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 라틴어: Titus Livius Patavinus[1] | |
생몰년도 | 기원전 59년 ~ 서기 17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파타위움 |
사망지 | 로마 제국 피타위움 |
지위 | 평민 |
국가 | 로마 제국 |
가족 | 가이우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아버지) 카시아 프리마(아내) |
직업 | 로마 제국 역사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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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역사가.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의 친구였으며, 클라우디우스 1세의 가정교사였지만 정치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무려 142권에 달하는 대작인 《로마사》의 저술에만 몰두했다.
2. 생애
생애 전반에 대해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리비우스의 역사서에서 자신에 대해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고, 그의 작품에 찬사를 보낸 다른 로마 작가들조차 리비우스가 어떤 인물인지는 별로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몇 가지 정보는 확인 가능하다. 리비우스는 아펜니노 지역에서 번영하던 파타위움(현재 파도바)에서 태어났다고 전한다.파타위움은 상업이 발달하고, 학문적으로도 발전된 도시였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지원 덕분에 기원전 49년 로마 시민권을 획득했지만, 로마 공화국 내에서도 원로원 중심의 공화주의적인 색채가 굉장히 강했고 상당히 보수적이었다. 파타위움은 카이사르 암살 이후 옥타비아누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패권을 놓고 다투던 시절에는 안토니우스에게 공개적으로 반발해 대항한 것으로도 유명했다. 리비우스는 이러한 고향의 영향을 받아 공화주의자로 성장했을 것이다.
그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가 집정관이던 해에 출생했다는 히에로니무스의 기록을 근거로 기원전 59년에 출생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로널드 사임은 히에로니무스가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피굴루스의 해'를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비불루스의 해'로 착각했을 수 있다며, 기원전 64년에 출생했다고 추정한다. 기원전 63년생인 아우구스투스와 친구 사이였다는 타키투스의 기록을 볼 때, 사임의 주장도 일리 있다. 그렇지만 학계는 대체로 기원전 59년설에 무게를 둔다.
중세시대에 파도바에서 발견된 비문에는 리비우스의 아버지인 가이우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가 언급되었지만, 그 외의 부모에 대한 정보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그리스 문학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추었고 수사학에도 재능이 탁월했으므로 유복한 집안에서 고등교육을 받았으리라 추측한다. 리비우스가 특별히 군복무를 했다는 기록은 없다. 내전이 종식된 기원전 30년 즈음에 로마로 상경한 뒤 필생의 역작인 《로마사》를 저술하기 시작한 듯하다.
그는 로마에서 별다른 직책을 맡지는 않았지만 역사, 철학, 수사에 관한 여러 작품을 저술해서 청중 앞에서 공개 낭독해 상당한 수익을 벌어들였다고 한다. 소 플리니우스는 리비우스를 보기 위해 히스파니아의 하데스에서 로마로 찾아온 인사를 언급하기도 했다. 예술과 문학을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와도 면식이 있었는데, 타키투스는 비슷한 나이대였던 두 사람이 친구였다고 기술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손자인 클라우디우스 1세를 교육시키는 역할을 리비우스에게 맡겨, 역사를 전문적으로 가르치도록 했다. 클라우디우스는 그의 영향으로 역사에 깊은 관심을 품고, 황제가 되기 전에 《에트루리아사》 등 여러 역사서를 집필했다. 다만 궁정 역사가가 되지는 않았고, 리비우스가 아우구스투스의 정치를 어떻게 평가했을지는 불분명하다.
대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리비우스는 40여 년간 역사서를 집필해 제국 전역에 널리 알려졌지만 죽을 때까지 집필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히에로니무스에 따르면 그는 서기 17년에 고향 파타위움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파도바에서 발견된 비문에 따르면, 리비우스의 아내는 섹스투스의 딸 카시아 프리마였다고 한다. 또한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고 하는데, 큰아들은 일찍 죽었고 작은 아들은 아버지처럼 문학 활동에 전념했으며, 딸은 수사학자인 루키우스 마기우스와 결혼했다고 한다.
