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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3-01 15:50:17

호조 도키마사

마키씨 사건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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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쿠라 막부 싯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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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군 (미야쇼군 계보) · 싯켄 }}}}}}}}}
'''가마쿠라 막부 초대 싯켄
호조 도키마사
[ruby(
'''
파일:호조도키마사.jpg
출생 1138년
(호엔 4년)
사망 1215년 2월 6일 (향년 78세)
(겐포 3년 1월 6일)
묘소 시즈오카현 이즈노쿠니시 지케 83-1
(간죠쥬인)
별명 호조 시로(北条四郎)
관위 종5위하 도토미노카미(遠江守)
부모 아버지 호조 도키카네(北条時兼) 혹 도키카타(時方)
어머니 이즈노죠(伊豆掾) 도모노 다메후사(伴為房)의 딸
부인 이토 스케치카의 딸
마키노카타
자식 호조 무네토키, 호조 마사코, 호조 요시토키, 아와노쓰보네, 호조 도키후사, 호조 도키코 등
재임기간 호조씨 도쿠소케(得宗家) 초대 당주
1175년 이전 ~ 1205년 음력 윤7월 19일
초대 교토슈고
1185년 음력 11월 24일 ~ 1186년 음력 3월 1일
초대 싯켄
1203년 음력 9월 ~ 1205년 음력 윤7월 19일

1. 개요2. 출자3. 생애
3.1. 이즈국의 약소 호족에서 쇼군의 장인으로3.2. 막부의 권력을 장악하다3.3. 최후
4. 여담

[clearfix]

1. 개요

가마쿠라 막부의 초대 싯켄으로 무가 정권 시대를 연 초대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장인이다.

2. 출자

호조씨는 간무 헤이시(桓武平氏) 다카모치류(高望流)의 다이라노 나오카타(平直方)의 자손으로 칭했으나 명확하진 않아 의심하는 부정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일설에는 본래 헤이케가 속한 이세 헤이시(伊勢平氏) 출신이며 나오카타의 자손인 호조노스케(北条介)[1]의 데릴사위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2]

조부 이전 계보는 상이한 기록이 많아 매우 혼란스럽다. 전해지는 계보 기록[3]들에 따르면 도키마사는 나오카타의 5대손이며 아버지가 호조 도키카네(北条時兼) 혹은 도키카타(時方), 할아버지가 호조 도키이에(北条時家)인 점은 대부분 동일하다. 일부 계보에서 도키마사의 친척인 호조 도키사다(北条時定)의 아버지로 호조노스케 도키카네(北条介時兼)로 기록된 점을 들어 도키사다의 가계가 호조씨 본가가 아니었나 추정하기도 한다.

조부 도키이에 시기에 이즈국(伊豆国)에 정착하고, 도키마사까지 재청관인(在庁官人)[4]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3. 생애

3.1. 이즈국의 약소 호족에서 쇼군의 장인으로

이즈국(伊豆国) 다카타군(田方郡) 호죠(北条)[5]에 거점을 둔 영세 호족으로 재청관인으로 추정된다. 지리적으로 이 지역은 관아인 고쿠후(国府)와 가깝고 동쪽의 관아로 향하는 도로와 서쪽의 수운(水運)에 필수적인 강 사이에 위치하여 교통망을 이용한 상업 활동에 종사 했을 가능성도 있다.

생애 전반기의 행적에 대해서는 불명한 점이 많지만, 요시다 다카나가(吉田隆長)[6]의 《기쓰쿠덴(吉口伝)》에서 잠깐 언급된다.
이즈국의 재청관인이던 호조 도키마사가 모쿠다이(目代)에게 포박되었을 때, 이즈노카미(伊豆守)였던 요시다 쓰네후사(吉田経房)의 대응에 감동한 적이 있다. 나중에 사위가 된 요리토모에게 그것을 이야기했더니, 요리토모가 쓰네후사를 '현인이자 감사한 사람(賢人ユユシキ人)'으로서 신뢰하게 되었다.
요시다 쓰네후사가 이즈노카미를 역임하던 시기는 1151년부터 1158년까지로 도키마사가 17~21세 때이다.

