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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5 00:10:57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여대공

<colcolor=#000000> 러시아 제국의 여대공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великая княжна Мари́я Никола́евна России
파일:Grand_Duchess_Marie_in_court_dress_1910.jpg
<colbgcolor=#FFFACD> 이름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Мария Николаевна Романова)
출생 1899년 6월 26일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여름궁전
사망 1918년 7월 17일 (향년 19세)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 예카테린부르크 이파티예프 하우스
신체 170cm[1]
부친 니콜라이 2세
모친 헤센의 알릭스 공녀
형제 올가, 타티야나, 아나스타시야, 알렉세이
종교 러시아 정교회
서명 파일:Signature_Maria.svg.png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373a3c,#ddd {{{#!folding [ 시성 정보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FFFACD><colcolor=#000> 시성 1981년: 해외 러시아 정교회
2000년: 러시아 정교회
축일 그레고리력: 7월 17일
율리우스력: 7월 4일
호칭 해외 러시아 정교회: 황실 순교자[2]
러시아 정교회: 황실 수난자[3]
성인 추대 종파 러시아 정교회
해외 러시아 정교회
그리스 교회
세르비아 정교회
안티오키아 정교회
루마니아 정교회
불가리아 정교회
}}}}}}}}}}}}

1. 개요2. 탄생3. 꿈 많은 셋째 황녀4. OTMAA이라 불린 5남매5. 러시아 혁명6. 사망7. 사후8. 가족관계9. 여담10. 대중매체11.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파일:마리야 어린 시절.jpg
파일:img(3).jpg
<rowcolor=#000> 어린 시절 1910년

1899년 6월 26일 러시아 제국니콜라이 2세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 사이에서 1남 4녀 중 3녀(셋째)로 태어났다.

2. 탄생

마리야가 태어났을 당시 상황이 아버지 니콜라이 2세의 일기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다.
기쁜 날, 하느님께서 셋째 딸 마리야를 보내주셨다. 마리야는 12시 10분에 무사히 태어났다. 알릭스[4]는 매우 힘들었는지, 신체적 고통으로 밤에서 아침 무렵까지 자고 있다. 하느님, 고통을 빨리 넘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리야의 외모는 파랗고 큰 눈동자와 밝은 밤 색깔 머리색을 가졌고, 장밋빛 뺨과 더불어 키가 크고 튼튼했다고 한다. 때문에 무척 예쁘고 사랑스러운 소녀였다.[5] 가족들 사이에서 황녀들을 부르는 애칭이 있었는데, 마리야는 종종 "마샤" 또는 "마쉬카"라고 불렸다.

3. 꿈 많은 셋째 황녀

파일:0bbb528717afc785d220a0337fcbc813.jpg
<rowcolor=#000> 1906년도 모습
유아 시절의 마리야는 그 나이대 아이들처럼 장난기가 많았다. 시녀들이 목욕 시켜주는 도중에 뛰쳐나와 그 상태로 복도를 걸어다니기도 했고 가끔씩 어머니 알렉산드라 황후의 식탁에서 과자를 훔쳐 먹기도 했다. 그럴 때면 알렉산드라 황후는 마리야를 꾸짖으며 방으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10살이 넘으면서 점차 온화한 성격의 얌전하고 조용한 사춘기 소녀가 되었다.

마리야는 러시아식 미인으로 성장하고 가족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아버지 니콜라이 2세장티푸스로 사경을 헤매자, 자신의 방에 있는 아버지의 초상화를 밤마다 보며 울기도 했다.

할아버지 알렉산드르 3세를 닮아 건강하고 힘이 세 때때로 가정교사들을 번쩍 들어올리는 장난을 쳤다. 러시아 혁명이 시작되던 1917년 초 황녀 자매들은 홍역에 걸렸는데, 마리야는 가장 늦게 걸려 황실 군인들을 설득하려 외출하는 어머니를 따라가기도 했다.

무척 아름다운 소녀로 성장한 마리야에겐 꿈이 있었다. 바로 '가정'을 이루는 것.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어머니와 같은 낭만적인 사랑과 연애 결혼을 꿈꾸며, 언제나 결혼과 가정에 대해 동경하는 꿈 많은 소녀였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부모인 니콜라이 2세알렉산드라 황후가 연애결혼을 했고 그만큼 부부 금슬도 좋았기 때문.[6] 하지만 1918년 러시아 내전 당시 본인과 가족들이 모두 처형당하면서 끝내 이루지 못하는 비극을 맞이하였다.

