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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1 22:58:08

백동화

1. 백동으로 만든 동전2. 대한제국의 화폐

1. 백동으로 만든 동전

대한민국 원 중에는 백원 주화오백원 주화가 여기에 속한다.

2. 대한제국의 화폐

파일:20170830_두돈오푼.jpg
<colbgcolor=#C5AA65> 백동화(두돈오푼[1][2])

1892년부터 1901년까지 발행한, 구한말백동으로 만든 흰색 동전이자 조선 최후의 화폐.[3] 1번 항목의 백동화에도 속한다. 한글로 '두돈 오푼'이라고 쓰여 있으며, 엽전 25개의 가치를 가지고 전환국에서 제조되었다.

조선은 원래 금속화폐 대신 쌀과 면포를 화폐로 사용하는 경제였다. 구리는 전부 수입품이었기 때문에 동전을 만들어서 쓰기에는 아까운 금속이었다. 당백전의 피해가 생각보다 크지 않았던 데에는 이런 경제 구조가 한몫했다. 그런데 개항이 되면서 쌀 가격이 외국 경제에 맞추어 춤을 추기 시작하고, 외국산 공장제 면직물이 들어오면서 화폐로 쓸만한 물품들이 멸망하는 결과가 나왔다. 조선 정부는 두가지 선택의 기로에 놓였는데, 엔화같은 외국 화폐를 써서 처음부터 경제적으로 종속되느냐,[4] 아니면 금속화폐를 큰 돈들여 새로 만드느냐 둘 중 하나였다. 자세한 것은 당백전의 변론 문단을 참조.

조선 정부는 주조차익도 누릴 겸 금속화폐를 만들기로 결정하고 전환국을 세웠다. 그런데 한참 돈이 없던 조선 정부는 전환국의 비용 대부분을 일본으로부터 빌려서 충당했다. 일본은 이것이 조선을 종속시키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나서서 대출해 주었다.
마스다 씨는 장래를 생각할 때 어떻게 해서든지 일본과 깊은 관계를 맺어두지 않으면 아니된다는 입장에서,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일본 정부가 무슨 명목을 붙여서라도 이 전환국의 건축비의 약간이라도 보조해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마스다 씨는 먼저 오미와 씨를 동경으로 보내서 일본 정부의 당국자들을 설득시키기로 했다.
『시부사와 에이이치 전기 자료』, 김석원, 『일본의 한국 경제 침략사』중 발췌.

전환국은 설립 자금부터, 재료비, 주조 기술자 등등 죄 일본산이었다. 따라서 새 화폐도 일본 돈을 기준으로 삼았다. 대한 제국은 일본의 은본위제를 받아들여서 일본돈 1원의 가치를 5냥으로 삼고, 1냥 = 10전(돈) = 100푼이라는 체계를 잡았다. 1냥(한량)과 5량(닷량)은 은화, 2전5푼은 백동화, 5푼은 적동화, 1푼은 황동화로 제작되었다.

그런데 2전 5푼 백동화만 유명한 것은 가치에 비해 제조 비용이 낮아 정부가 재정 보충을 위해 마구 발행하였던데서 시작한다. 제조 비용이 낮은데 명목 가치가 높으니 위조의 유혹 또한 제일 컸다. 결국 광범위한 위조를 불러와 흥선대원군 시대의 악명 높았던 당백전은 비교도 안되는 심각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게 된다.

백동화는 근대 화폐였기 때문에 기존 상평통보 위조 기술 정도로는 밀조가 불가능했으며 조선 정부도 마찬가지. 그러나 전환국의 주조 기술은 일본에서 왔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밀조가 가능했다. 그리고 일본에서 밀조된 백동화와 제조 기계가 조선으로 넘어가기 시작한다.
요즘 오사카 지방의 금속 회사들 가운데 백동화를 만들어 완제품으로서 1개에 1전 5리 내지 2전의 가격으로 대거 밀수입을 시도하는 자가 있으며, 이제 인천을 비롯해 각지의 일본 상인은 이 일에 관여치 않는 자가 거의 없는 형편이다.
『은행통신록』, 김석원, 『일본의 한국 경제 침략사』중 발췌.