1160년 헤이지의 난(平治の乱)에서 패배해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계모의 탄원으로 살아남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이즈국에 유배된다. 그의 관리 및 감시를 하게 된 인물은 이토 스케치카로 헤이케의 가인(家人)이자 도키마사의 장인이다. 1170년 4월, 이즈국 이즈오시마(伊豆大島)에 유배된 미나모토노 다메토모(源為朝)[7]의 정벌군에 참가했다고 한다. 1175년경에 요리토모의 감시역을 맡게 되었고, 1177년경에 교토오반야쿠(京都大番役)[8]로 상경 중이던 때 장녀 호조 마사코와 요리토모가 눈에 맞게 된다. 이는 역적이 사위가 되는 상황이었기에 귀향한 도키마사는 극구 반대했지만, 두 사람이 인근 사찰로 도망가는 등 뜻을 굽히지 않자 결국 두 사람의 결혼을 인정하게 된다. 그 이후 도키마사는 요리토모의 든든한 후원자가 된다.[9] 한편, 교토는 헤이케와 조정(朝廷)의 갈등과 지나친 권력 독점 시도에 따라 국내 정세가 점차 불안정해진다.

1180년 5월 26일, 모치히토 왕자의 거병(以仁王の挙兵)이 일어나고 모치히토 왕자는 전국의 겐지(源氏)에게 헤이케 토벌을 호소하는 격문을 보내자, 전국 각지에서 봉기가 일어난다. 요리토모도 이 격문을 받았고 약 4달의 준비 끝에 봉기하게 되니, 바로 겐페이 전쟁이 시작이었다. 모치히토 왕자의 거병 직후 요리토모는 바로 행동하지 않고 사태를 관망하였으나 이즈노카미가 헤이시측 다이라노 도키타다(平時忠)로 교대, 이즈에 유배된 도키타다의 측근 야마키 가네타카(山木兼隆)가 모쿠다이에 임명, 이즈국의 실권을 헤이시측 호족 이토씨(伊東氏)가 장악, 반란을 일으킨 겐지를 추포하기 위해 헤이시측 사가미의 대호족 오바 가게치카(大庭景親)가 영지로 하향하는 등 여러 요인이 인하여 거병을 결의하게 된다. 준비하는 과정에서 아버지 대부터 연고가 있는 간토의 호족들에게 협력을 구하기 위해 한명 한명 자신의 방에서 면담하거나 최측근 아다치 모리나가(安達盛長)를 파견하고 도키마사와 함께 계획을 모의한다.

1180년 8월 17일, 요리토모는 거병한다. 거점은 도키마사의 집으로 하고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병력은 모쿠다이 야마키 가네타카와 그의 후견인 쓰쓰이 노무토(堤信遠)의 토벌을 명한다. 도키마사는 야마키의 저택 습격에 참가한다.[10] 성공적으로 첫 전투를 마치고 논공행상과 이즈국 관아를 장악하여 헤이시에 반감을 품었던 다른 호족의 참여를 끌어내 46기(騎)[11]로 시작했던 병력이 300여 기까지 늘어난다.[12] 조력하기로 한 사가미의 미우라씨(三浦氏) 병력과 합류하기 위해서 이동하던 중 8월 23일 헤이시측의 오바 가게치카의 3000여 기가 오는 소식을 듣고 이시바시산(石橋山)에서 전투를 벌이며 미우라씨의 합류를 기다렸지만, 수적 열세와 배후에서 이토 스케치카의 300여 기에게 공격당하면서 패배하여 뿔뿔이 흩어진다. 도키마사와 차남 호조 요시토키(北条義時)는 요리토모의 명으로 가이 겐지(甲斐源氏)가 통치하는 가이로 향하지만, 장남 호조 무네토키(北条宗時)는 다른 길로 후퇴하다가 이토 스케치카의 군에 포위되어 전사한다. 이시바시산 전투 후 요리토모는 극소수의 인원과 함께 바다를 건너 보소반도아와로 넘어가 시모사의 지바씨(千葉氏)와 가즈사의 가즈사씨(上総氏)의 협력으로 재기하여 10월에 가마쿠라(鎌倉)에 입성한다. 한편, 도키마사는 가이 겐지의 다케다 노부요시(武田信義)와 함께 스루가에 침공하여 다치바나노 도모치(橘遠茂), 나가다 뉴도(長田入道) 등 헤이시의 군세를 물리친다. 그리고 헤이시가 교토에서 파견한 진압군을 상대하기 위해 스루가의 후지가와(富士川)에 온 요리토모의 병력에 합류한다. 후지가와에서 겐지와 헤이시 양측의 군대가 대치를 하던 중 갑작스럽게 헤이시의 군세가 와해되자 요리토모는 가마쿠라로 돌아가 내정에 힘을 쓴다.[13]

