애초에 정통 사극이 아니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파일:뿌깊나 아지트.png
[6]
* 아지트가 순 우리말이라 카더라.[7] 바른 우리말은 근거지, 소굴, 은신처 등이 있다.[8] 오류라기보단 방송이 시청자에게 설명하는 자막이기 때문에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현대극도 아닌 사극에서 더 알아듣기 쉬운 앞의 예시의 우리말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문제라고 볼 수 있다.


[1] 참고로 원작 소설 배경은 1443년 12월이다.[2] 변경에 머물게 하면서도 1440년부터는 병조판서를 겸직했으니 세종이 그를 상당히 신뢰한 사실을 알 수 있다.[3] 세종뿐 아니라 자식들을 굉장히 아꼈다. 오죽하면 막장 of 막장인 양녕대군 폐위 당시에도 밤에 눈물을 펑펑 흘렸다고 한 기록이 남아 있다.[4] 사실 정도전에 대한 표현의 오류가 이것저것 따지자면 많다. 그는 사대부의 세상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이미 조선은 사대부의 세상이기 때문). 아니, 애초에 뼛속까지 성리학자였던 정도전은 밀본이란 조직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민본사상을 강조해 백성들에게 농사지을 땅을 나눠주는 무상토지분배(!)도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후대가 정도전의 생각을 잘못 해석하거나 권력쟁탈을 위해 일부러 곡해하는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5] 여담이지만 임금 본인이 자신의 휘를 언급하는 것은 당연히 반영 오류가 아니다. 대왕 세종에서 태종이 자신의 이름인 이방원을 언급한 것과 장옥정, 사랑에 살다에서 숙종의 독백에 숙종 본인의 이름인 이순이 나온 것이 반영 오류라는 비판을 듣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6] 다른 이미지[7] 의외로 한국에 많이 쓴 단어인데, 어원은 러시아어의 агитпункт(아지트풍크트) 이지만 아지트풍크트는 공작원의 비밀기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구 소련에 있었던 대민 사상교육과 선동을 담당하는 교육센터를 가리킨다. 한국에서 사용하는 아지트의 뜻과는 다른 것인 셈.[8] 이후 VOD에는 산채로 수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