밀조 기계만 적어도 150대가 한반도로 밀수되었고,[5] 수입된 백동화의 양은 예측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실제로 가장 악명 높은 것이 광무 2년(1898년) 2전 5푼 백동화인데, 이 시기 즈음에는 일본과 대한제국의 사이가 끝장나게 안 좋았기 때문에 백동화 위조를 조장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나올 지경이었다.[6]

일본의 백동화 밀조는 국제적 문제로까지 불거져서, 1902년 일본에는 '한국의 백동화 위변 조범 처벌령'까지 제정된다. 그러나 저 일본이 시행한 처벌령은 1년 이하의 징역이라는 형식적인 수준에 가까웠기 때문에 위조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이 당시 통계를 보면, 서울 내에서 유통되는 화폐의 25%가량, 그리고 제2 도시였던 평양에서는 80% 가량이 불량 혹은 위조된 백동화였다. 이로 인해 심각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해 정부는 브라운 대신 탁지부 재정 고문으로 고빙된 러시아 인 알렉시에프(K. Alexieff)의 영향하에 1898년 2월 22일자로 각인 은화 통용 금지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 금지령은 일본과 영국의 외교적 압력으로 5개월 만인 7월 11일에 해제되었다.

이후 대한 제국은 1901년부터 금본위제로 전환하고, 그에 따른 새로운 화폐를 발행하게 된다. 20원, 10원, 5원은 금화로 제작되었고, 반원, 20전, 10전은 은화, 5전은 백동화, 1전과 반전이 청동화였다.

문제는 기존에 너무 많이 풀린 동전들이 회수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상평통보는 화폐 정리 사업 시행 이후까지 남아있었고, 2전 5푼 백동화의 사주전도 금본위제 시행 이후에도 진행되었다. 일본에서 수입된 밀주전 기계가 적어도 150여대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이후 일본이 화폐정리사업을 진행하여 전환국은 없애버렸으며, 시중에 풀린 백동화는 떨이 가격으로 일본 제일은행에서 매입하여 폐기해버린다. 이 과정에서 일어난 여러 조치들로 인해 대한제국은 일제에 경제적으로 완전 종속되었다.



[1] 2돈 5푼. 엽전 10개의 단위가 돈이고 푼은 낱개 단위이므로 엽전 25개짜리라는 뜻이다.[2] 영문으로 적혀 있는 1/4 YANG 표기는 엽전 100개 단위인 냥(兩)의 4분의 1이라는 뜻이다.[3] 다만 조선 - 구한말에 만들어진 신종화폐 신뢰도는 당백전, 그리고 본 항목이 거하게 말아먹은 이래 당연히 상평통보보다 훨씬 낮았다. 상평통보가 얼마나 끈질겼냐면 일제강점기에서조차 일부 도서 지역에서는 조선 엔에 이은 보조 화폐 정도의 신뢰도를 가지고 유통될 정도.[4] 외국화폐만 쓰게 되면 그 나라가 화폐 찍어내는 족족 자국의 물건으로 바꿔줄 수 있다는 뜻이 된다. 더구나 당시는 국제금융시장이 지금처럼 긴밀하지 않았기 때문에 강대국들이 화폐 찍어내는 데에 부담이 덜했다.[5] 이 밀조 기계는 암암리에 조선인들 사이에서 어처구니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외국인이 펴낸 한영자전에서도 이 용법이 실렸다. 커다랗고 원리가 복잡한 기계 장치라는 뜻에서 이렇게 불렀다고 한다.[6] 사실 재료인 구리부터가 일본에서 오기 때문에 백동화 위조를 막으려면 일본은 얼마든지 막을 수 있었다. 일본 상인들은 짭짤한 돈벌이가 되니 위조를 하고, 일본 정부는 조선 정부를 경제적으로 종속시키는데 도움이 되니 막을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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