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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롱집단

무천진 관롱집단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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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발흥(북위에서 북주까지의 시기)2.2. 발전과 전성기(수나라에서 당나라 전기까지의 시기)2.3. 쇠약과 종결(무주에서 당나라 후기까지)
3. 관롱집단이 굴기한 원인
3.1. 반론
4. 참고문헌

1. 개요

관롱집단(關隴集團), 또는 관롱세족(關隴世族), 관롱귀족(關隴貴族), 관롱문벌(關隴門閥), 무천집단(武川集團)은 중국역사학자였던 천인커(陳寅恪, 진인각)가 제시한 개념으로, 남북조시대서위, 북주에서 통일왕조인 수나라, 당나라에 이르는 기간 동안 관중[1]과 농서[2] 지역을 기반으로 했던 문벌세족을 가리킨다. '관중'의 과 '농서'의 을 따서 관롱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호한혼혈(胡漢混血)과 문무합일(文武合一)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고, 당시의 지배층을 구성했으며 홍농 양씨의 수 황실과 농서 이씨의 당 황실 또한 관롱집단에서 나왔다. 청나라고증학자였던 조익(趙翼)이
북주, 수, 당은 모두 무천(武川)에서 나왔다.
라고 적고 있어[3] 관롱집단이 무천[4]에 기원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천인커는
"새외(塞外)의 야만적인 날쌔고 용감함의 피를 취하여 중원(中原) 문화의 퇴폐적인 몸에 주입하니 옛 더러움은 제거되었고, 새로운 기회가 다시 열려 확장하게 되니 마침내 예기치 못한 세상의 국면을 맞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라고 관롱집단을 묘사했다.[5] 또한 천인커는 여러 차례《유자산집》(庾子山集)을 인용하여 관롱의 사인(士人)과 선비족 호성(胡姓) 사이의 관계를 증명했다.

2. 역사

2.1. 발흥(북위에서 북주까지의 시기)

북위의 제3대 세조 태무제의 치세였던 연화 연간(432년 ~ 435년)에 선비계 유목민족인 유연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하여 수도인 평성[6] 이북의 장성연선[7]에 여러 개의 진(鎭)을 설치했다. 그중 비교적 중요한 진은 회삭진(懷朔鎭), 무천진(武川鎭), 무명진(撫冥鎭), 유현진(柔玄鎭), 옥야진(沃野鎭), 회황진(懷荒鎭)의 6진(六鎭), 또는 북진(北鎭)이었다. 북위 조정은 일부 선비 귀족들을 6진으로 옮겨 그들로 하여금 진민(鎭民) 및 무사(武士)가 되도록 조치했고, 진민 위에는 진장(鎭將)을 두어 해당 지역의 군사 및 정치를 관할하도록 했다. 당시 6진의 지위는 높아 6진의 진민인 자는 상당한 영예를 누렸으며, 또한 사환(仕宦), 복제[8] 등의 특권을 누렸다.

그러나 북위 제7대 고조 효문제 때 수도를 낙양으로 옮기자 6진의 중요성은 예전만 못하게 되었다. 멀리 변경에 있는 6진 소속 진민들의 한화는 지체되었고, 경제나 문화 부분에서도 점차적으로 약세를 보이게 되었다. 또한 효문제의 강력한 개혁 정책에 따라 6진이 누리는 특권은 취소되었고, 사회에서 차지하는 계급 또한 대폭 하락하니 도리어 남쪽으로 옮겨가 한화가 된 선비인들에 비해 차별 대우를 받게 되었다. 심지어 낙양의 조정은 범죄자를 6진의 병사로 배치시켜 6진을 유배지처럼 취급했고, 이 때문에 해당 지역에서는 한화 개혁에 대해 반감을 가진 자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북위 제8대 세종 선무제 때 6진에 기근이 들자 마침내 육진의 대란이 일어나게 되었으며, 북위 전역이 심각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육진의 난에서 이득을 취한 회삭진 출신의 한화된 선비족인 고환과 무천진 출신의 선비족이었던 우문태 두 사람은 각자 원씨(탁발씨) 황제를 옹립하여 북위를 서위동위로 분할했다. 우문태는 같은 무천진 출신을 금군(禁軍)으로 편성하고, 부병제를 실시했으며, 무천진 출신 인물에게 8위주국대장군[9]과 막하의 12대장군통령[10]의 직위를 부여하니 서위의 정권은 완전히 무천진 사람들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서위는 관중과 농서 지역을 주요 근거지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우문태는 관중을 위주로 한 정책을 실시했다. 이에 서쪽으로 옮긴 선비족 귀족과 원래 산동[11]에 본적을 둔 일부 한족 사족들로 하여금 관롱으로 본적을 고치도록 했고, 또한 해당 지역에 원래 있었던 한족 사족들을 중용하여 점차적으로 하나의 새로운 관중사족(關中士族)을 형성시켰다. 관중사족은 경조(京兆) 위씨(韋氏), 하동(河東) 배씨(裴氏), 하동 류씨(柳氏), 하동 설씨(薛氏), 홍농(弘農) 양씨(楊氏), 경조 두씨(杜氏)를 대성(大姓)으로 했다. 부병제에 의한 8주국과 관중사족이 바로 관롱집단의 시초였다. 8주국 가문은 우문씨 일족을 따라 관동의 동위에 대항했으며, 마침내 북주를 건국하여 고씨의 북제를 멸망시키고 북중국을 통일하는 큰 전공을 세웠다. 당나라 대에 이르러서도 사람들 사이에서는 8주국 가문의 영예가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가 되어,
"현재 문벌이라 칭하는 자들은 모두 8주국 가문을 받드는구나. 당시의 영광이여, 이와 비교할 수 없으리!"[12]
라는 말이 있기도 했다.

