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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10 04:45:51

빈첸티 비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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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첸티 비토스
Wincenty Witos
1874.1.22. ~ 1945.10.31.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정계 입문2.3. 폴란드 독립 후2.4. 5월 쿠데타 이후2.5. 제2차 세계 대전
3. 참고문헌4.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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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빈첸티 비토스는 폴란드 제2공화국의 정치인으로 폴란드 인민당의 당 대표이자 3번의 총리를 역임한 인물이다.

2. 생애

2.1. 초기

빈첸티 비토스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산하의 제후국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의 비에츠호스와비체(Wierzchosławice)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10살 무렵 교육을 받았고 4학년이 될 무렵 교육을 마쳤으며, 이후에는 아버지의 일을 도왔다.

1895년부터 1897년까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서 복무했으며 처음에는 보병이었으나 이후 포병으로 전환 복무했다. 1898년 2월 9일에는 카타지나 트라흐와 결혼했다.

2.2. 정계 입문

비토스는 19세가 되던 해 마치에이 리츠(Maciej Rydz)라는 가명으로 렘베르크의 신문사 '인민의 친구(Przyjaciel Ludu)'에 자신의 첫 기사를 게재했다. 그는 1895년 갈리치아의 인민당(Stronnictwo Ludowe)에 가입했고, 1903년 2월에는 당 집행위원회에 선출되었다. 그렇게 정계에 입문한 비토스는 1908년 렘베르크의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14년까지 활동했다.

1909년 4월 고향 비에츠호스와비체의 시장으로 선출된 비토스는 마을의 발전에 집중했다. 그는 공장과 사회 시설의 건설을 감독하고 학교를 확장했으며 도로를 개선하고 신용조합과 농업 협동조합을 조직했다. 이 과정에서 비토스는 형제인 안제이 비토스(Andrzej Witos)가 뛰어들어 있던 농민 운동에 자신도 뛰어들게 되었다. 1911년 그는 오스트리아 제국 하원 당 대표를 역임했다.

1913년 인민당이 분열되자 비토스는 인민당에서 분열된 정당인 인민당 피아스트의 부의장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는 당 활동에 더욱 많이 참여했지만 인민당 피아스트가 가입한 준정부 최고 국가 위원회가 여러 사건으로 점점 유명무실해지자 부의장에서 사임했다. 한편, 비토스는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옝제이 모라체프스키 등 폴란드 독립운동가들과도 연락을 취하고 있었으며,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를 지원하였다. 특히 피우수트스키가 동맹국과의 협력을 거부해 수감된 뒤에는 더 많은 지원을 하였다.

이 무렵 폴란드의 농민들 사이에서는 반동맹국-친협상국 기조를 취하던 로만 드모프스키(Roman Stanisław Dmowski)의 민족민주주의당(Narodowa Demokracja, ND, 통칭 엔데치아(Endecja))의 지지율이 높아지기 시작했고, 이에 비토스도 1917년 엔데치아에 합류했지만 1년만에 탈당했다.

1916년 인민당 피아스트의 의장이 된 비토스는 1917년 5월에 집필된 독립선언문을 공동 집필하였으며 1918년 9월 28일에는 임시정부의 두 감독 중 한 명이었다. 서부 갈리치아가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뒤 그는 이그나치 다신스키 내각에 합류를 요구받았지만 노선 차이로 인해 거절하였다.

2.3. 폴란드 독립 후

1920년 7월 24일 비토스는 브와디스와프 그랍스키의 뒤를 이어 폴란드의 총리가 되었으며, 1921년 9월 19일 사임했다.

1923년 5월 17일 인민당 피아스트와 우익 정당 기독교연합 간의 협정 결과 5월 18일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 내각이 붕괴하고 비토스를 총리로 하는 연립정부(Chjeno-Piast)가 등장했다. 2차 비토스 내각은 기독교연합과의 협정대로 폴란드 내에서 가톨릭의 영향력을 증대시키고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의 결과로 획득한 동부의 동화 정책을 가속화하는 등 좀 더 권위적인 통치를 추구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피우수트스키는 가브리엘 나루토비치 대통령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우익 정당과의 협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1923년 12월 19일 비토스는 사임하고 다시 한번 그랍스키가 재선되었다. 하지만 그랍스키 사임 후 구성된 알렉산데르 스크진스키(Aleksander Józef Skrzyński) 내각이 폴란드 사회당의 지지를 잃어 무너진 후 또 한번 비토스의 연립정부가 당선되었다. 하지만 이 혼란으로 인해 피우수트스키는 의회제를 부정적으로 보기 시작했고, 5월 11일에 자신을 지지하는 군인들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켰다.

