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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사치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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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신구
1.1. 사치 긍정1.2. 사치 부정
2. 일제의 뇌물 거절
2.1. 사치 긍정2.2. 사치 부정
3. 명례궁
3.1. 사치 긍정3.2. 사치 부정
4. 진령군과 무속행사
4.1. 사치 긍정4.2. 사치 부정
5. 고종의 비자금
5.1. 사치 긍정5.2. 사치 부정
6. 언더우드에게 준 축의금
6.1. 사치 긍정6.2. 사치 부정
7. 표피 카펫
7.1. 사치 긍정7.2. 사치 부정
8. 민치록묘 이장
8.1. 사치 긍정8.2. 사치 부정

1. 장신구

1.1. 사치 긍정

릴리어스 호튼 언더우드 부인이 쓴 조선 견문록의 명성황후의 인상 중 '산호와 진주, 그밖에 보석들을 박은 기다랗고 정교한 황금 머리핀이 한두개 꽂혀있었다', '결코 차본 일이 없는 멋진 시계를 여럿 갖고 있었다'는 기록은# 소박함과는 거리가 멀다.

1.2. 사치 부정

사치 긍정에 첨부된 기사 내용에서 그 다음 문장에 따르면 '중전마마는 장신구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고, 거의 걸친 것이 없었다. (커다란 은고리를 즐겨 끼는 북쪽지방의 젊은 소녀들을 제외하고는) 조선의 여성들이 귀고리를 하는 경우는 없는데, 왕비도 예외는 아니어서 목걸이와 브로치 또는 팔찌를 한 것을 본 적도 없었다.'라고 적혀있어 편집되어 올려진 사치 긍정 문단의 내용만으로는 사치라고 볼 수 없다.

'결코 차본 일이 없는 멋진 시계를 여럿 갖고 있었다'라는 문장을 통해 사치를 부렸다는 주장이 성립되려면 '명성황후가 그 시계들을 과시를 위한 사적 용도로 구입했다'라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명성황후가 그 시계들을 가지고 있었던 연유를 추정해 보면 개인적인 용도로 구입, 해외에 파견갔다 온 신하들의 진상, 외국 사절 및 공사관의 선물 등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사적 용도로 구입한 이유라면 사치로 볼 수 있으나 나머지 이유는 사치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들이 외국사절로부터 진귀한 물건들을 선물받았어도 그걸 보고 사치라고 하지 않듯이.

오히려 그런 전제는 알 수 없는 반면에 '그런 멋진 시계를 여러 개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번도 차지 않았다.' 는 사실은 분명해 진다. 이는 멋진 시계로 치장하는 것을 한번도 하지 않았고 남한테 이를 드러내려는 과시욕 또한 없었음을 알려주는 문장이다.#

또한 영국의 여행 작가 이사벨라 비숍이 쓴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에 내용에 따르면 명성황후는 머리 장식으로는 왕관을 쓰지 않았으며, 모피를 가장자리에 단 검은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녀는 머리위에 진주와 산호로 만든 장식을 단것을 말고는 다른 아무런 치장도 하지 않았다. 라고 적혀있어서 사치를 부정하고 있다.

2. 일제의 뇌물 거절

2.1. 사치 긍정

이노우에 가오루 공사 역시 서신에서 약간의 뇌물임을 분명히 명시 했다. 이는 명성황후가 일제에 권력을 이양함보다 여흥 민씨 세력에 권력을 쥐어줌으로써 얻는 이득이 더 컸기에 내린 판단이라고 보는게 옳다.

2.2. 사치 부정

명성황후는 살해당하기 전 일본이 제시한 약간의 뇌물을 거부했다.# 이노우에 가오루 공사가 일본에 협조할 것을 대가로 명성황후에게 약간의 뇌물을 제시했으나 거절한 것이다.