요리토모의 장인으로서 존중을 받지만 권력에 다가갈 기회가 열리지 않던 중 한 사건이 발생한다. 1182년 11월 10일, 도키마사의 후처인 마키노카타(牧の方)가 얼마 전 요리토모의 아이를 출산한 마사코에게 그의 첩에 대한 사실을 알려준다. 그로 인하여 마키노카타의 오라비 마키 무네마사(牧宗親)[14]에게 명하여 첩이 거주하던 집을 파괴하는 후처치기(後妻打ち)[15]를 행하자, 이를 안 요리토모는 매우 화나서 행동한 마키 무네마사를 불러서 질책하고 상투를 자르게 된다.[16] 이 소식을 들은 도키마사도 처형의 처사를 보고 자신에게 소홀했던 지난 일까지 생각하며 화가 나 일족을 이끌고 본거지인 이즈로 항의성 낙향을 한다. 그 후 행적은 기록의 누락으로 알 수 없지만 1184년 3월에 도사에 서신을 보낸 정도만 보이나, 이 시기 가이 겐지의 다케다씨(武田氏)가 실각하면서 이즈와 스루가의 슈고(守護)가 된 것으로 보인다.[17]

1185년 3월에 단노우라 전투의 승리로 5년간 이어진 겐페이 전쟁이 막을 내리지만, 10월에 요리토모의 동생이자 전쟁영웅인 미나모토노 요시쓰네가 미나모토노 유키이에[18]와 함께 요리토모에 대한 반란을 획책한 사실이 누설된다.[19] 11월 24일, 요리토모의 대관으로서 도키마사가 병력 천여 기를 이끌고 교토에 입성한다. 상경한 도키마사는 가장 먼저 조정과 교섭하여 11월 28일에 요시다 쓰네후사을 통하여 요시쓰네 추포와 이를 위한 슈고(守護), 지토(地頭) 설치를 인정받은 '분지 칙허(文治の勅許)'를 받고, 요시쓰네 대신 교토슈고(京都守護)로서 교토 부근의 치안유지, 헤이케 잔당 수색, 요시쓰네 문제 처리 등을 맡게 된다. 그러나 4개월 만인 1186년 3월 1일에 조정에 7개국 지토(7ヵ国地頭=교토슈고)를 사임한다고 고시라카와 천황에게 상주하고, 3월 27일에 가마쿠라로 돌아온다.[20] 그 이유로는 자신의 가신단이 기소 요시나카(木曽義仲) 때처럼 행패를 부린 것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도키마사의 후임으로 요리토모의 매제 이치조 요시야스(一条能保)가 맡게 된다.

가마쿠라로 돌아온 도키마사는 교토에서의 활약이 거짓말인 것처럼 눈에 띈 활동이 보이지 않는다. 이 시기에는 본거지인 이즈국의 장악에 힘을 썼다고 생각된다. 1192년 7월 12일, 요리토모가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将軍)에 오르면서 가마쿠라 막부의 초대 쇼군이 되었고, 도키마사 역시 쇼군의 장인으로서 지위적 위상이 한층 올라간다.

