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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8 19:54:25

가브리엘 나루토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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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립: 1945년 7월 6일 이후 제2공화국 망명정부연합국유엔
승인 및 국내 영향력 상실로 인해 폴란드 인민 공화국과 대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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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유제프 나루토비치
Gabriel Józef Narutowicz
생몰년: 1865년 3월 29일 ~ 1922년 12월 16일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폴란드 귀환2.3. 대통령 취임2.4. 최후
3. 여담4.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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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의 독립운동가이자 공학자이자 정치인. 폴란드 제2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을 역임하였으나 임기 5일만에 암살당했다.

가톨릭 신자였지만 냉담자였고, 프리메이슨 회원이었다.

2. 생애

2.1. 초기

당시 러시아 제국 영토였던 텔샤스(Телшас)[1]에서 귀족 가문의 자제로 출생한 나루토비치는 리예파야 김나지움에서 중등 교육을 마쳤고, 성장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 제국 대학에 입학해 물리학과 수학을 공부하다 병으로 학업을 중단, 이후 스위스취리히 폴리테크닉에 편입하여 거기서 학업을 마쳤다. 그가 스위스 폴리테크닉에서 공부한 기간은 1887년에서 1891년까지였다.

또한 나루토비치는 스위스에 체류하는 동안 러시아에서 추방되어 온 폴란드인들을 지원했다. 그는 폴란드 이민자로 구성된 정당 "프롤레타리아트"와도 연관되어 있었기에 체포 영장이 발부되었고 러시아 귀환이 금지되었다. 1895년, 결국 나루토비치는 스위스 국적을 취득했으며 장크트갈렌(St. Gallen) 철도 건설 엔지니어로 고용되었다. 철도 건설 현장에서 나루토비치는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여 동년에 라인강 공사의 책임자가 되었다. 이후 쿠어스타인(Kurstein) 기술 사무소에 고용되었다.

나루토비치는 당대 유럽에서 전기화의 선구자로 각광받았으며 그가 제작한 물품들은 1896년 파리 국제 전시회에서 공개되기도 했다. 또한 그는 스위스의 몽테(Monthey), 뮐레베르크(Mühleberg) 등지에서 수력발전소 건축을 감독하기도 했다. 이 공로로 그는 1907년 취리히 수력 건설 연구소 교수로 임명되었고 라인강 유지 관리 업무를 담당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에는 폴란드 전쟁 희생자들을 위한 스위스 총회에 협력했으며, 로잔에 위치한 '폴란드와 전쟁(La Pologne et la Guerre)' 단체의 회원이기도 했다. 또한 나루토비치는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를 지지하여 그의 친구가 되었다.

2.2. 폴란드 귀환

1919년 9월 새로 독립하게 된 폴란드 당국은 국가 재건을 위해 나루토비치를 초청했고, 나루토비치는 이에 응해 폴란드로 돌아왔다.

1920년 6월 23일에 나루토비치는 브와디스와프 그랍스키 1차 내각의 공공사업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그랍스키가 사임한 후에도 계속 공공사업부 장관으로 활동하며 폴란드 재건 작업을 지휘했다. 그는 공공사업을 감독하기 위해 자주 전국을 돌아다녔으며, 그의 공공사업부 장관 재임 기간 중인 1921년까지 300개의 다리와 27만 채의 건물이 수리되었고 도로가 다시 수리되었으며 200km의 고속도로가 등장했다. 또한 나루토비치는 비스와강의 관개사업을 감독했고 베스키드 산맥에서 발원하는 소와(Soła)강의 수력발전소 건축을 감독하였다. 이후 1922년 6월 26일 공공사업부 장관에서 사임했다.

정치인으로서의 그는 합리적이고 온건하며 마음이 넓다는 평판을 받았다.