3. 명례궁

3.1. 사치 긍정

무주의 명례궁(明禮宮)은 유사시에 사용할 목적으로 궁내대신 민병석이 무주에서 1890년에 착공해 건립한 행궁이다. 민병석이 무주부의 공물을 대납한 데서 나온 이익금으로 지은 99칸의 건물로 명례궁은 결국 무주 백성의 세금으로 건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민병석은 준공한 뒤, 토지 300마지기(60,000~90,000평)를 부속시키고 쌀 1,500석을 비축한 다음 명성황후에게 상납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가 을미사변으로 사망하고 다시 민병석의 개인소유가 되었다.

3.2. 사치 부정

해당 건은 민병석의 부정으로 해당 행궁은 명성황후가 지시해 건립한 것도 아니고, 쓴 적도 없다. 무주의 명례궁 건립과정에 민병석의 부정을 명성황후가 알았는지 여부도 알 수 없는데, 이는 민병석의 부정을 몰랐거나 내버려둔 책임의 문제이지 명성황후의 사치라고 하기엔 무리가 많은 주장이다.

4. 진령군과 무속행사

4.1. 사치 긍정

진령군은 명성황후가 임오군란때 도망치다가 돌아올 때 환궁을 예언하여 준 무당이다. 고종이 진령군이라는 군호를 내렸는데 매천야록에 따르면 진령군은 명성황후를 부추겨[1] 세자의 건강을 위해 굿을 하고 나라의 평안을 위해 금강산 일만 이천봉에 쌀 한 섬과 돈 열 냥을 바쳤다고 한다.

또한 당시 무속행사가 왕비의 직무였고 무속행사를 진행함이 사치의 근거는 아니라 하나 명성황후의 즉위 이후 명례궁의 예산이 크게 늘어난 이유로 무당과 승려를 통해 행해지는 고사, 차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명성황후의 무속에 대한 그 씀씀이는 비정상적인 측면이 있었던 것이다.

국사 편찬 위원회에서는 1955년에 한국 사료 총서의 제 1집으로 '매천야록'을 간행하면서 그 서문에 '우리나라 최근세사의 가장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 하였다.

4.2. 사치 부정

대대로 궁중에서 무속 행사는 고려나 조선이나 정기적으로 이뤄져 왔으며 조선에서는 성수청·활인서 등의 기관을 두고 무속행사를 주관하는 국무당을 두어 진행해 왔다.[2] 진령군은 왕실의 무녀가 되어[3] 명산대천에서 왕실의 축복을 기원하는 별기은제와 기우제 및 왕비나 태후들의 무제를 집전하고 궁중의 병굿도 담당하였다.

무제는 단군, 주몽 등 한국사의 시조신 등에게 국가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행사였고, 진전은 태조를 포함한 역대 조선의 임금에게 지내는 제사였다. 이는 역대 왕비들이 담당하던 직무였기에 무속행사를 두고 사치라고 보는 것은 논란이 있다. 이를 두고 명성황후가 사치를 부린 것이라고 본다면 역대 모든 왕비들이 사치를 부린 것으로 봐야할 것이다. 그리고 매천야록 금강산 1만2천봉에 재물을 바쳤다는 기록은 여타 교차기록이나 증거가 없는 풍문의 기록으로 신뢰하기 힘든 부분이다.[4]

또한 무교의 수요는 조선 후기에 점점 증가하여 19세기에는 민간, 사대부, 왕실에서 대중적으로 확산돼 있었다. 순조 대에 무격 수는 5000여명으로 추산하고, 1935년까지 12380명으로 증가한다. 특히 관우를 숭배하는 관우신앙은 진령군의 등장 전부터 팽배해 있었다.# 이같이 당대에 무교는 대중적인 종교로서 명성황후만이 특별히 무교를 신봉하던 사회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1894년부터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으로 인해 재정수입이 극도로 줄어들었다.[5] 청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세운 김홍집 내각에 반기를 든 을미의병까지 번지며 재정난은 지속된다. 그러자 김홍집 내각이 왕실의 권한을 축소시키고 재정 마련을 위해 무교행사가 사치라고 탄헌한 것이다.