1916년, 전쟁이 터지고 아버지 니콜라이 2세는 전선에 나갔다. 그리고 어머니 헤센의 알릭스와 두 언니 올가 니콜라예브나 여대공, 타티야나 니콜라예브나 여대공은 다친 병사, 장교들을 치료했고, 마리야와 아나스타시야는 어리기 때문에 옆에서 조수 역할을 했다. 마리야는 어린 시절부터 군인들과 친하게 지냈는데 이곳에서 만난 장교와 친해져 아버지에게 가끔 그의 안부를 묻곤 했다.

4. OTMAA이라 불린 5남매

파일:Otma1914recep.jpg
파일:OTMAA_1910_in_court_dress.3.jpg
<rowcolor=#000> 로마노프 황가의 남매
1901년, 마리야의 가장 친한 단짝 친구인 여동생 아나스타시야가 태어났다. 마리야와 아나스타시야는 룸메이트였고, 무척 친하고, 옷도 똑같이 입었다.[7] 마리야는 순진하고 얌전한 데 비해, 장난끼 많은 아나스타시야는 마리야의 순진한 성격을 이용하여 셋째 언니를 자주 골탕을 먹였다. 아나스타시야가 다른 사람들한테 장난을 칠 때 늘 사과했다고. 마리야의 큰언니 올가와 작은언니 타티야나도 마리야를 자주 놀렸지만, 마리야는 늘 재미로 받아들였다.

자매들은 그런 마리야의 착한 성품을 무척 좋아했고, 네 자매는 서로 무척 친했다. 서로가 일기 등에서 머리글자인 'OTMA'(올가, 타티야나, 마리야, 아나스타시야)로 표현할 정도로, 거기다 두 언니 올가 니콜라예브나 여대공, 타티야나 니콜라예브나 여대공과 여동생 아나스타시야뿐만 아니라, 오 남매 모두 우애가 좋아서 막내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와 함께 OTMAA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당시 혼란스러운 러시아 제국과 달리, 황제 부부는 자식들을 편애하지 않고 사랑했기에 오 남매 모두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5. 러시아 혁명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니콜라이 2세는 폐위되었다. 황제 일가는 볼셰비키 감시 하에서 망명 생활을 시작하였다. 마리야는 예카테린부르크로 망명할 때 남매들 중 유일하게 부모와 함께 먼저 출발했다. 황후의 생각으로는 올가는 기운이 없었고, 타티야나는 알렉세이를 돌봐야 했고, 아나스타시야는 아직 너무 어리고 혈우병 환자인 알렉세이는 다친 게 심해져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기 때문.

볼셰비키 당원들은 황녀들의 침실의 문을 못 잠그게 하였으며 심지어 욕실까지 따라왔다. 황녀들은 길거리에 나가기만 하면 경멸과 비난과 조롱거리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자신들을 감시하는 군인들이 농담이랍시고 성희롱을 해 황녀들은 매우 충격을 받았다. 그런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작은언니 타티야나가 충격을 받아 울면서 뛰쳐나가자, 마리야가 그 군인을 크게 꾸짖었다고 한다. 하루 아침에 몰락한 비참한 순간이었음에도 마리야에게는 아직도 황녀로서의 위엄이 남아있었다.

마리야는 황제 일가 중에서 감금 생활에 가장 잘 적응했으며, 일가를 감시하던 경비병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마리야의 생일에 생일 케이크를 몰래 가져다 준 경비병이 있는가 하면, 심지어 마리야와 결혼을 하거나 그녀를 감금지에서 구출하고 싶다고 부모에게 말한 경비병도 있었다. 이런 경비병들의 동요는 볼셰비키 측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으며, 결국 볼셰비키는 감금지 경비병들을 대거 교체하고 감시를 강화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6. 사망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로마노프 왕가의 몰살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1918년 7월 16일 밤 12시경, 유로프스키가 이파티예프 하우스의 문을 두드리고 지하실로 내려오라고 했다. 그들은 단순히 사진을 찍는 줄로만 알았으나, 지하실에서 유로프스키는 황제 일가에게 처형 사실을 통보한 후 볼셰비키 요원들과 함께 황제 일가에게 총을 난사했다.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황제와 그 가족은 마리야와 아나스타시야를 제외하고 전원 즉사했다. 마리야는 허벅지에 총을 맞고 총검에 찔렸지만 그녀의 옷 안에 있던 보석들 덕분에 죽지 않았고, 결국 볼셰비키 요원은 마리야의 머리를 향해 총을 쐈다.