2.2. 발전과 전성기(수나라에서 당나라 전기까지의 시기)

북주의 영걸이었던 고조 무황제 우문옹은 폭정과 사치로 쇠락해진 북제를 멸망시키고 화북을 통일했으나(577년) 남조를 병탄하지는 못하고 병사했다.(578년) 뒤를 이은 고종 선황제는 도리에 어긋난 행위를 많이 했고, 오래지 않아 7살밖에 안 된 아들인 정제에게 양위한 후, 태상황이 되어 향락에 몰두했다. 이에 정사는 천원황후(天元皇后) 양려화(楊麗華)의 부친이었던 외척 양견에게 완전히 넘어가게 되었다. 북주 말기에는 이미 많은 한인(漢人)들이 군사와 장수의 직위를 점하고 있었고, 양견은 손쉽게 정권을 찬탈하여 수나라를 건국했다. 수 고조 문황제 양견의 부친이었던 양충은 북주의 28대장군(大將軍) 중 한 명이었고, 양견의 처였던 독고가라는 8주국 중 한 명인 독고신(獨孤信)의 7녀였다. 이를 보아 관롱집단의 각 가문은 혼인을 통해 상호 연계를 강화하고, 정치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제고한 것이었으니 결국 수나라가 북주를 대신한 일은 관롱집단 내부의 일차적인 권력 전이에 불과했다.

고구려 원정에서의 참패로 인해 수나라 말기, 사방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그중 8주국의 후예들인 이호(李虎)의 손자 이연과 이필(李弼)의 증손자 이밀이 병사를 이끌고 봉기했다. 이연의 모친은 독고신의 4녀였으므로 이연 또한 수 문제 양견의 처조카이자 수 양제 양광의 이종사촌형이었다. 즉 당나라 황실과 관롱집단, 수나라 황실 사이에는 꽤 밀접한 혈연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이연은 이러한 까닭으로 충분히 쉽게 수나라의 수도였던 대흥을 함락할 수 있었고, 마침내 중국을 재통일하게 되었다. 이는 관롱집단의 지지를 쟁취하는 일이 중요한 요소였음을 보여준다. 천인커는 이 사건을
"이씨 당나라 황실은 당나라 300년 통치의 중심이다. 고조, 태종이 창업한 때부터 고종이 다스리는 때까지의 전기(前期)는 그 장상(將相) 및 문무대신들이 대저 서위, 북주, 수나라 이래의 세업(世業)을 계승한 자들로 곧 우문태가 '관중 위주 정책'하에 결집한 집단의 후예들이다."
라고 평가했다.[13] 관롱집단이 핵심이 되어 기본적으로 수나라에서 당나라 초기까지의 정치 국면과 방향을 주도했으므로, 이 시기는 문벌정치의 특징이 확연히 드러나며 국가와 정권을 교체하는 사건은 관롱집단의 정치적인 지위에 전혀 영향을 주지 못했다. 수나라 때 이미 과거제가 실시되어 한문(寒門)과 서족사인(庶族士人)들이 점점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했다고는 하나 그 위치를 많이는 드러내지 못했고, 크게 성공하기도 어려웠다.