소설가 이문열은 소설 명성황후를 펴내면서 다음과 같이 명성황후의 무속신앙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알려지기로는 황후는 미신에 깊이 빠져 무당을 君으로 봉하고 매사를 거기에 물으며 결정했으며 세자를 위해서는 금강산 일만 이천봉 봉우리 마다 쌀 한섬과 비단 한 필을 바치게 했다. 얼핏들으면 황당해 보이지만 이해하려고 들면 이해 못할 일도 아니다. 토속 신앙이 미신으로 몰리고 무당이 위험스런 사기꾼처럼 격하된 것은 일본인들이 들어온 뒤의 일이다. 당시로 보면 무속신앙과 그 주관자인 무당은 대중적으로 신봉되고 있는 흠집을 잡을데 없는 신앙체계였다. 금강산 일만이천 봉과 관련된 낭비벽도 그렇다. 외형상으로 거기에 바쳐진 쌀과 비단은 낭비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누군가 우리 백성이 먹고 입었을 것이다. 그러나 합리와 과학이라는 믿음위에 자란 친일은 그 몇십배, 몇 백배의 쌀과 비단을 일본으로 실어내 그들을 배불리고 따뜻하게 했을 뿐이다.
당시 유럽 왕실이 기독교의 수호자임을 자처하며 왕실행사의 일환으로 성당과 교회를 세우고 헌금하고 왕실과 국가의 평안을 빌었듯이, 무교가 한국 전통의 종교로서 민간에서부터 왕실의 행사였던 것은 서양과 일본인에 의해# 미신으로 매도되기 전까지는 자연스러운 종교 활동이었던 것이다.

5. 고종의 비자금

5.1. 사치 긍정

명성황후가 죽은 것은 1895년이었고 고종은 그 이후로 약 12년 동안 더 왕위에 있었으며 퇴위한 이후로도 12년을 더 살았으니 고종이 비자금을 축적할 시간은 많았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명성황후가 생전에 사치를 부렸다 해도 비자금을 모으려면 충분히 모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명례궁 사례나 무속 사례 에서 보듯 명성황후의 사치는 내탕금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여흥 민씨 외척의 부정부패로 모은 여흥 민씨 가문의 자체의 부나 국고 세금을 소비한 것이 많다.

5.2. 사치 부정

명성황후의 사치설을 부정하는 가장 큰 근거는 고종의 비자금이다.[6] 고종의 비자금은 신무기 구입, 전기 및 전화 설치, 은행 설립, 제중원 건립 등에 쓰였으며 일제강점기시절에는 대한독립군의 주요자금으로 쓰였다.# 이 비자금은 매관매직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마련한 것인데, 황후가 사치가 심했다면 고종에게 이런 거액의 비자금이 존재할 수가 없다.# 매관매직으로 벌어들인 돈이라는 것이 논란의 여지는 될 수 있어도 명성황후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해 쓰였는지는 논란이 있다.

6. 언더우드에게 준 축의금

선교사이자 제중원의 의사인 릴리아스 언더우드는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와 결혼할 때 명성황후로부터 축의금으로 100만냥을 받았다는 내용을 책에 썼다. KBS 역사저널 그날 '명성황후' 편에서는 이를 다루면서 출연자들이 1895년 조선의 세입이 480만냥이었다고 한 말을 자막으로 덧붙였다.

파일:Screenshot_20200618-221152_YouTube.jpg
출처

파일:Screenshot_20200618-221737_YouTube.jpg
출처

한때 이를 캡쳐한 짤방을 활용해 이것이 명성황후 사치의 증거라는 글이 인터넷 커뮤니티나 블로그에 퍼졌다.