그러나 뒤늦게 발견된 그녀의 두개골에는 총상이 없었다고 한다.[8] 그렇게 그녀를 포함한 일족 모두가 죽은 줄 알고 시신을 처리하던 중 기절해있던 마리야가 다시 깨어나서 소리를 지르자 그들은 그녀가 죽을 때까지 개머리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가격했다.[9]

총에 맞고 급사한 다른 가족과 달리 마리야는 죽은 이유가 명확하지 않다고 한다.[10] 당시 그녀의 나이는 만 19세였다.

다음날에는 마리야의 둘째 이모인 옐리자베타 대공비도 살해되었다. 옐리자베타 대공비는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의 둘째 언니로, 알렉산드라 황후보다 10년 먼저 러시아 제국에 시집와서 살고 있었다.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가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진 것도, 세르게이 대공[11]과 옐리자베타의 결혼식에서였다.

세르게이 대공이 죽은 후 옐리자베타 대공비는 자신의 집을 수녀원으로 개조하였고, 수녀가 되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하여 자선과 봉사에 전념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의 와중에 다른 황족들과 함께 살해당하고 말았으니,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한편 여동생 아나스타시야 공주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생존설이 돌았고, 남동생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 생존설도 있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7. 사후

1991년 니콜라이 2세 일가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이 발굴되었으나, 당초 11구여야 할 시신이 9구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실종된 시신 2구가 아나스타시야 공주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인 줄 알았지만 곧 아나스타시야 공주가 아닌 마리야 공주임을 알게 되었다. 그 후 2007년 실종되었던 유골 2구가 추가적으로 발굴되었는데, DNA 검사를 통해 각각 마리야 공주와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2015년 부모님과 언니들 곁에 묻힐 예정이었으나 교회 쪽의 추가적인 DNA 검사 요구[12]로 인해 아직까지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8. 가족관계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여대공
(Великая княжна Мария Николаевна)
니콜라이 2세
(Император Николай II)
알렉산드르 3세
(Император Александр III)
알렉산드르 2세
(Император Александр II)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Императрица Мария Александровна)
마리야 표도로브나
(Императрица Мария Фёдоровна)
크리스티안 9세
(Kong Christian 9.)
헤센카셀의 루이제
(Louise von Hessen-Kassel)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Императрица Александра Фёдоровна)
헤센 대공 루트비히 4세
(Großherzog Ludwig IV. von Hessen und bei Rhein)
헤센의 카를 공자
(Prinz Karl von Hessen-Darmstadt)
프로이센의 엘리자베트 공주[13]
(Prinzessin Elisabeth von Preußen)
영국의 앨리스 공주
(Princess Alice
of the United Kingdom)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알베르트 공자
(Prince Albert of Saxe-Coburg and Gotha)
빅토리아 여왕
(Queen Victoria)