남북조시대 이래 사회에서는 문벌(門閥)을 가지고 개인 지위의 높고 낮음을 평가하고 결정하는 일이 유행했다.[14] 당나라 초기의 세족인 주요 4대 문벌들은 저마다 중시하는 것이 있었는데, 산동사족(山東士族)들은 혼인을 중시했고, 강좌사족(江左士族)들은 인물을 중시했으며, 관중사족(關中士族)들은 관면(冠冕)을 중시했고, 대북사족(代北士族)들은 귀척(貴戚)을 중시했다.[15] 수많은 세족 가문들 중 산동의 7성 10가(七姓十家), 즉 태원(太原) 왕씨(王氏), 범양(范陽) 노씨(盧氏), 청하(淸河) 최씨(崔氏), 박릉(博陵) 최씨(崔氏), 농서(隴西) 이씨(李氏), 조군(趙郡) 이씨(李氏), 영양(滎陽) 정씨(鄭氏)를 가장 현귀하다고 여겼으며[16], 심지어 당나라 초기의 명신들인 방현령, 위징, 이방(李昉)도 앞다투어 산동사족들과 혼인할 정도였다. 또한 이들 사족들은 당나라 황실을 대표적인 관롱집단으로 올림으로써 지위를 공고히 하고 세족 가문의 이름 순서를 개편하고자 하는 데 마음을 두었다. 당 태종 이세민은 즉위한 뒤《씨족지》(氏族志)를 열람하고 편성할 때
"나는 최(崔), 노(盧), 이(李), 정(鄭)씨에 대해서는 꺼리는 게 없지만 그들 세족의 쇠퇴함을 돌아보면 면관(冠冕)을 되돌릴 수는 없다. 오히려 옛 땅을 믿고 재물을 취하니, 불초자들이 거만스럽게 스스로 높은 체하는 것이다. 죽과 송가(松槚)를 팔면 되지, 왜 사람들은 그것을 귀하게 여기는 지 이해할 수 없다."
라며 불만스럽게 말하기도 했다.[17] 이에 고사렴(高士廉)에게《씨족지》의 편집을 명령하여 천하의 씨족들을 9등(等)으로 나누고, 1등은 농서 이씨 황족, 2등은 외척으로 정함으로써 황족은 최고 등급임을 표시하고 사족들을 폄척하며, 구 문벌 세력들을 억압했다.

2.3. 쇠약과 종결(무주에서 당나라 후기까지)

태종이 붕어한 뒤 관롱집단의 수장격이었던 장손무기는 스스로 당 고종을 옹립한 공을 믿고서 전횡하며 정적을 배척했다. 그런데 측천무후 무조가 고종의 총애를 얻게 되었고, 고종은 황권의 강화를 위해 원래의 황후였던 왕씨를 폐위하고 측천무후를 세우는 등 사건을 연달아 일으켜 이를 이용해 장손무기를 타도하고 정권의 핵심에서 물러나게 만들었다. 측천무후는 비록 관롱집단 출신과 관계가 있었지만 선조의 본적이 병주(幷州) 문수현[18]에 있어 관롱집단의 전통적인 지리 범위에서 벗어났으므로 가계상으로는 소원했다. 측천무후의 모친 양씨(楊氏)는 수나라 종실 출신이었지만 측천무후의 부친이었던 무사확(武士彠)은 원래 상인으로, 고조가 당나라를 세울 데 공이 있어 봉작을 받았지만 관롱집단의 세족 배경은 없었다. 따라서 측천무후는 정권을 공고히 다지기 위해 당시 당나라의 핵심이었던 관롱집단을 와해시키는 데 착수하여, 그 일환으로 혹리를 채용하고, 진사(進士), 문사(文詞), 시부(詩賦)의 과(科)를 숭상했으며, 문과 무(文武)를 분류(分流)하고, 관롱집단이 정권을 장악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품은 사인(士人)들을 등용했다. 당시 과거제는 시행되고 있었지만 향시에 급제한 자로서 고위직에 오른 자가 적었고, 주요 권직은 여전히 관롱집단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에 측천무후는 적극적으로 향시 및 진사에 급제한 자를 임용함으로써 그러한 국면을 곧 타파했다. 이후 측천무후가 중병에 걸리자 장간지(張柬之) 등이 중종을 복위시켜 무주를 폐지시키고,(신룡정변) 당나라 황실을 중흥시켰다.