3.2. 막부의 권력을 장악하다

초대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권력이 영원할 듯했지만 1199년, 예상밖 낙마 사고로 죽음을 맞이하면서 상황이 바뀌게 된다. 요리토모의 차남 미나모토노 요리이에가 2대 쇼군 자리에 오르긴 했지만 아버지만한 정치력을 발휘하지는 못했고 외려 유력 고케닌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그리고 이 중심에 도키마사와 호조 일족이 있었다.

도키마사와 호조 일족은 요리이에의 독주에 반대하며 13인의 합의제(十三人の合議制)를 시스템화해 견제했다. 물론 요리이에는 이에 반발해 친위세력을 키우려 했지만 외려 측근이었던 카지와라 카게토키가 반역의 누명을 쓰고 죽었고 외척이었던 히키 가문 역시 도키마사와 호조 가문이 자신들을 따르는 고케닌들을 규합해 제압하면서 수족을 모두 잃어 허수아비가 되고 말았다.[21]

결국 요리이에는 1203년 쇼군 자리에서 쫓겨났다 죽음을 맞이했고, 호조 가문은 미나모토노 사네토모를 쇼군으로 올리고 도키마사 본인이 싯켄에 오르면서 권력을 장악했다. 이즈의 호족이었던 그가 무사들을 지배하는 사실상의 최고 권력자가 된 것.

이후 막강한 권력을 누린 것으로 보이는데, 1205년 6월에는 유력 고케닌 중 한 명인 하타케야마 시게타다(畠山重忠) 부자를 사위[22] 히라가 도모마사의 참소만 믿고 단독으로 모반죄를 걸어 참살해버리기도 했다. 이때 아들인 호조 요시토키와 딸이자 초대 쇼군의 아내인 호조 마사코가 강력하게 말렸지만 이를 무시하면서 사이가 벌어지게 된다.

3.3. 최후

하지만 지나치게 욕심을 내다 화를 불렀다. 독단적으로 자신의 후처와 공모해 외손자 사네토모까지 살해하고 후처와의 사이에서 얻은 딸과 결혼한 사위 히라가 도모마사를 쇼군 자리에 올리려는 어처구니 없는 짓을 도모하다가 딸 호조 마사코와 아들 호조 요시토키에게 걸려버리는 마키씨 사건(牧氏事件)이 벌어졌다.

감히 쇼군을 살해하려고 했던 데다가 이미 자식들과의 사이가 크게 벌어진 상황이었기 때문에 반역죄로 죽음을 맞았어도 할 말이 없었지만 그래도 요시토키와 마사코가 자기 아버지인 도키마사를 죽일 수는 없었기 때문에 권력을 놓고 이즈국의 장원에 사실상 유폐당하는 선에서 그쳤다.

워낙 어처구니가 없는 사건인만큼 당대 및 후대에 여러 가지 해석이 나왔는데 가마쿠라 초기에 작성된 《육대승사기(六代勝事記)》[23]에는 도키마사가 모든 계획을 짜고 실행하려 했다고 적혀있는 반면, 가마쿠라 막부의 공식 역사서에 가까운 《아즈마카가미(吾妻鏡)》에는 도키마사가 나이가 많아 판단력이 흐려진 상태에서 후처의 선동에 놀아나서 무리한 시도를 했다고 적혀있다.

이후 권력은 후임 싯켄에 오른 요시토키가 장악하게 되었고, 본인은 계속 유폐당해 있다가 1215년, 종기가 악화되어 사망했다.

4. 여담

생애에서 볼 수 있다시피 지방 호족에서 일약 무가의 최고 실권자까지 올라간 입지전적인 인물이지만, 정작 당대에도 평은 좋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만년의 노욕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끝이 좋아야 다 좋은 것이라는 말의 반면교사인셈.