6.1. 사치 긍정

일단 1895년 조선의 세입이 480만이란 건 틀렸지만 그 백만냥이 작은 금액이라는 뜻은 아니다. 한성주보의 당시 물가표에 따르면 언더우드가 결혼하던 1880년대 후반에 이르면 쌀 한 섬이 평균 90냥이고 100만냥이면 당시 조선에서 쌀을 11,111섬을 살수 있는 금액이며 이는 쌀 1,600t에 해당한다. 약 3천명이 1년간 먹을 식량에 해당하는 돈을 일개 선교사의 결혼식에 선물로 준 것이다.

6.2. 사치 부정

1895년 조선의 세입이 480만이 아니라 480만이고 1889년 릴리아스가 받은 돈은 100만이 아니라 100만으로 화폐 단위를 헷갈려 벌어진 촌극이다.

먼저 고종실록에 기록된 1895년의 세입은 480만이다. # 1원=100전이고 1냥은=10전이다. 조선의 화폐 단위가 냥에서 원으로 바뀐 것은 1882년이었다. 원과 냥이 쓰인 시대가 달라 가치가 같진 않지만 최소한 1원=10냥이었다. 실록에 기록된 세입액 마저 왕실 재정인 내탕금은 포함하지 않았기에 국가 전체의 세입액도 아니었다.[7]

게다가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지역)과 청일전쟁(충청도, 평안도 지역)으로 경기도 외에는 세입이 전혀 되지 않는 등 재정수입이 파탄이 나버리는 것으로 정점에 이른다. 이후 을미의병의 발생으로 김홍집을 비롯한 갑오내각에 반기를 드는 민란이 지속되고 이를 진압을 하러다니는 등의 혼란으로 인해 재정난이 지속된다. 즉 1895년의 세입은 통상적인 이전 세입에 비해 극도로 축소된 금액이지 정상적인 세입이 아니었단 것이다.

1883년 당오전의 발행과 1892년 백동화의 발행으로 인해 화폐의 가치가 엄청나게 변동하던 시기이다. 당시의 인플레이션 실태를 보여주는 사진. 150달러를 환전한 양이다. 또한 1895년에 쓰인 화폐는 냥이었고 1902년에 대한제국 원이 쓰였으며, 1904년 화폐정리사업을 거쳐 1905년부터 조선 원(엔)이 통용된다. 이 과정에서 구화는 여러차례 가치절하되어 환전되었고 1935년에 고종실록이 완성되는데 이 과정에서 기록된 480만원은 40년 전에 쓰인 탁지부 예산인 냥의 가치를 원으로 바꿔 기록하는 과정에서 제대로 환산하지 못했을 확률이 크다.

여러 번역본에서 릴리아스 언더우드가 100만냥을 받았다고 쓴 대목의 전체 내용은 이렇다.
“그 소중한 날(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와 결혼하는 날) 아침에 조랑말들의 방울소리가 우리 앞마당에서 들려왔다. 나는 곧 그 앙증맞은 짐승들의 긴 행렬이 중전마마의 선물을 잔뜩 싣고 도착한 것을 알았다. 자그마치 현금 백만냥이었다. 꼭 ‘아라비안나이트’ 속의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그때에는 2,500냥에서 3,000냥이 1달러쯤 되었기 때문에, 그 돈은 너그러운 조선 왕비께서 손쉽게 주실만한, 또 선교사 한 사람이 쉽게 처리할만한 액수였다. 두 분 마마께서는 우리의 혼례에 나인 네댓 사람을 보내 주었다. 군대에서는 아주 계급이 높은 한규설 장군이 대표로 왔고, 내각에서는 왕비의 가까운 친척이며 두 분 마마께 가장 신임을 받고 있는 민영환이 참석했다.”#

그런데 원문을 보면
One million cash! It sounds like “Arabian Nights,” but as at that time 2,500 to 3,000 cash went to the making of the dollar, it was not, after all, more than a generous Korean queen might easily give, or a missionary easily dispose of.#