결국 3차 비토스 내각은 얼마 가지 못하고 비토스는 14일에 대통령 스타니스와프 보이치에호프스키(Stanisław Wojciechowski)와 함께 사임을 발표했다. 후임 대통령은 마치에이 라타이(Maciej Rataj)가 대행하다 이그나치 모시치츠키가 승계하였으며, 피우수트스키는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총리에서 사임한 비토스는 1926년 5월 26일 인민당 피아스트 의장에서도 사임하려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4. 5월 쿠데타 이후

1927년 마워폴스카의 농민 협회 회장에서 사임한 비토스는 1928년 선거에서 타르누프(Tarnów)의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정계에 있는 동안 사나치아(Sanacja)의 반대파로 활동하였으며 폴란드 인민당과 인민당 피아스트, 폴란드 사회당 등이 연립한 정당 중도동맹(Centrolew)의 대표이기도 했다.

한편 사나치아 정부는 8월의 선거 결과를 무효화했고, 그래서 새로운 선거가 예정된 11월에 반정부 집회를 이유로 중도동맹의 지도자들을 포함, 야당 의원 20여명을 체포하였다. 이 때 비토스 역시 보이치에흐 코르판티(Wojciech Korfanty)와 함께 체포되었고 브제시치 요새에서 재판을 받았다. 석방된 비토스는 그루예츠(Grójec)에서 또 한번 체포되었고 1930년 11월 27일 1만 즈워티의 보석금을 내고 석방되었다.

비토스는 농민 협회와의 연대를 주장했기에 1931년 3월 15일, 인민당-인민당 피아스트-농민당 좌파를 통합한 통합 인민당을 창설했다. 한편 1931년 시작된 브제시치 재판에서 비토스는 사나치아 내각의 암살을 기도했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았고, 이 때 그는 5월 쿠데타 이후 독재 정권을 수립한 사나치아를 비판하였다. 비토스를 포함한 피고인들은 쿠데타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정치 활동에 대해서는 유죄를 선고받았고, 10명의 피고인들은 최대 3년의 징역을 선고받았다. 비토스는 이 재판에서 공적 권리를 3년간 박탈당했다. 이후 1933년 2월 항소심이 열렸지만 2심 재판의 결과도 바뀌지 않았으며, 그나마 대법원이 사건을 다시 법원으로 환송하면서 희망이 보이는 듯 했지만 환송 후의 재판에서는 오히려 대법원에서마저 초기 판결이 정당하다고 판결했다.

결국 비토스는 카지미에시 바긴스키(Kazimierz Baginski), 헤르만 리에베르만(Herman Lieberman), 브와디스와프 키에르니크(Władysław Kiernik), 아담 프라기에르(Adam Pragier)와 함께 다시는 독재 정권의 인질이 되지 않겠다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최종 판결이 나오기 전 폴란드를 떠났다.

2.5. 제2차 세계 대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1933년부터 1939년까지 망명 생활을 한 비토스는 폴란드 침공 당시 폴란드로 돌아왔고, 바로 독일 국방군에 체포되어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수용소 생활로 그의 건강은 급격히 나빠졌고, 결국 나치 독일은 1941년 3월 그를 석방시키며 비에츠호스와비체에 머무를 것을 요구했다. 이후 1944년 7월 한참 패전하고 있던 독일은 비토스에게 반소련 호소문을 발표할 것을 강요했지만 그는 이를 거절했다.

전쟁이 끝난 후 비토스는 국가위원회의 부의장 중 한 명으로 임명되었지만 10월 31일 사망하였고, 인민당은 1945년에서 1946년 사이 스타니스와프 미코와이치크에 의해 재조직되었다.

3. 참고문헌

4. 대중매체

Hearts of Iron IV에서 폴란드의 민주주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원래는 기본 민주주의 지도자였으나 No Step Back DLC 이후 미코와이치크가 기본 민주주의 지도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