1922년 4월, 나루토비치는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콘스탄티 스키르문트(Konstanty Skirmunt)와 함께 제노바 회의의 대표로 참석하였으며 거기서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공로를 인정받아 6월 28일 아르투르 실리빈스키(Artur Śliwiński) 내각의 외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나루토비치는 이후 율리안 노바크(Julian Ignacy Nowak) 내각에서도 외무장관직을 유지했다. 이후 10월에 탈린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나루토비치는 폴란드를 대표하여 참가했다.

1922년 선거에서 나루토비치는 피우수트스키와 연관된 중도우파 정당인 '전국공공연합(Unia Narodowo-Państwowa)'을 지지했다. 그 또한 이와 연계된 '동부 국경 공공연합(Państwowe Zjednoczenie na Kresach)'의 후보로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2.3. 대통령 취임

12월, 나루토비치는 뜻밖에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고, 처음에 그가 대선에 출마하는 것을 반대했던 피우수트스키도 결국 이를 받아들였다.

이 시기 폴란드의 3월 헌법에 의하면 폴란드 대통령은 세임(하원)과 세나트(상원)에서 선출되어야 했다. 1차 투표에서는 어느 후보도 우세를 점하지 못했지만 2차 투표에서는 사회주의자들의 지지를 받던 이그나치 다신스키(Ignacy Ewaryst Daszyński)[2]가 탈락했다. 그리고 3차 투표에서는 소수민족들의 지지를 받던 두 후보인 스타니스와프 보이치에호프스키(Stanisław Wojciechowski)[3]얀 니에치스와프(Jan Niecisław Ignacy Baudouin de Courtenay)가 탈락하여 나루토비치와 우파 후보 마우리시 자모이스키(Maurycy Klemens Zamoyski)만이 후보로 남았다.

나루토비치는 중도좌파, 특히 폴란드 인민당의 지지를 받고 있었고 자신들이 지지하던 후보가 탈락한 사회주의자들과 소수민족 유권자들 역시 민족민주주의당의 지지를 받는 자모이스키를 탈락시키는 데 의견이 일치하여 289:227의 표 차이로 나루토비치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당연히 엔데치아는 그의 당선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취임 선서식 당시 바르샤바에서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일부 가톨릭 단체와 민족주의 단체는 나루토비치가 가톨릭 냉담자이며 유대인에 유화적임을 빌미삼아 그에 대한 비방을 시작하였다. 또한 유제프 할레르를 위시한 피우수트스키의 반대파 역시 그의 피우수트스키에 대한 지지를 비판하였다. 정작 나루토비치는 자신이 대통령에 당선되리라 생각하지도 않았고, 당선 후에도 그가 좌파를 대표한다는 소문도 달가워하지 않았다.

나루토비치는 대통령 임기 첫날 기독민주당 대표와 알렉산데르 카코프스키(Aleksander Kakowski) 추기경을 만났다. 이 만남 이후 나루토비치는 좌우를 망라한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상대 후보였던 자모이스키에게 외무장관직을 제의하는 등 우파에 대한 유화적 제스처를 보였다.[4]

2.4. 최후

취임 5일만인 1922년 12월 16일 나루토비치는 자헹타(Zachęta) 미술관에서 작품을 감상하던 중 정신적 문제가 있던 화가이자 극우 민족주의자였던 엘리기우시 니에비아돔스키(Eligiusz Niewiadomski)에게 암살당했다.

3. 여담

나루토비치의 가족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형 스타니슬로바스 나루타비추스(Stanislovas Narutavičius / Stanisław Narutowicz, 폴란드어 표기)는 1918년 리투아니아가 독일 제국괴뢰 왕국으로나마 독립했을 때 폴란드가 아닌 리투아니아 국적을 선택했으며 동년 2월 16일 리투아니아 독립 법안에 서명하였다.

4. 참고문헌



[1]리투아니아 텔셰이(Telšiai)[2] 폴란드 제2공화국의 초대 총리. 임시정부 시절 총리를 역임했다.[3] 이후 폴란드 제2공화국 2대 대통령이 되었다.[4] 외무장관 제의를 받은 자모이스키는 이를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