100만 cash라고 나온다. 이 cash가 어떤 화폐 단위인지 제중원 규칙에서 알려주는데
제중원은 개원한 후에도 몇 달 동안 건물 설비를 갖추는데 400 000푼(cash) 즉 222달러 가량을 사용하였다. 이는 1800푼[文]이 1멕시코 달러(Mexican dollar)라는 뜻이다. 주지하듯이 당시 조선에서 사용된 화폐단위는 1냥(兩)=10전(錢)=100푼[文]이었다 그런데 병원 규칙을 싣고 있는 한성주보(漢城周報) 2호(1886년 2월 1일자)와 알렌의 일기 1885년 4월 3일자에서는 상등 환자의 하루 입원료를 10냥 과 1 000cash 라고 각각 표현하고 있다 다시 계산하면 1cash는 1푼[文]임을 알 수 있다. ) 아울러 당시 기록에 의하면 1달러는 1883년에 350푼[文]이었다가 1891년에는 3 400푼[文]으로 감가되었는데( British Consular Reports 1892[오두환 1991 한국근대화폐사 한국연구원 76쪽에서 재인용]) 이러한 환율 변동은 1886년에 씌여진 위 보고서의 환율과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1884년 10월 1일자 알렌의 편지에 의하면 당시 통용된 달러는 멕시코 달러를 가리킨다17쪽 주

1886년 제중원 규칙에 의하면 cash는 푼[文]이었고 1800푼=1달러, 1891년에는 3400푼=1달러였던 것이다. 릴리아스가 결혼한 해는 1889년이었고 릴리아스가 말한대로 당시는 2500~3000푼이 1달러였기 때문에 위의 환율변동상황과 일치한다.

즉 릴리아스 언더우드가 100만냥을 받은 것이 아니라 100만푼을 받은 것이고 100만푼은 1만냥이었으며 333~400달러 쯤을 받은 것이다.

릴리아스는 2,500푼~3,000푼=1달러 쯤, 왕비께서 손쉽게 줄 만하고 선교사 한사람이 쉽게 처리할만한 액수라고 덧붙였는데 앞뒤 자르고 100만냥과 조선 정부 한해 세입이 480만냥이라는 것만 따오니 해당 캡쳐만 보면 오해하기 쉽도록 선동한 셈이다. 그리고 이는 선교사 1명이 쉽게 쓸 수있는 금액인데 조선의 한해 세입이 아무리 작아도 선교사 5명이 쉽게 처리하는 금액밖에 안될까? 그럼 당시 물가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한성주보의 물가표는 해당 뉴스의 연구자가 말했듯이 해당자료가 라브루즈가 제시하는 ① 자료의 수가 많을 것, ② 연관 자료는 상호간 통제 가능할 것, ③ 기록이 규칙적일 것, ④ 감사를 거친 기록일 것이란 네 가지 근거를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고 얘기하고 있다. 농산물 가격의 경우 불규칙변동이 많고 순환변동과 계절변동이 중복되어 나타나 이들 요인을 분리하여 산출하기 어렵고, 특히 결측치(결손자료)가 많아 전제조건이 결여될 경우 통계적 분석이 요구하는 데이터의 조정은 자칫 허구의 역사상을 연구자에게 안길 위험성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 해당 자료는 실거래가의 기록이 아니고 정부가 매해 발표하는 가격이란 것이 약점이다. 현대에도 정부가 발표하는 공시지가와 실거래가가 따로 노는 것과 비슷한 경우인 것이다. 그 기록의 추정치로 나온 쌀 11000여석이 사실이라면 릴리아스에게도 엄청난 거액이지만, 정작 당사자는 그렇게 큰 금액은 아니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 정도의 가치를 줬다면 승정원 일기나 실록 등 여타 문서에 기록될 만하고 고종이나 각료의 논의 과정이나 반대가 있을 법도 한데 오직 릴리아스의 기록에만 나오는 점에서 해당 쌀 추정치만큼의 금액은 아니라는 것이다.