3. 《로마사》(Ab urbe condita)
로마의 역사를 자기가 사는 시대에 이르기까지 쓰는 사업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최초의 로마 역사가로 알려진 퀸투스 파비우스 픽토르 이후 200년간, 로마에서는 역사 연구와 저술이 번성했다. 키케로의 친구이자 키케로의 서신들을 모아서 출판한 것으로 유명한 티투스 폼포니우스 아티쿠스는 트로이 전쟁 이래의 로마의 연대기를 집필했다.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는 백과사전적인 저작인 《신과 인간의 고대사》를 출판했다. 이렇듯 역사서 저술이 번성한 데는 로마 역사의 자긍심이 담겨 있었지만,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대변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다만 이들은 전부 공직을 역임했지만, 리비우스는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기에 특이하다. 그러다 보니 공식 기관에 보관된 《원로원 회의록》, 조약, 법률 등 수많은 공문서에 직접 접근할 수는 없었지만, 특정 정치 집단에 연루되지 않고, 나름대로 참신한 주장을 펼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파편적으로나마 전해지는 리비우스의 로마 공화국 말기의 사건 서술에서, 그는 폼페이우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를 높이 평가하는 등 공화주의자로서의 성향을 드러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 역시 오랜 내전을 종식하고 평화를 이룩한 것에 찬사를 보냈고, 사원의 대규모 복원과 고대 의식의 부활 조치를 높이 평가하는 등 좋게 봤다. 일각에서는 리비우스의 마지막 저서들은 아우구스투스의 정책에 대한 회의론으로 가득찼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가 붕어한 뒤에야 출간되었으리라고 주장하지만 근거는 불분명하다.
리비우스는 일생 동안 철학, 수사학, 문학 작품들을 여러 편 저술했다고 전하지만 오직 《로마사》만이 현전한다. 일반적으로는 원제가 《도시 창건으로부터》(Ab urbe condita)라고 알려졌지만, 사실은 분명하지 않다. 대 플리니우스는 리비우스의 작품을 《역사》(Historiae)라고 지칭했으며, 《도시 창건으로부터》라는 제목은 후기 필사본에만 나온다. 아마도 필사본의 각 책 말미에 있는
"티투스 리비우스의 창건 때부터의 책이 완성되었다."
라는 대목에서 차용한 듯하다. 리비우스는 142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으로 《로마사》를 집필했지만, 11~20권과 46~142권은 소실되어 다른 역사가들이 인용한 부분만 전해진다.이 책의 집필이 시작된 시기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제기된다. 전통적으로는 기원전 27년 이전에 저술을 시작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기원전 27년에서 25년 사이에 제1권이 출간되었다고 추정되기 때문이다. 이 제1권에서는 모든 전쟁의 끝을 상징하는 야누스 신전의 세 번째 폐쇄(기원전 29년)를 언급했지만 네 번째(기원전 25년)는 언급하지 않았으며, 옥타비아누스를 기원전 27년 1월 16일에 수여받은 '아우구스투스'라는 존호로 불렀다. 그러나 그 이전에 집필되었다가 나중에 수정했을 수 있다는 반론이 나왔다.
역사가 폴 버튼은 기원전 33년에서 31년 사이에 첫 번째 권이 집필되었을 거라고 추정했고, 오스트리아 역사가 발터 샤이델은 제3권과 제59권에서 언급된 아우구스투스의 기원전 28년과 기원전 8년의 인구 조사를 토대로 기원전 28년 이전에 집필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121권부터는 아우구스투스가 붕어한 후에 출간되었을 듯하다.
클라우디우스 1세에게 역사를 가르쳤던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리비우스는 역사를 교육의 수단으로 여겼다. 그는 서문에서 이러한 입장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는 독자 여러분이 우리 조상들이 살았던 삶의 종류, 정치와 전쟁 모두에서 로마의 권력이 처음 획득되고, 확장되도록 한 사람들이 누구이며, 어떤 수단을 썼는지에 훨씬 더 진지한 관심을 갖기를 권합니다.도덕적 쇠퇴 과정을 따라가서 오래된 가르침이 사라지도록 허용해, 도덕의 기초가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고, 그 다음에는 우리의 악덕을 견디거나 그것을 치료하는 데 필요한 구제책에 직면하지 마십시오. 역사 연구를 유익하게 만드는 주된 이유는 역사에서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분명하게 제시한 무한한 경험에 대한 기록이 있다는 것입니다.
