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지역을 연고로 하는 축구 구단에 대한 내용은 1. FC 마그데부르크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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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 [[독일| ]][[틀:국기| ]][[틀:국기| ]] | |
시간대 | (UTC+1/+2) | |
주 | 작센안할트 | |
인문환경 | ||
면적 | 201km² | |
인구 | 240,114명(2023년 12월) | |
인구밀도 | 1,194명/km² | |
홈페이지 | ||
정치 | ||
시장 | 지모네 보리스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마그데부르크 대성당. 마그데부르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중 하나이자 시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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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도시이자 작센안할트주의 주도이다. 엘베강을 끼고 자리잡고 있다. 자그마치 1200년이나 된 매우 유서 깊은 중세 도시이며 프랑크 왕국 시절부터 신성 로마 제국 그리고 30년 전쟁까지 독일의 굵직한 역사를 함께했으며 한자 동맹의 맹주로서 오랫동안 지역의 중심 도시로 활약했다. 30년 전쟁을 거치면서 많이 쇠약해졌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동독 시절을 거치면서 많은 문화유산들이 소실되고 옛 모습을 많이 잃었으나 아직도 곳곳에 1200년간의 역사를 품은 유산들이 의외로 많이 남아 있다.2. 역사
마그데부르크는 중세 독일 역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2.1. 중세
오토 대제와 왕비 에디트의 조각상. 마그데부르크 대성당. 1250년경 |
그 유명한 카롤루스 대제가 805년 이 지역에 거주지를 세우면서 마그데부르크의 역사는 시작된다. 중세 고지 독일어로 '크고 튼튼한 요새'라는 뜻의 'Magadoburg'에서 오늘날의 도시 이름이 유래된다. 이 도시는 본래 인근 마자르족과 슬라브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세워졌다. 이후 962년 오토 1세가 신성 로마 제국을 성립하면서 이곳을 수도로 삼게 되고, 사후에는 마그데부르크 대성당에 안장되었으니 신성 로마 제국은 사실상 이 도시에서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시기부터 마그데부르크는 매우 강성해졌으며 1294년에는 이 도시의 이름을 따 중세 자유도시의 기원이 된 마그데부르크 도시법(Magdeburger Recht)이 탄생했다. 13세기 한자 동맹에 가입할 당시에는 신성 로마 제국의 2만여 도시 중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였다. 마르틴 루터도 여기서 잠시 활동했었으며 이에 따라 마그데부르크에도 개신교가 들어왔다. 이렇게 중세를 거쳐 근세에 이르기까지 마그데부르크는 독일 내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작센 선제후국과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은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수 백년 동안 서로 으르렁거렸다. 마그데부르크의 영향력은 한동안 꺼지지 않을 듯 했다.
2.2. 30년 전쟁
그러나 30년 전쟁 와중이던 1631년 요한 체르클라에스 폰 틸리 장군이 이끌던 가톨릭 황제군은 마그데부르크를 점령했고 이 때 대학살극이 벌어졌다. 황제군이 마그데부르크를 장악한 1630년 11월부터 이듬해 5월 20일까지 황제군은 마그데부르크 내의 식량을 닥치는 대로 약탈하고 시민들까지 무차별 학살했다. 황제군은 당시 폭주하는 군사비로 인해 제대로 된 식량과 물자를 보급받지 못해 매우 굶주려 있던 상태였고, 이 같은 상태가 엉뚱한 마그데부르크에까지 영향을 끼쳤다.[1] 결국 6달만에 3만명에 달하던 마그데부르크의 인구가 불과 5천명으로 줄어드는 대참극이 일어났다. 30년 전쟁 역사상 늘 약탈이 있어왔지만, 이 마그데부르크 사건은 그 중에서도 역사에 남을 정도로 심각한 약탈, 방화, 살인, 강간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결국 개신교 세력을 결집시켜 30년 전쟁의 판도를 바꾸었다. 그러나 이에 상관없이 마그데부르크는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받았으며 이후 한자 동맹 시기의 영향력을 회복하지 못했다.2.3. 근대
이러한 참변 이후 마그데부르크의 시장이었던 오토 폰 게리케(Otto von Guericke 1602~1686)[2]는 폐허가 된 마그데부르크의 재건에 힘을 쏟았다. 그에 의해 대기압의 세기를 나타낸 것으로 유명한 '마그데부르크의 반구' 실험이 1654년 시행되어 기체 역학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3] 1680년부터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에 편입되었으며, 브란덴부르크가 1701년 프로이센 왕국이 되며 프로이센의 핵심 지역이 되었다.1806년 나폴레옹 전쟁 당시 프랑스군에 의해 일시적으로 점령되었으며 틸지트 조약에 의해 프랑스 제1제국의 괴뢰국인 베스트팔렌 왕국의 일부가 되었으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패배한 1815년 빈 회의를 통해 프로이센 왕국으로 반환되었고 이후 독일 제국의 도시가 되었다.