당시 실거래가에 대해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는데 갑신정변 당시 민영익을 치료한 호러스 뉴턴 알렌이 남긴 기록이다.
1884년

집 계약 완료 45만푼, 365달러
중국인 청지기: 월급 15달러
일본인 요리사 와타나베: 월급 10달러
집 수리 기간동안 조선호텔 숙박비: 하루 1.5달러
알콜 중독자 핼리팩스를 위한 식량과 땔감: 60달러

1885년

민영익이 우정의 표시로 지불한 돈: 10만푼
무명옷 한 벌: 12원 50전
닭고기 한 마리: 20센트, 생선값은 닭고기와 같음
두 그릇 분의 쇠고기: 10센트
하루 한 칸의 방을 데우기 위한 말 한 마리의 나뭇바리: 30센트
하룻밤 집 한 채 난방비: 1달러
민영익에 대한 의료비: 100달러 청구(나머지는 의료봉사)청국 병사에 대한 진료비: 215달러 청구
일본 공사관 의사로서 의료활동: 연 500달러 받기로 함
묄렌도르프와 체결한 해관총세무사부 의사: 연 720달러 받기로 함
데니 판사를 고종의 외교 고문관으로 부임: 연봉 7,000달러 예상
조선 정부가 미국으로부터 교사 3명, 농업 전문가 1명 고빙: 월급 160 달러 -#
1883년 5월 서울 정동에 미국공사관 부지를 매입한 주조선미국공사 루셔스 푸트(Lucius Foote)는 2200달러를 지급했는데 이게 약 1만냥에 해당한다고 기록됐으니#신동아 #프레시안, 1883년에 $1=4.5냥 하던 환율이 1883년부터 당오전백동화가 초래한 인플레이션 때문에 1889년에 2500~3000푼으로 치솟은 것을 알 수 있다. 알렌은 1884년에 집 계약을 하는데 "45만푼, 365달러"라고 적었다. 45만푼=365달러라고 계산하면 $1=1232푼으로, 달러당 4.5냥에서 2500푼으로 향하는 구간에 해당하는 값이 맞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환산하기에 앞서 집 1채 계약에 45만푼인 것에서 조선의 1년 세입이 480만냥이란 주장은 이미 말이 안되는 엉터리라는 것을 알수 있다. 그리고 1895년 국가예산으로 1889년 90만푼 하는 집을 53채 밖에 못 계약한다는 소리다. 또한 자신이 조선의 해관총세무사부 의사로 받은 연봉은 720달러인데 환산하면 88만 7,000푼이 된다.

그리고 데니판사가 받은 연봉 7,000달러는 5년 뒤인 1889년 기준으로 1,700만푼을 받은 것인데, 무려 언더우드 부인이 받은 축의금의 17배에 해당한다. 그럼 이건 조선 한해 세입의 3.5배에 해당하는 연봉을 준 것이 된 셈이다. 해당 프로그램의 오류인 480만냥을 480만원으로 바로잡아도 170만원이 되니 당시 정부예산의 480만원의 35%를 받았다는 얘기가 된다. 정부가 돈도 없는데 저런 연봉을 줄리가 만무하니 이는 1884~1889년과 1895년의 정부 세입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

종합해 보면 릴리아스 언더우드가 명성황후로부터 받은 결혼축의금 100만냥은 잘못된 번역으로 100만푼이었으며 100만푼의 가치는 333~400달러로 832~1000마리의 닭고기 또는 생선을 구입가능한 금액이자, 정부가 고용한 미국인 교사 월급의 2~2.5배의 금액, 고종이 외교 고문으로 고용한 데니 판사 연봉의 17~20분의 1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릴리아스 언더우드가 기록한 그대로 아라비안나이트 이야기처럼 엄청나게 많은 돈 같지만 선교사인 자신이 쉽게 쓸 정도의 축의금을 준 것이지, 무슨 조선정부 한해 세입의 4분의 1 또는 5분의 1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금액을 준 게 아닌 것이다.