개원 연간(713년 ~ 741년)에 당 현종은 무주 때 승진한 향시 합격자를 계속 임용했지만 천보 연간(742년 ~ 756년) 이후로는 점차적으로 이림보(李林甫) 등의 세족들을 고위직에 발탁하여 어느 정도 관롱집단의 통치가 회복되었다. 안사의 대란과 격렬한 우이당쟁(牛李黨爭)을 거치면서 관롱집단의 우월적인 지위는 급속히 하락했고, 과거 출신자가 조정의 요직을 차지하는 상황이 갈수록 보편화되었다. 이에 더하여 당나라 후기의 환관들이 정치에 간섭하기 시작하여, 병권을 장악하고 황제를 폐립하는 등의 정변을 벌이자 관롱집단의 영향력은 더욱 쇠약해졌다. 당 희종때 일어난 황소의 난 이후 수백 년을 이어온 사회계급이 당나라의 멸망(907년)과 함께 무너지자 전통적인 사족들은 거의 붕괴했고, 지방의 번진 세력들이 굴기하니 문벌정치는 더이상 지속되지 않았으며, 관롱집단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3. 관롱집단이 굴기한 원인

전한 무제 때 오직 유학을 높인 이래로 한나라 조정에는 경학으로 재능을 감별했다. 이에 경학자들이 조정에 들어와 관료가 되어 자제들에게 학문을 전수함으로써 계속 관리가 되었다. 이러한 방식은 가족에게 전해져 왔으며, 대대로 경학을 익힌 자만이 공경(公卿)이 되었으므로 후한 사회에는 이미 세습하며 관리가 된 명문귀족이 출현하여 사족(士族), 또는 세족(世族)의 전신이 되었다. 조위서진에 이르러 구품중정제가 실행되자 출신과 성씨가 인재 등용의 중요한 요건이 되었으며, 사족들의 관직 독점과 세습이 강화되어
'상품(上品)에는 한문(寒門)이 없고, 하품(下品)에는 세족이 없다'
라는 현상이 나타났다. 남북조시대에 이르러 각 왕조는 문벌들의 지지에 의존하지 않고는 안정을 얻을 수 없었으므로[19] 이러한 가문 중시의 사회 환경이 관롱집단 굴기의 기초가 되었다.

관롱 지역에서 서위 정권을 공고히 다지고, 국력이 비교적 강한 동위에 대항하기 위해 우문태는 관롱 위주의 정책을 실시했는데,
'산동(山東)과 강좌(江左)를 다시는 한화(漢化)의 중심으로 만들지 않겠다.'
는 의도였다. 이때문에 관중 지역이 주나라 이래로 문화의 정통성을 가졌다고 선전했으며, 북위의 고조 효문제가 실행했던 한화 정책을 대거 답습했다. 또한 관중의 사족을 중용하여 관동의 동위가 한화를 배척한 것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이와 같은 호한융합의 결과, 우문태를 따라 서쪽으로 들어간 선비족과 선비화된 한족이 최종적으로 한화되었고, 민첩하고 용맹하며 상무적인 민간 풍조가 관중사족에게도 스며들어
문무합류(文武合流)
와 사인(士人)들이 문과 무에 동시에 능한 기풍이 관롱집단의 큰 특징이 되었다. 이는 관롱집단이 남북조에서 성행한 세족정치 중에서 신속하게 굴기하도록 했으며, 결국 북주, 수나라, 당나라가 가장 강대한 정치적 역량을 펼치도록 했다. 또한 이 시기는 무인정치의 특징이 꽤 있었고, 이후 송나라의 특징인 문인정치와는 현저하게 달랐다. 사인들에게 문무겸비를 요구한 기풍은 무주 시기 과거제가 대두한 이후 점차적으로 쇠퇴했다.

3.1. 반론

천중몐(岑仲勉, 잠중면)은 관롱집단이라는 개념에 대해 반대하면서
"우문태를 따라 입관한 북족(北族)들이 비록 점점 하남군망(河南郡望)을 경조(京兆)로 고쳤다고는 하나 당나라 때 이미 그 하남군망을 대부분 회복했고, 당나라 황실은 실제로는 조군(趙郡)에서 나왔으니 또한 농서에서 어떻게 거리낄 것이 있으며 고치지 않는 것을 견지했겠는가? 천씨의 설명은 의심스러워 아직 믿을 수 없다.[20]"
라고 말했고, 또
"천씨가 반드시 승유(僧孺), 영호초(令狐楚)를 서위 이래 관롱집단의 밖에서 배출된 것이라고 하겠다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여 자신의 억견을 취하겠다는 것이다.[21]"
라고 했다.

