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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0 16:38:37

바실 헨리 리델 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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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colcolor=#000> B. H. Liddell Hart
Sir Basil Henry Liddell Hart
바실 헨리 리델 하트 경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_H_Liddell_Hart.jpg
출생 1895년 10월 31일
프랑스 파리
사망 1970년 2월 29일 (향년 74세)
버킹엄셔 말로
국적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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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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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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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학력 케임브리지 대학교 코퍼스 크리스티 칼리지
병역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경력 군사학자

1. 개요2. 상세3. 저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심각한 왜곡
3.1. 타 명장에 대한 폄하3.2. 타 명장의 전투에 대한 폄하3.3. 자마 전투의 한니발 군세에 대한 왜곡3.4. 기타 사소한 오류

[clearfix]

1. 개요

제1차 세계 대전영국군 소속으로 참가한 군인[1]으로서 1922년까지 복무했으며, 이 기간 동안 군사교범을 편찬하여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중에 입은 독가스 중독 후유증으로 심장마비를 여러 차례 일으켜 소령으로 퇴역, 이후 군사학 저술가로서 활동했다.

스승인 영국 군인이자 군사학자, 참모 존 프레더릭 풀러(John Frederick Charles Fuller, 1878 ~ 1966)의 이론을 계승해 간접접근론을 발표하고 이를 바탕으로 1938년 《전략론》을 편찬했다. 영미 군사학계에서는 이 책이 제2차 세계 대전 초반 독일군전격전으로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이론적 밑바탕이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둘 사이에 관계는 없다.

2. 상세

리델 하트의 책 자체는 전 세계적으로 탁월한 군사적 저술로서 인정받지만, 독일군의 전격전과는 별 관련이 없다.[2] 애초에 간접접근을 신봉했던 리델 하트의 저서와는 판이하게도, 독일군은 포위 후에 이어지는, 직접 피를 흘리는 대규모 섬멸전을 중시했다. 심지어 기계화부대조차도 이러한 섬멸전에 직접 참여하는 것을 선호했다. 이는 전형적인 고전적 독일식 기동전인 포위섬멸전(Kesselschlacht)에서 나타나는 양상으로, 리델 하트의 간접접근과는 거리가 있다.

게다가 소위 간접접근은 기동에 과도하게 집착하느라 전역 수행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인 전투를 경시, 아니 사실상 고려하지도 않았다는 이유로 엄청나게 까인다. "리델 하트의 머릿속에서 전쟁이란 총탄이 난무하는 게 아니라 차량과 병력의 행군대열로 시작되어 그것으로 끝나는 일종의 퍼레이드였다"라는 조롱까지 나올 정도.

존 프레더릭 풀러 계획(J.F.C. Fuller of Plan)1919이나 리델 하트의 저서에 독일군이 좋은 평을 내린 것은 사실이나 이에 대해서 당시 쏟아져 나오던 비슷한 부류의 군사학술서적 이상의 평가를 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포로로서 수감된 전직 독일군 장성들을 발로 뛰며 취재한 덕분에 독일 장교들과 적지 않은 친분을 쌓았고, 서로 치켜올려준 덕에 그 명성이 더욱 높아졌다는 견해도 있다.

참조 : 류한수 교수의 논문
"리델 하트는 1930년대부터 자기의 기동전 이론을 포기하고 진지전의 효율성을 강조했고, 1940년에 독일군이 프랑스를 침공했을 때 독일의 패배와 프랑스의 승리를 예측했다. 따라서 그의 평판은 심하게 훼손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 리델 하트는 수감된 독일 장성들과 접촉하면서 친분을 쌓았고, 전범 재판의 부당성을 주장하며 그들을 옹호했으며, 그들이 전쟁범죄와 무관한 동시에 나치 체제가 아닌 조국 독일을 위해 싸운 명예로운 군인이라고 단언했다. 리델 하트는 이러한 변호의 반대급부로 독일의 유명한 장군들이 자기의 저술에 착안해서 기갑부대를 창설하고 “전격전”이라는 기동전을 구상했다는 발언을 하도록 유도했다."
"구데리안 장군을 비롯한 여러 독일 고위 장교가 그의 은밀한 요청에 응하면서 리델 하트는 독일 기갑전의 “스승”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로써 전후에 그는 바라던 대로 명성을 되찾았다. 그러나 리델 하트가 독일군의 기갑부대 편성과 운용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인식은 사실과 어긋난다. 또한 만슈타인을 비롯한 독일국방군 고위 장교들이 유럽 동부전선에서 자행된 전쟁범죄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진실을 희생해서 명성을 얻은 리델 하트는 “결백한 독일국방군” 신화의 탄생을 도운 산파였던 셈이다."
냉정하게 표현해서 적국의 전범들과 결탁해서 그들이 치러야 할 죄값을 낮춰주고, 그 대가로 자신의 명성을 선전하는 데 이용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물인 셈이다.