실록에 기록된 왕의 부조 물품을 보면 대신들에게 종이 50~100책과 함께 미두 50~100석을 하사한 사례, 그리고 지방의 가장 작은 관직을 맡은 자라도 장례가 있으면 왕이 부의를 내리는 사례는 흔하게 나온다. 릴리아스 언더우드는 제중원의 의사이자 명성황후의 주치의로 그의 소득에 적정한 333~400달러에 해당하는 축의금을 받은 것이다. 이같은 호의에 대한 결과로 언더우드 부부는 을미사변 이후 신변을 위협받는 고종을 위해 음식을 직접 만들고 자물쇠로 잠긴 철가방에 담아 일본과 흥선대원군 측이 장악한 경복궁을 왕래하며 배달하는 등 고종의 안전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후 릴리아스 언더우드는 한국인에게 호의적으로 살다 한국에서 생을 마감했으며, 그의 남편인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역시 초대 개신교 장로이자 연세대학교 설립자로서 일제 치하에서도 한국인을 위해 살다 죽었다.

이후 언더우드 부부의 노력이 인정되어 대한민국의 건국훈장을 수여받은 독립운동가로 정부 대신 이상의 공적이 있는 인물들인 것이다. 그들의 결혼을 축하하는 축의금으로서, 명성황후가 내린 릴리아스 언더우드의 결혼 축의금 100만푼은 당시 그 금액으로 살수있는 물건의 가치와 선대 왕이 내린 부의와 비교해 볼때 사치를 부린것이다고 주장할만큼 지나친 금액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7. 표피 카펫

7.1. 사치 긍정

명성황후는 표범 48마리 가죽을 연결한 카펫을 가지고 있었다. 현재는 사라졌지만 여러 언론에서 명성황후의 것이며 실존을 확인한 제품이다. 일설에 의하면 외국에서 선물로 준 것이라고 하지만 정식적인 외교 절차나 궁정행사로 받았다면 어떤식으로든 실록에 기록되었을 것이나 실록에서는 찾아볼 수 가 없다. 이는 명성황후가 사사로이 이 카펫을 취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카펫의 가치는 현재 가치로 2만5천달러에서 10만 달러정도로 추산된다.

7.2. 사치 부정

사라졌다던 표범 카펫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었고사라졌다던 표범카펫, 중앙박물관 소장 확인 미국 정부의 전후(戰後) 보상업무 기록에 따르면 이 카펫은 1951년 하반기에서 1952년 상반기 사이에 주미 한국 대사관을 통해 한국으로 반환된 것이었다.

그리고 국립중앙박물관이 전문가들로 자문위원회를 열어 카펫을 감정한 결과 대한제국 선포(1897) 이후 제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표범가죽 카펫에 새겨져있는 오얏꽃 문양은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꿀때 사용한 대한제국의 상징인 것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 표범가죽, 명성황후 카펫 아님
국립중앙博 "표범카펫, 명성황후와 관련없다"

대한제국의 건립은 을미사변 2년 뒤에 일이고, 성리학 질서에 따라 검소를 미덕으로 여겨 청백리를 숭상하고 황금이나 희귀동물 모피 같은 드러나는 사치를 경계하던 조선과는 달리, 유럽이나 일본 같은 외국에 위상에서 얕보이지 않고 않고 황실의 위상을 내세우기 위해 실내 장식을 화려하게 꾸미는 풍조는 대한제국이 들어서면서 였다. 해당 카펫이 명성황후가 쓰던 것이라는 것은 미국의 <라이프>라는 신문에서 나온 내용이며, 이는 주미 한국 대사관이 카펫을 찾기위해 황후가 쓰던 카펫이라는 홍보를 그대로 따른 기사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게다가 국립중앙박물관은 한국 표범을 잡아만들었다는 의혹과는 달리 북중국표범의 가죽인 것도 밝혀냈다.