하지만 왕롱쭈(汪榮祖, 왕영조)는 천중몐이 천인커가 말한 조주(趙州), 소경(昭慶) 이릉(二陵)과 《광업사비》(光業寺碑)에 대해 반증을 제출하지 못했으니 천인커의 설을 흔들 수는 없다고 했다.[22]

한편 황융녠(黃永年, 황영년)은 관롱집단이 서위, 북주, 수나라 초기에만 존재했고, 수 양제 때 정치적인 중심지가 동쪽으로 이동하여 원래 남조의 관료들이 들어와 북방의 관료들과 견제 및 균형을 이루었으므로, 점차 관롱집단이 쇠락하고 해체되어 당나라 초기에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당 고조 시기의 공신과 재상들 중 관롱 출신인 자는 반수에도 미치지 못하므로 관롱집단을 하나의 집단이라고 일컫기에는 부족하다고 했다.[23]

4. 참고문헌


[1] 關中, 현재의 산시성[2] 隴西, 현재의 간쑤성 동남[3] 《입이사차기》 권 15[4] 武川, 현재의 내몽골 자치구 후허하오터시 우촨현.[5] 《금명관총고 2편》[6] 平城, 현재의 산시성 다퉁시[7] 長城沿線, 현재의 내몽골 자치구 남쪽에서 허베이성 북부 일대까지.[8] 復除, 부역을 면제함[9] 八位柱國大將軍, 약칭 팔주국[10] 十二大將軍統領[11] 山東, 현재의 산시성, 허베이성, 허난성[12]주서》 기재(記載), 今之稱門閥者, 咸推八柱國家。當時榮盛, 莫與為比。[13] A 천인커,《당대정치사론술고》[14] 신라의 골품제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오히려 골품제보다 훨씬 광범위하고 세분화되었다. 일본은 심지어 그러한 제도를 19세기까지 공식적으로 유지했다. 출신 가문에 따라 조정에서 관직 진출의 상한선이 있었다.[15] (唐)柳芳:《姓系論》:山東之人質,故尚婚婭,其信可與也;江左之人文,故尚人物,其智可與也;關中之人雄,故尚冠冕,其達可與也;代北之人武,故尚貴戚,其泰可與也。[16] 산동사성. 이들은 심지어 당나라 황실조차도 그저 벼락출세한 근본없는 가문으로 여겼다. 아무리 높은 관직에 출세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평범한 가문 출신의 사람이 이들 가문들과 혼인을 하려면 막대한 재물을 일종의 지참금으로 지급해야 했다. 이들은 스스로 춘추전국시대부터의 명문가를 자청했는데, 그게 사실이 아니더라도 최소 한나라 시절의 족보는 확인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왕윤이 태원 왕씨, 노식이 범양 노씨, 최염 일가가 청하/박릉 최씨 출신의 《삼국지》시기 인물들이다.[17] 《구당서》권65 <열전> 제15.[18] 文水縣, 현재의 산시성 원수이현[19] 권신 사마소조위의 후폐제 조모를 백주 대낮에 길거리에서 우발적으로 살해한 이후 하내 사마씨의 서진이 개창된 뒤 남북조시대의 왕조들은 대부분 그다지 정통성을 내세울 여지가 없는 왕조들이었다. 애당초 집권의 명분이 없었던 서진은 부족한 정통성을 채우기 위해 명문 사족들의 세력을 인정하고, 그들의 지지를 갈망할 수밖에 없었으며, 가문의 격을 중시하는 풍조가 이로 인해 조장되었다. 팔왕의 난 이후 북조의 이민족 왕조들은 물론, 남조의 한족 왕조들 또한 대부분 찬탈자들이자 원래 가문의 격이 낮은 군인 출신들이 벼락출세한 경우였으므로, 더더욱 그러한 기존 세족들의 지지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20] 岑仲勉, 《隋唐史》, https://books.google.com/books?id=pt4lAAAAMAAJ&focus=searchwithinvolume&q=唐室如真出自趙郡, 1958, 文昌書局[21] 岑仲勉, 《隋唐史》, https://books.google.com/books?id=-t4lAAAAMAAJ&q=無非歪曲史實, 1979, 文昌書局[22] 《천인커평전》(陳寅恪評傳)[23] 黄永年:《关陇集团到唐初是否继续存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