2.4. 현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마그데부르크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1940년 8월 22일 첫번째 연합군 공습을 받은 이래로 1943년부터 꾸준히 연합군의 폭격을 받았고 드레스덴 폭격이 이루어지기 1달 전인 1945년 1월 16일 영국 공군에 의해 주도된 마그데부르크 공습으로 인해 1만 6000여명이 목숨을 잃는다. 이 과정에서 마그데부르크에 남아있던 문화 유산의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1945년 4월 11일 미 제9군이 엘베강 서쪽의 마그데부르크 도심지역을 점령하기 시작했고 5월 5일 엘베강 동쪽에 붉은 군대가 진주한다. 독일 항복 이후 6월 1일 마그데부르크 엘베강 서쪽지역을 점령하던 미군들이 철수하고 영국군이 점령했다가 7월 1일 소련군에게 넘어간다. 곧이어 동독 정권이 수립되면서 재건 계획에 의해 남아 있던 문화 유산들의 잔해가 철거되고 그 자리에는 소비에트 식 건축물들이 들어선다. 이렇게 동독 시절을 거치면서 마그데부르크는 그 외형이 이전에 비해 크게 달라지지만 오토 대제가 대관식을 올렸던 마그데부르크 성당 등 중요한 건축물들은 일부 보존되었다. 공산주의의 붕괴 그리고 통일과 함께 마그데부르크는 부활한 작센안할트 주의 주도로 새롭게 출발한다. 2005년 도시 설립 1200주년 기념 행사가 마그데부르크에서 열렸다. 다만 통독 이후에 여느 동독 도시들처럼 인구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주도임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같은 주의 할레보다 인구가 아주 약간 적다. 주민들 정서도 구 동독 지방의 그것과 비슷하게 다소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편이다.
3. 명소
* 마그데부르크 대성당
937년 처음 세워진 매우 유서깊은 성당이다. 이곳에 오토 대제가 묻혀 있다.
* 그뤼네 치타델레(Grüne Zitadelle)
오스트리아 출신의 세계적인 건축가 프리덴스라이히 훈데르트바서(Friedensreich Hundertwasser)에 의해 설계되었다. 건물 자체는 훈데르트바서가 2000년 타계한 이후 착공되었으나 설계는 그가 했기 때문에 그의 작품으로 간주된다.
* 마그데부르크 수로
폭이 32m, 깊이가 4.25m 나 되는 대형 수로이다. 엘베강을 건너 마텔란트 운하와 엘베-하벨 운하를 잇기 위해 2003년 10월 10일에 완공된 세계 최초이자 유일무이한 배가 다니는 수로이다.
이 수로는 위 유체역학적 질문으로도 유명하다. 단도직입적으로 정답은 '거의 아무런 변화가 없다.'이다. 선박이 수면 아래 물에서 차지하는 부피에 따른 질량만큼 즉, 배수량만큼만이 배의 질량인데 수로와 운하 나아가 운하 외에 존재하는 물의 양은 그보다 훨씬 많아 수위의 큰 변동은 없다. 따라서 구조적 문제가 발생할 만큼의 변화는 없다.
4. 자매 도시
5. 여담
g가 무성음화하기 때문에 독일어 발음은 [ˈmakdəˌbʊʁk] 또는 [ˈmaxdəbʊɐ̯ç]에 가깝지만 규정 용례는 마그데부르크이다. 일본어로는 마쿠데부루쿠(マクデブルク).중앙역을 중심으로 철도 노선이 사방으로 뻗어있다.