전격전 문서에서 볼 수 있는 작전술 이상 차원의 전격전에 대한 잘못된 상식이 유포되는 과정에서 리델 하트의 영향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완전히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잘못된 견해이다. 리델 하트는 전격전, 특히 1940년 프랑스 전역이 단순히 작전술적 차원의 우연에 기반한 일시적인 효과임을 명백하게 인지하고 있었으며, 그의 저술에서도 그런 부분이 종종 언급된다.

리델 하트의 책임은 전격전의 과정에서 발생한 심리적 붕괴, 그리고 기동의 승리를 자신이 주장하던 간접접근전략의 우월성이 입증된 것으로 간주(사실 크게 틀린 생각은 아니다), 자신의 지명도를 무기로 삼아 기동만능론을 설파[3]하면서 최종적으로는 군사전문가가 아닌 저명한 경제학자 및 역사학자들까지 그의 주장에 경도, 역사적으로 잘못된 결론을 도출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는 데 있다. 한마디로 리델 하트 본인보다는 본인의 유명세에 편승한 비전문가들의 입심이 문제. 그런 견해가 역사학계를 휘어잡았던 시기에는 이미 고인이었으므로 어떻게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3. 저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심각한 왜곡

3.1. 타 명장에 대한 폄하

그 외에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 대한 엄청난 빠심으로도 유명하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라는 제목으로 그에 대한 책을 저술한 적이 있는데, 마지막 부분에서 스키피오는 역사상 최고의 명장이며, 나폴레옹 정도가 그나마 견줄만 하고,[4] 한니발 바르카조차 스키피오에 비하면 한 수 아래며, 율리우스 카이사르일레르다 전투파르살루스 전투 이전에는 잘 쳐봐야 능력 있는 부관형 지휘관일 뿐이라며 여기서 최고의 승리인 파르살루스 하나를 더해봤자 일급 지휘관이 되긴 힘들다고 혹평했다. 수부타이알렉산드로스 대왕도 스키피오에 비하면 상대도 안된다고 평했다. 일단 책의 전반적인 내용이 시오노 나나미처럼 이상한 소설을 끼워놓은 수준은 아니긴 하다. 그러나 저자 스스로는 리비우스폴리비우스 등에 근거했다 주장하나, 스키피오에 대한 저자 개인의 과도한 찬사[5]스비어천가 수준으로 챕터마다 빠지지않고 자리잡고 있어서 역사서가 갖춰야 할 객관성이 부족하고, 무엇보다 카르타고 측의 병력 수 등 여러가지 수치가 현대의 정설에 비해 지나치게 부풀려진 점 때문에 주의해서 봐야 할 책이다. 마지막 부분은 무리수라는 평이 많다. 물론 스키피오가 최고 수준의 업적을 쌓은 명장이라는데는 이견이 없고, 다른 명장들과 딱딱 순위를 매겨서 "누구는 누구보다 명장"이라고 주장하고 싶다면, 그에 대해선 사료에 근거한 명확한 근거를 들면 된다. 그러나 전문가라는 인간이 다른 역사적 명장들을 역사왜곡 수준으로 폄하하면서까지 자신이 좋아하는 명장을 추켜세우는 일을 했으면 이는 비판을 받을 만한 일이다.