특히 호조 도키마사 본인의 손자이자 3대 싯켄인 호조 야스토키는 일본 역사상 최초의 무가법(武家法)인 고세이바이시키모쿠(御成敗式目, ごせいばいしきもく)를 제정하면서 막부의 권력을 절대화한 인물로 유명한데 막부의 최고권력자로서 초대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그 부인이자 자신의 고모 호조 마사코, 자신의 아버지 호조 요시토키를 막부의 조묘로 삼아 자주 참배하고 여러차례 예를 올렸지만 도키마사에 대해서는 반역자로 평가하며 사실상 존재를 부정하기도 했다.

[1] 스케(介)는 유력 재청관인(在庁官人)이자 현지 유력자를 의미하며, 대표적으로 미우라노스케(三浦介), 치바노스케(千葉介) 등이 있다.[2] 노구치 미노루(野口実)의 가설[3] 존비분맥(尊卑分脈), 계도찬요(系図纂要), 속군서류종(続群書類従), 묘혼지본(妙本寺本), 쇼주지(正宗寺本), 쥬조케 문서(中条家文書), 산몬 문서(山門文書) 등[4] 헤이안 시대 중기부터 가마쿠라 시대에 지방관청의 행정 실무를 종사한 지방관료를 뜻한다.[5] 시즈오카현 이즈노쿠니시 지케(寺家)[6] 요시다 쓰네후사(吉田経房)의 5대손[7]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삼촌[8] 헤이안 시대 후기에 지방 무사에게 교토의 경호를 맡긴 군역[9] 도키마사는 상경했을 때 불온해지는 중앙 정세를 보고 헤이케가 오래가지 못할 것을 예견하고 진행했을 가능성도 있다.[10] 이때 호조씨는 도키마사와 아들 호조 무네토키, 요시토키 형제, 친척 호조 도키사다, 하인 겐토타(源藤太) 등이 참가한다.[11] 호조씨 4인: 호조 도키마사(北条時政), 호조 무네토키(北条宗時), 요시토키(義時) 형제, 호조 도키사다(北条時定)
구도당(工藤党) 7인: 구도 모치미쓰(工藤茂光), 치카미쓰(親光) 부자, 우사미 스케모치(宇佐美助茂), 아마노 도카게(天野遠景), 마사카게(政景) 부자, 사메지마 무네이에(鮫島宗家), 노부치카(鮫島宣親) 형제,
나카무라당(中村党) 7인: 도히 사네히라(土肥実平), 도히라(遠平) 부자, 쓰치야 무네토(土屋宗遠), 다다미츠(忠光) 부자, 쓰치야 요시키요(土屋義清), 나카무라 가게히라(中村景平), 모리히라(盛平) 형제
가마쿠라당(鎌倉党) 2인: 오바 가게요시(大庭景義), 도요타 가게토시(豊田景俊) 형제
미우라당(三浦党) 2인: 오카자키 요시자네(岡崎義実) 사나다 요시타다(佐奈田義忠) 부자
사사키씨(佐々木氏) 4인: 사사키 사다쓰나(佐々木定綱), 쓰네타카(経高), 모리쓰나(盛綱), 다카쓰나(高綱) 형제
오미씨(大見氏) 3인: 오미 이에히데(大見家秀) , 우사미 마사미쓰(宇佐美政光), 사네마사(実政) 형제
이즈 호족 14인: 닛타 다다쓰네(仁田忠常), 호리 치카이에(堀親家), 호리 스케마사(堀助政), 가토 가게카즈(加藤景員), 가토 미쓰카즈(加藤光員), 가토 가게카도(加藤景廉), 아마노 미쓰이에(天野光家), 곤도 구니히라(近藤国平), 히라사코 다메시게(平佐古為重), 나고야 요리토키(那古谷頼時), 사와 무네이에(沢宗家) 나카하라 고레시게(中原惟重), 나카하라 고레히라(中原惟平), 가네다 도시나가(鎌田俊長)
무사시(武蔵) 호족 1인: 기쇼보 죠진(義勝房成尋)