9. 여담

10. 대중매체

11. 관련 문서


[1] 아버지 니콜라이 2세(170cm)와 키가 같다.[2] Царственные мученики[3] Царственными страстотерпцами[4] 알렉산드라 황후의 결혼 전 이름. 본래 그녀는 독일 헤센 대공국 출신으로 이름은 '알릭스'였는데, 결혼하면서 러시아식인 '알렉산드라'로 개명했다.[5] 작은 언니 타티야나와 더불어 자매들 중 가장 예뻤다는 평을 들을 정도였다.[6] 그렇다고 알렉산드라 황후의 집안이 떨어지는 건 결코 아니었다. 황후의 아버지는 헤센의 대공 루트비히 4세이고 어머니는 빅토리아 여왕의 차녀 앨리스 공주로, 엄연히 러시아의 황제와 혼인이 가능한 통치 가문의 공녀였다. 다만 마리야의 친할머니 마리야 황태후는 며느리감으로 프랑스 공주를 원했고, 황태후의 친정인 덴마크와 황후의 친정인 독일이 사이가 나쁜 것, 활달한 시어머니와 음울한 며느리의 성격 차이, 알렉산드라가 연달아 딸만 넷을 낳는 등의 이유로 고부관계가 냉랭했다고 한다.[7] 첫째 올가와 둘째 타티야나도 서로 가장 친했다.[8] 아마 두피에 상처가 나서 기절했고, 이로 인해 죽은 것으로 오인했던 것 같다.[9] 실제로 마리야의 두개골은 구타의 흔적으로 상당히 손상되어 있었다고 한다.[10] 죽은 원인을 밝히려면 시체를 부검해야 하는데 발견 당시에도 거의 100년이 지난 후였기에 부검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두개골에 총상의 흔적이 있지 않는 이상 어떻게 죽었는지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총격 당시 확실히 죽지 않았었고 두개골 확인 결과 구타의 흔적이 남아 있었던 만큼 마리야의 사인은 '구타' 였을 확률이 높다.[11] 니콜라이 2세의 작은아버지[12] DNA 재검사를 위해 이미 매장한 니콜라이 2세헤센의 알릭스 공녀의 무덤을 다시 파냈다.[13]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손녀이다.[14] 필립 마운트배튼의 어머니인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녀바텐베르크의 공자 루트비히헤센의 빅토리아 공녀의 장녀로, 차남이자 막내인 루이 마운트배튼의 큰누나였다.[15] 한때는 여성도 즉위가 가능했고, 여러 여제들이 재위했던 여제 시대도 있었다. 그러나 예카테리나 2세 사후 어머니와 사이가 나빴던 파벨 1세여성의 계승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면서 그 뒤로 여성의 즉위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러시아로 시집 왔던 마리야의 어머니 알렉산드라 황후는 자신의 외가인 영국에서처럼 공주가 제위에 오를 수 있으리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가 딸을 낳은 뒤에야 황태자가 필요하니 아들을 낳으라는 주변의 독촉을 받고 당황했다는 야사가 있다. 사실 대중에게는 진실처럼 퍼진 이야기이지만 실제로 사실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16] 그러나 타티야나도 외모만 그랬을 뿐, 성격은 쌀쌀맞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수동적이고 순종적이며 차분한 성격이었다고 전해진다.[17] 다만 상술했듯 원역사에서 생존설이 돈 것은 여동생인 아나스타시야.[18] 어머니 헤센의 알릭스 공녀의 친정이 독일이어서 독일식 성을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건 고증오류인데, 헤센의 알릭스 공녀와 그녀의 형제들은 외가인 영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빅토리아 여왕의 차녀인 어머니 앨리스 공주는 아이들을 영국식으로 키웠고, 앨리스가 죽은 후로는 외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이 외손주들과 자주 편지를 주고받는 등 교류했다. 그러나 이 고증오류는 코사카가 알렉산드라 황후가 독일 출신이라는 것만 가지고 독일식으로 자랐다고 착각을 했거나, 이를 알면서도 '어쨌든 독일 공주로 자랐으니까' 하면서 독일식으로 성을 지었다는 설정을 추가하면 보완된다. 유럽의 주요 귀족 가문 출신도 아닌 먼 동방에 있던 나라의 평민인 코사카가 왕실 교육이 어땠는지는 알기 어려웠을 테니 말이다. 거기다 이를 정정해 줄 부인도 이미 세상에 없었으니까.[19] 또한 러시아 혁명군의 눈을 피하기 위해 독일식으로 지은 걸로 추정된다. 러시아와 가까운 일본에서 러시아식 성을 있으면 혁명군의 의심을 살테니깐. 마리야의 사진도 에그에 말고 없는 것 보면 가능성은 높다.[20] 작중에 나오는 중요한 보물.[21] 여기서는 회색 눈을 지녀 자손들도 모두 회색 눈동자를 지녔다고 한다. 다만 실제로 회색 눈동자는 둘째 언니 타티야나가 지녔고 마리야 본인은 푸른색 눈동자였다.[22] 상술했듯 이전에 마리야의 유골이라고 생각된 유골은 아나스타시야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