이러한 폄하는 책의 중간에서도 드러난다. "아시아의 오합지졸을 상대로 한 알렉산드로스 대왕, 야만족을 상대로 한 카이사르, 소화불량에 걸린 군체계 속의 온실장군들이나 노쇠한 공론가들을 상대로 한 프리드리히 대왕이나 나폴레옹 등과는 달리, 단 한 번의 예외를 제외하고 스키피오의 승리는 모두 일급의 적들을 상대로 한 것들이었다."[6] 그러나 한니발 외의 다른 카르타고의 장군들은, 스키피오 뿐 아니라 다른 로마 장군들을 상대로도 단 한번 빼고는 이겨본 적이 없다. 그 베티스 고지의 전투마저도 전술이나 군사학적 전략의 승리도, 빛나는 외교술도 아닌, 그저 매수로 인한 승리였다. 매수는 다음 번에 로마가 더 많은 금액을 제시하면 파훼되는 단순한 계략에 불과하다. 과연 이런 적들을 '일급의 적'이라 부를 수 있을까?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제국[7]을 정복했으며,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라는 같은 국가의 명장을 꺾었고, 그리스군과의 전투에서도 승리한 적이 있다.[8] 프리드리히 대왕은 합스부르크-프랑스-러시아 동맹의 압도적인 국력차를 자신의 재능을 통해 뒤집는데 성공했으며,[9] 나폴레옹은 코르시카 섬 하급귀족에서 자신의 군사적 능력만으로 황제가 되어 아예 전 유럽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 인물이다. 하나같이 스키피오가 상대한 적보다 강했으면 강했지, 그보다 약한 적을 상대하지 않은 명장들이다.

3.2. 타 명장의 전투에 대한 폄하

타 명장들이 벌인 전투들에 대한 폄하도 목격된다. "아르벨라[10], 칸나에, 파르살루스, 브라이텐펠드[11], 블렌하임, 로이텐, 오스테리츠[12], 워털루, 세단[13]. 이 모두가 아군이나 적의 실수 혹은 무지로 인해 승부가 결정되었다."면서, 그에 반해 스키피오는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의 작전을 모두 읽을 수 있었고, 오히려 한니발의 무기를 역으로 이용해 그에게 치명상을 입혔다고 서술한다.[14] 그러나 이는 역사적 사실과 다른 것이, 자마 전투에서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작전을 역으로 활용해 그를 궁지에 몰아넣은 것은 아니며,[15] 둘의 승부는 전투 전에 양 군의 전력 차[16]에서 이미 결정나있었다 봐야 한다.

그에 반해 리델 하트가 폄하하는 전투들은 워털루 전투 정도를 빼면, 누군가의 실수 때문에 우연히 이긴 전투가 아니라, 상대의 실수를 유도해서 이긴 전투들이다. 일부 전투를 예로 들자면, 아우스터리츠 전투의 경우, 나폴레옹은 일부러 자신의 우익을 빈약하게 하고,[17] 관측과 포병에 유리한 프라첸 고지를 비워둠으로써 연합군이 자신의 우익을 공격하게 유도했다. 그 결과 연합군이 우익을 공격할 동안 빈약해진 중앙(프라첸 고지)를 공격해 적의 중앙을 가르고 각개격파하는데 성공한다. 칸나이 전투는 로마군이 중앙돌파를 노릴 것을 예측하여, 로마 보병의 강한 공격을 받아내고 그들의 후방에 아군 기병이 공격할 시간을 벌기 위해 초승달 진형을 펼쳤다. 그로 인해 더 적은 수로 더 많은 적을 포위한다는, 포위섬멸의 전설을 남겼다. 로이텐 전투는 프리드리히 대왕이 오스트리아 우익에 기만공격을 하여 주공이 우익이라 착각하게 한 후, 재빠른 기동을 통해 종대로 길게 늘어져 측면공격에 취약해진 오스트리아군의 좌익을 강타해 무려 2배의 적을 물리친 전투다. 이렇듯 리델 하트가 늘어놓은 전투들은 적의 실수를 유도했다는 점에서 자마 전투에 못지 않거나 오히려 높히 평가받는 전투들인데, 이러한 전투들을 그저 한쪽 지휘관의 역량부족으로 인한 실수나 무지로 인해 거저 얻은 승리인 양 폄하하는 건 올바른 전사학자의 태도라 보기 힘들다.