요리토모 측근 2인: 아다치 모리나가(定安盛長), 나카하라 미쓰이에(中原光家)
《아즈마카가미(吾妻鏡)》 1180년 8월 20일(治承4年8月20日)
[12] 이 시대의 인원을 세는 단위인 기(騎)는 무사 한 명만 집계했기 때문에 가인(家人)이나 잡병 등을 제외한 숫자이다. 대체로 1명의 무사가 1~5명까지 가인이나 잡병을 데리고 다녔기 때문에 표기된 인원에서 대략 2~3배의 인원이 참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13] 양측에 중립적인 오슈의 오슈 후지와라씨(奥州藤原氏)와 헤이시측인 히타치사타케씨(佐竹氏)가 후방을 위협했기 때문이다.[14] 사료에 따라 아버지라는 설과 오라비라는 설이 존재한다.[15] 헤이안 시대부터 에도 시대까지 행해지던 풍습으로 남편이 처와 이혼하고 후처와 결혼할 때, 전처가 예고하고 후처의 집을 습격하는 것이다.[16] 이 시대의 상투는 조선시대와 비슷하게 큰 의미를 지는 것인데, 이를 자른 것은 매우 수치스럽고 원한을 사는 행동이었다.[17] 스루가국은 처가 마키씨(牧氏)의 소령 오오카마키(大岡牧)과 사위 아노 젠죠(阿野全成)의 연고지인 아노장(阿野荘)이 있어 인척의 영지를 발판으로 공백이 된 이곳을 도모했다고 여겨진다.[18]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요시쓰네의 삼촌[19] 고시라카와 법황이 미나모토노 요시쓰네의 요청대로 요리토모 토벌의 선지(宣旨)를 내렸으나, 이에 호응하는 이는 극소수뿐이었다.[20] 도키마사는 자신의 가신 35명을 치안유지를 명목으로 남겨두고 갔다. 그 명부는 다음과 같다.
호조 도키사다, 아츠사노 신다이부(梓の新大夫), 노타노 헤이지(野太の平二), 야시하라노 쥬로(弥次原の十郎), 구하바라노 지로(桑原の二郎), 히젠노 에지(肥前の江次), 사카오 시로(さかを四郎), 사카오 하치로(さかを八郎), 나이토 시로(内藤四郎), 야겐지(弥源次), 히타치노보 쇼묘(常陸坊昌明), 헤이코 지로(平子二郎), 쥬하치(忠八), 쥬타(忠太), 우에하라 구로(上原の九郎), 다시리노 다로(田尻の太郎), 이와나노 다로(岩名の太郎), 이와나노 지로(岩名の二郎), 이와나노 헤이자(岩名の平三), 야와타노 로쿠로(八幡の六郎), 노이요노 고로타로(のいよの五郎太郎), 노이요노 사부로(のいよの三郎), 노이요노 고로(のいよの五郎), 시무라노 헤이자(志村の平三), 도노오카노 하치로(殿岡の八郎), 히로사와노 지로(広沢の二郎), 야시로(弥四郎), 야고로(弥五郎), 야로쿠로(弥六郎), 고나이(こうない), 오카타노 쥬로(大方十郎), 헤이이치노 사부로(平一の三郎), 이가노 헤이타(伊賀の平太), 이가노 시로(伊賀の四郎), 이가노 고로(伊賀の五郎)
이상 35인
(1186년) 3월 27일
《아즈마카가미》 1186년 3월 27일(文治2年3月27日)
[21] 요리토모의 지나친 친족 숙청으로 요리이에를 지켜줄 친위세력이 마땅치 않았던 영향이 크다.[22] 시게타다 역시 이나게 시게나리등과 함께 그의 사위중 한명이었다.[23] 다만 조큐의 난 직후 공가의 입장에서 쓰여진 책이기 때문에 상황파악이 좀 더 부정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