8. 민치록묘 이장

8.1. 사치 긍정

진령군의 입김이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명성황후는 아버지인 민치록의 무덤을 네번이나 이장한다. 지금 일반인들도 한번 이장시에 150만원에서 600만원의 이장비가 드는데 왕비의 아버지의 묘를 이장하는데 드는 비용은 더 들었을것이다. 금액이 작아보이지만 당시 조선은 군인들 월급도 못 줄 정도로 궁핍하던 시절이다.

8.2. 사치 부정

김대중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선친 묘를 이장했으며, 이회창은 3번이나 조상 묘를 이장했는데,# 이를 보고 사치부린다고 문제 삼는 사람은 드물다. 하물며 조상에 대한 예의와 풍수지리, 무교가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던 조선에서 이장은 후손이 마음에 들때까지 진행함으로써 지금보다 훨씬 빈번했었다.# 이를 두고 사치라고 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1] 조선에서 궁 내의 무속행사는 왕비의 직무였다.[2] 기은제를 주관한 것은 성수청에 소속된 국무당이었을 것이다. (무속, 신과 인간을 잇다 - 국사편찬위원회)#[3] 진령군은 국사, 국사당으로도 불리고, 실록 위키에서는 국사당과 국무당을 동의어로 지칭하고 있다.[4] 이태진 교수는 매천야록에 대해『역사 소설 속 명성황후의 이미지』논문에서 "왕비의 미신 행위와 낭비벽에 대해서는 황현의 『 매천야록 』 에도 비슷한 비판이 있어 이는 지금도 의심 없는 사실처럼 간주되고 있다. 『 매천야록 』 은 기록 형식상 고종 즉위부터 갑오 이전까지의 수문수록 隨聞隨錄( 들은 대로 적은 것) 으로 된 것과, 그 이후 강제병합까지의 일기체 두 가지로 나뉜다. 기록 방식으로 봐도 전자는 후자에 비해 사료적 가치가 낮을 뿐 아니라, 황현은 소론 계보에 속하는 인물로 당색적으로 왕비의 노론계 출신 성분에 대해 비판적이다. 심지어 고종까지도 노론 두둔 성향을 가졌다고 비난하는 대목도 보인다. 그러므로 당색적 취향을 강하게 보이는 ‘ 수문수록 ’ 형식의 글로서 절대적 평가를 내리는 것은 위험하다." 라고 평했다.[5] 청일전쟁과 농민전쟁의 영향으로 인한 전국의 세입상황을 살펴보면 평안·황해 2도는 청일전쟁으로 유린당하고, 전라·충청과 경상도의 절반은 농민군과 관군에 징수당하고, 강원도는 산악이 많고, 함경도의 징세는 변경수비 군수에 충당하였다. 따라서 조선은 재정이 궁핍하게 되었으며, 서울과 경기 일원을 제하면 조세 징수 자체가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당해 년도의 세입은 세출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6] 어째서 비자금 및 재정의 이원화를 추구했냐면 당시 영일동맹이 맺어진 상황 속에서 브라운 총세무사가 구한말 주요 세입이었던 해관을 움켜 잡고 있었던데다가 시시건건 개화 사업에 대해 방해를 했기 때문이다. 그 유명한 흑자 300만원 역시 추진 중이던 사업을 날려버리고, 세수 관리 및 지방의 치안을 유지하던 군대와 이서층을 대규모 정리하면서 나온 산물이다.[7] 내탕금은 탁지부가 아닌 내장원에서 관리하고 정부 회계에 잡히지 않는 돈이었고http://newsteacher.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6/05/2017060500003.html 일본이 갑오개혁 때 심은 맥리비 브라운이 탁지아문 재정을 장악하면서 내탕금은 비중은 더욱 커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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