3.3. 자마 전투의 한니발 군세에 대한 왜곡

자마 전투에 대해서도 편파적인 서술이 보인다. 리델 하트는 자신의 책에서, 한니발군의 병력 수는 5만에서 5만 5천 명 정도로 높여 잡는 반면, 스키피오군은 3만 6천 명 정도가 최고일 것이며, 그마저도 진지 밖에서의 소규모 전투로 병력손실이 발생한 탓에 실제 병력수는 그 이하였을거라 서술하고 있다.[18] 스키피오군의 경우 오늘날 사학계에서 전반적으로 합의된 병력 수[19]와 근접한 수를 제시하나, 굳이 그 뒤에 스키피오측의 병력손실을 언급하며 병력차가 더 벌어진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소규모 전투가 있었다면 그 상대는 한니발군이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한니발군에게도 병력손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한니발 측의 손실에 대해선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한니발군의 병력 규모를 역사학계 통설인 4만명이 아닌, 그보다 무려 1만에서 1만 5천이나 부풀린 수치를 제시한다. 그리고 그 추정치에 대한 뚜렷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다.[20]

이처럼 한니발군의 군세가 과장된 이유는, 리델 하트가 한니발이 아프리카 전역 당시 보유했던 정예군의 규모를 뻥튀기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21]이 일어나기 얼마 전, 아마도 휴전이 깨지고 있던 시점에 한니발은 오늘날 하마메트 만이라 불리는 렙티스에 2만 4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상륙했다."[22], "그러나 이제 그들은 한니발과 호흡을 같이하는 2만 4천 명의 빈틈없는 백전 노장들을 상대해야만 했다."[23] 한니발이 이탈리아에서 데려온 정예병은 1만 5천 명이라는게 정설이나, 리델 하트는 이를 만명 가까이 부풀린다. 1열의 용병도, 2열의 시민징집군도 아닌 3열의 정예군의 규모를 부풀린 이유는 자마 전투가 한니발에게 유리하게 시작됐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다. "이 순간에 승리의 여신은 분명 한니발 쪽에 있었다."[24]라는 표현으로 저자의 의도는 확실해진다.

이를 종합하면, 리델 하트는 '양은 물론이고 질적으로도 압도적 군세를 지닌 한니발이 훨씬 더 적은 병력의 스키피오에게 패했다'는 암시를 통해, 한니발의 이미지는 실추시키고 스키피오의 이미지는 드높이려는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역사 왜곡을 벌였다는 결론이 나온다. 리델 하트는 '전투의 달인이 더 위대한 달인을 만났다.'가 우리가 내리는 평결[25]이라며 개인적인 의견의 객관화를 시도해보나, 그의 저서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오류를 살펴볼 때 독자들이 그가 말하는 우리에 속할 이유는 없어보인다.

3.4. 기타 사소한 오류

그밖에 사소한 오류도 발견된다. "스키피오는 로디(Lodi)의 다리에서의 나폴레옹과 마찬가지로 그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하였다."[26]라고 했는데, 나폴레옹이 이와 같은 행동을 한 전투는 아르콜 다리 전투다. 로디 전투에서도 다리가 주요 전장이긴 했으나, 프랑스군 1만 7천여 명이 도주하는 오스트리아군을 후위하는 9천여 명의 적군과 벌인 전투였으며, 나폴레옹의 목숨이 위험에 처할만큼 격렬한 전투는 아니었다.