리비우스는 로마인의 이상화된 특성을 다른 민족의 타락과 대조했다. 카르타고인은 배신을 잘하며 잔인하고, 자부심이 강하며 오만하다고 묘사했으며, 누미디아인은 신뢰할 수 없는 자들로 묘사했다. 또한 갈리아인은 경박하며 참을성이 없고, 오만하며 야만적이고, 에트루리아인을 배신자로 서술했다. 또한 한 지휘관의 입을 통해 시리아인을 전사라기보다는 노예라고 비하했으며, 그리스인들은 전체적으로 경박한 것으로 묘사했고, 아이톨리아인은 규율이 없고 충실하지 않다며 비판했다. 리비우스는 다른 민족들이 도덕적으로 타락했기에 로마인이 승리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으며, 전쟁은 항상 로마인에 대항한 자들의 행동 때문에 시작되었다고 기술했다. 그렇지만 그는 정복된 민족에 대한 로마인의 잔혹함을 인정했으며, 세월이 지나면서 로마인의 경건한 도덕이 쇠퇴하여 내전이 빗발쳤다고 여겼다.리비우스는 로마의 초기 역사에 관해 연대기 작가인 퀸투스 파비우스 픽토르,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프루기, 클라우디우스 쿼드리가리아, 발레리우스 안지아타, 리키니우스 마크라, 아엘리우스 투베오의 작품을 참고했다고 여겨진다. 포에니 전쟁 등을 치르면서 로마가 대내외로 뻗어나가던 시기에 관해서는 그리스인 인질이었던 폴리비오스의 저작을 대폭 수용했을 것으로 보이며, 기원전 2~1세기 후반의 사건에 관해서는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저서들에서 참고했을 가능성이 높다. 리비우스는 아우구스투스가 개인적으로 밝힌 증언을 언급하기도 했다.
리비우스는 당대의 대다수 로마 역사가들처럼 주로 선대 역사가의 저술에 의존했고, 개별적인 문서 연구는 거의 하지 않았다. 그는 기술된 사건의 진실에 대한 연구와 인과 관계 설정에 관심이 없었고, 단지 여러 버전 중 가장 그럴듯해 보이는 버전을 선택하여 따랐다. 정보의 개연성은 리비우스가 주관적으로 결정했다. 그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 문제는 고대의 사건에 관한 것이므로 진실처럼 보이는 것을 진실로 인식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가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출처가 믿을 수 없는 정보를 밝힐 때, 리비우스는 독자들에게 자신의 의심을 다음과 같이 알렸다."이 작가가 인용한 로마인과 리구리아인의 손실 숫자는 너무도 과장되어서 믿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가 거둔 승리가 컸음은 분명하다."
이런 성향이다 보니, 동일한 사건에 관련된 모순된 이야기가 버젓이 실리기 일쑤였다. 가령 쿠르티우스 호수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가 제1권과 제7권에서 전혀 다른 형태로 서술되어 있으며, 한니발 바르카의 카르타고 군대 규모에 대해 다섯 번이나 다른 버전을 인용했다. 그리고 지리 정보도 부정확할 때가 많다. 리비우스의 저서에서 설명된 한니발의 알프스 통과 경로는 비역사적일 뿐만 아니라 불가능하다는 평을 받는다. 또한 로마의 아픈 과거를 은폐하거나 축소하려고 시도한 정황도 종종 보인다. 현대 학자들은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가 로마를 약탈한 켈트족의 족장 브렌누스를 격파하는 대목의 신빙성을 의심하며, 리비우스가 갈리아인에게 패배한 집정관들의 이름을 고의로 없애버렸다는 의혹도 제기한다.이러한 오류 때문에, 19세기부터 리비우스의 역사가로서의 능력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가 대두되었다. 일부 연구자들은 그가 로마 역사의 각 시대에 대해 자기가 선택한 출처 외에는 아무것도 읽지 않았으며, 작품의 다른 부분에 있는 출처 간의 모순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으니 전적으로 믿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그렇지만 리비우스가 자료 부족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반론도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리비우스는 기원전 390년 갈리아인의 로마 약탈로 인해 초기 로마 역사의 사건에 대한 거의 모든 공문서가 유실되거나 왜곡된 경우가 많아서 수시로 참고해야 했던 로마의 명문 가문들이 보관하던 사문서 역시 서로 모순되는 부분이 허다했다고 한탄했지만, 대체할 사료가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싣는다고 밝혔다.