많은 구 동독 지역이 그렇지만 이곳도 네오나치가 상당히 날뛰는 곳이다. 2006년 이곳에 유학 중이던 한국인 학생이 네오나치로부터 폭행을 당해 부상을 입은 적이 있다.
독일 제국 시절에 도시의 이름을 딴 순양함 함급이 있었다. 마그데부르크급 경순양함 참조. 참고로 1번함 마그데부르크는 독일의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의 원인을 제공했다.
독일 축구 2부 리그에 해당하는 2. 분데스리가의 1. FC 마그데부르크가 이 도시를 연고로 하고있다. 동독시절엔 SG 디나모 드레스덴과 함께 강호로 뽑혔지만 통일후 사이좋게 강등됐다. 그리고 현재도 SG 디나모 드레스덴과의 라이벌의식을 불태우고 있다. 이 둘의 더비를 엘프 클라시코라고 한다. 이름의 유래는 당연히 엘베강 + 엘 클라시코
프로이센 왕국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브란덴부르크, 마그데부르크, 할버슈타트, 슐레지엔만 국가의 본체로 구성되면 충분하다.'라는 유언을 남겼다[4]. 마그데부르크가 호엔촐레른 가문에게 얼마나 중요한 지역이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5]
이탈리아를 통일한 사보이아 가문이 마그데부르크 출신이다.[6] 마그데부르크에서 스위스 제네바 일대까지 내려와 아를 왕국 일대의 현재 프랑스 사부아와 이탈리아 발레다오스타에 터전을 잡아 사보이아 백작으로 서임된 후 토리노를 상속받아 통치하다 16세기 이후 완전히 이탈리아화하여 사보이아 공국, 사르데냐 왕국을 거쳐 통일 이탈리아 왕국을 수립하였다.
2022년에 글로벌 반도체 기업 인텔이 이곳에 공장(일명 "기가파브릭 (Giga-Fabrik)")을 지을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2024년에 착공하여 2028년 완공 예정이며, 1만여개의 일자리를 창출할 전망이다. 입지 선정의 기준은 라이프치히-할레 국제공항과 가까운 위치인 점, 볼프스부르크의 폴크스바겐 생산 공장과 그륀하이데(Grünheide)의 테슬라 기가팩토리(Gigafactory)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점, 친환경 에너지 공급이 원활한 북독일 지역인 점 등이라고 한다.
[1] 당시 제국군 원수에서 해고 당해서 앙심을 품은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의 공작으로 인해 황제군이 굶주렸다는 썰이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애초에 당시의 미약한 행정력으로는 10만이 넘는 황제군을 먹여살리긴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과하고 발렌슈타인의 탁월한 능력으로 이 거대한 군대를 겨우 유지할수 있었지만, 그의 해임으로 인해 더이상 불가능해졌다. 이 비극은 오히려 발렌슈타인의 해임으로 인해 발생한 일에 가깝다.[2] 참고로 이 사람은 근대 물리학에 상당히 큰 기여를 한 사람인데, 후술할 '마그데부르크의 반구' 실험 말고도 마찰 전기에 대한 연구로 유명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탈레스가 호박을 천에 문질러서 마찰 전기를 발생시켰던 것을, 게리케가 구리로 된 큰 구를 만들어서 천에다 문질러서 탈레스의 실험을 재현하면서, 금속이 강력한 예비 대전체임을 입증했다.[3] 실제 이 실험은 레겐스부르크에서 열린 제국의회에서 황제 페르디난트 3세가 보는 앞에서 실행되었다.[4] 강철왕국 프로이센 p.340.[5] 반면 프리드리히 대왕은 프로이센 공국의 동프로이센은 전쟁이 일어나면 일단 포기하라는 유훈을 남겼다. 세간의 인식과 달리 프로이센 수뇌부는 동프로이센에 별 미련이 없었다.[6] 최근 연구 결과 신성 로마 제국 작센 왕조와의 혈연을 강조하기 위해 조작했다는 것이 정설이고 유전학적 분석에 따르면 부르고뉴 또는 프로방스 출신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한다. 애초에 이들이 프랑스어를 사용하고 프랑스 문화권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최근 연구 결과가 더 타당성이 있는 분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