[1] 초급장교로서 1914년부터 1916년까지 2년간 전선에서 근무했으나, 전투 참가 기간은 단 7주였다. 이는 당대 장교들의 복무 기간 대비 전투 참가 기간으로는 짧은 축에 든다. 이후 전선에서 독가스 피해를 입어 후송, 이후 교육부대로 옮겼다.[2]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작전술/전술은 18세기 말의 나폴레옹 전쟁에 뿌리를 두고 있는 고전적 독일식 기동전의 현대적 적용에 불과하다. 전격전 문서를 참고.[3] 마침 적성국으로 부각된 소련 역시 독일군처럼 기동전을 장기로 삼았기 때문에 서방세계에선 이에 대한 우려 때문에 리델 하트의 견해에 크게 주목한 편이었다.[4] 병참술에 있어서는 나폴레옹을 우위에 두겠다고 할 정도였다. 참고로 리델 하트는 수부타이가 나폴레옹과 동급의 병참술을 지녔다고 언급했다 몽골제국의 병참술이란 곧 약탈이니 나폴레옹과 동급의 병참술이라는 말은 틀린건 아니다 그러나 리델 하트는 이조차 그냥 지나치지 않고 "나폴레옹은 앞선 역사를 통해 간접 경험을 쌓아 왔지만, 스키피오는 선구자의 위치에 있었다."(330쪽)라는 토를 단다. 스키피오 또한 알렉산드로스, 피로스, 그리고 한니발이란 선배로부터 교훈을 얻었을 것이 분명함에도 말이다.[5]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군사 경제학의 정수"(104쪽), 전략과 전술에서 동시에 최고의 경지에 오른 거의 유일한 예"(240쪽) 등의 표현이 수시로 등장한다.[6] B.H.리델 하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사이, 2010), 108쪽[7] 물론 당시 페르시아는 쇠락기에 있었고, 페르시아 전쟁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전성기 때조차 필리포스 2세의 군제개혁 이전의 그리스군들조차 끝내 이기지 못했다. 때문에 '제국'이란 이름치고는 약한 상대였다고 변론할 수는 있다. 그럼에도 카르타고보다 자원이 우월한 로마와 달리, 페르시아 제국은 마케도니아 왕국보다 더 부유한 국가였다.[8] 그의 유명한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란 말이 이 전투 이후에 나왔다.[9] 물론 프리드리히의 경우엔 이 매우 좋았다. 그러나 프리드리히에게 7년간 버틸 능력이 없었다면 그와 같은 기적을 맛볼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10] 가우가멜라 전투의 다른 이름으로, 틀린 표기는 아니다.[11] 책의 표기가 이렇다.[12] 책의 표기가 이렇다.[13] 책의 표기가 이렇다.[14] B.H.리델 하트, 2010, 240쪽[15] 굳이 한니발의 전술을 역으로 활용한 경우를 따지자면 전투 시작 때 코끼리 돌격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스키피오군의 나팔소리에 일부 코끼리가 놀라서 한니발군의 좌익으로 돌격했고, 이로 인해 좌익의 누미디아 기병(친 카르타고) 진영에 균열이 생겼다. 그때를 노려 스키피오 우익의 누미디아 기병(마시니사)이 이들을 향해 돌진하고 좌익의 누미디아 기병은 도주한다. 그러나 스키피오는 당시 시점에선 비어있는 한니발의 좌익에 특별한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 자신의 모든 우익 기병이 한니발의 좌익 기병을 추격했기 때문이다. 이는 반대로 생각하면 한니발이 스키피오의 우월한 기병을 전장에 일시적으로 이탈시켜 동등한 조건(보병 간의 대결)을 만들었다고 볼 수도 있다.[16] 보병의 전반적 질 열세, 기병의 양 및 질의 열세[17] 그러나 조콜니츠와 텔니츠는 실제론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었고, 다부의 3군단이 빈에서 강행군을 하고 우익으로 오고 있었다.[18] B.H.리델 하트, 2010, 226-227쪽[19] 대체로 35,100여명의 군세로 추정하고 있다.[20] "그의 전체 병력은 아마도 5만 명을 넘어 5만 5천 명 정도 되었을 것이다." 한니발 측 군세에 관한 해당 쪽수에서의 언급은 이게 전부다.[21] 카르타고가 휴전을 파기하고 특사를 공격한 사건을 뜻함. B.H.리델 하트, 2010, 119-204쪽 참고[22] B.H.리델 하트, 2010, 205쪽[23] B.H.리델 하트, 2010, 233쪽[24] B.H.리델 하트, 2010, 207쪽[25] B.H.리델 하트, 2010, 239쪽[26] B.H.리델 하트, 2010, 9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