또한 가능한 한 합리주의에 기반한 해석을 지향한 흔적도 보인다. 가령, 아기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암늑대의 젖을 먹었다는 전설을 소개한 뒤, 두 형제를 창녀가 거두었던 것이 와전되었다는 이야기가 좀더 그럴듯하다는 투로 서술했다. 라틴어로 암늑대를 '루파'(lupa)라고 하는데, 로마에서 사용되던 은어에서도 창녀를 '루파'(lupa)라고 했다. 리비우스는 로물루스 형제 전설의 암늑대를 동음이의어로 해석한 것이다.
리비우스가 쓴 역사서는 역사적 인물에 초점을 맞추고, 그들의 성격을 드러내는 도덕적인 에피소드를 재구성했다.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가 베이를 함락시킨 전공을 세웠음에도 추방되었기에, 로마는 갈리아인에게 짓밟히는 대가를 치렀다고 밝혔다. 그리고 알프스를 넘어가는 한니발의 에피소드를 다소 장황하게 서술해, 그의 지략과 대담함을 독자에게 각인시켰다. 다른 역사가에 의해 인용된 키케로의 죽음에 대한 그의 서술은 키케로가 죽음을 받아들이고 담담히 최후를 맞는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한편, 리비우스는 문체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초기 로마 역사가들이 문화의 언어인 그리스어로 글을 쓴데 비해, 그는 로마의 역사를 자신들의 언어인 라틴어로 써야 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라틴어는 목적을 위해 사용될 수 있는 기성 양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인위적으로 양식을 만들어야 했다. 그의 라틴어 문체는 상당히 고풍스럽고 유연한 편이다. 어떤 때는 길고 주기적인 절로 장면을 묘사하고, 갑작스럽고 짧은 문장을 통해 인물의 신속한 행동을 묘사하기도 한다. 통지문은 건조하고 형식적인 언어로 쓰이는 반면, 전투는 시적이고 극적인 어휘가 자주 사용되며, 연설은 극적이고 사실적인 어조로 구성되었다. 비평가 퀸틸리아누스는 리비우스가 "우유 같은 풍부한" 문체를 서술한다며 살루스티우스의 뚜렷하고 간결한 문체와 대조했다.
리비우스의 《로마사》는 출판 당시부터 인기가 대단해, 그를 만나려고 먼 곳에서 로마로 찾아오는 이들이 줄을 이뤘다고 한다. 아우렐리우스 빅토르, 에우트로피우스, 플로루스, 그라니우스 리키니아누스 및 파울루스 오로시우스 등 후대의 역사가들도 리비우스의 저서를 주로 인용했다. 중세에는 너무 방대해서 필사본을 만들기에는 비용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많은 부분이 소실되었지만, 르네상스 시기에 로마의 역사에 대한 관심이 폭증하면서 리비우스의 《로마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되살아났다.
단테 알리기에리는 시에서 리비우스를 높이 평가했고,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리비우스의 《로마사》를 적극적으로 참고해 《로마사 논고》를 집필했다.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는 리비우스의 《로마사》에 나오는 에피소드들을 주제로 한 광범위한 예술 작품을 의뢰하기도 했다.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에도 리비우스가 자주 인용되었다. 19세기부터 《로마사》의 신뢰성 전반을 두고 비판이 제기되었지만, 초기 로마 역사에 대해 현재까지 전해지는 몇 안 되는 기록이기 때문에 현재도 중요한 역사서로 대우받는다.
[1] 프랑스어로는 '티투스 리비우스'를 "Tite-Live"라고 표기하는데, 프랑스 서적을 번역하다가 이것이 로마인 이름인 줄 모르고 "티트-리브"라고 곧이곧대로 옮겨 놓은 예들이 왕왕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