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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07 01:32:00

리처드 윌리엄슨

<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리처드 윌리엄슨
Richard Williamson
파일:220px-Bishop_Richard_Williamson.jpg
본명 리처드 넬슨 윌리엄슨
Richard Nelson Williamson
출생 1940년 3월 8일 ([age(1940-03-08)]세)
영국 잉글랜드 버킹엄셔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학력 케임브리지 대학교/클레어 칼리지 (영문학 / 학사, 석사)
종교 성공회전통주의 가톨릭
직업 주교
소속 성 비오 10세회(제명)
사목 표어
파일:Coat_of_arms_of_Richard_Williamson.png
Fidelis Inveniatur
(성실한 사람으로 드러나라)[1]
1. 개요2. 생애
2.1. 출생2.2. 청년 시절2.3. 주교 성성과 첫 번째 파문2.4. 파문 철회와 성 비오 10세회의 제명2.5. 두 번째 파문과 성 비오 10세회에서의 제명
3. 평가4. 관련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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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인 가톨릭 주교이자 성 비오 10세회 전 회원. 성공회 신자였지만 1971년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세간으로부터 보수적인 전통 가톨릭 성향 주교 중에서도 특히 강경하다는 평을 듣는다. 2009년 성 비오 10세회 주교 네 명에 관한 파문 철회 조치 후 공식적으로 교황청과 성 비오 10세회 사이에 대화가 시작되자 이에 부정적이었던 그는 이런 의사를 "Eleison Comments"라는 그의 소식지를 통해 꾸준히 표명했다. 결국 소식지를 중단하라는 베르나르 펠레이 총장상(Superior General)의 지시에 순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2012년 10월 성 비오 10세회에서 제명되었다. 제명된 후 특별히 가입한 전통 가톨릭 단체는 없으나 성 비오 10세의 마리아 군대 등 교황청과의 협상에 부정적이지만 교황공석주의자는 아닌 전통 가톨릭 단체들을 지원하고 있다.

영어·프랑스어·독일어·스페인어에 유창하며, 셰익스피어 문학[2]에도 조예가 깊다.

로베르 포리송(1929-2018)과 친분이 있었다.

2. 생애

2.1. 출생

리처드 윌리엄슨 주교는 1940년 3월 8일 버킹엄셔 주(Buckinghamshire County)에서 영국인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윌리엄슨 주교의 아버지는 막스 앤 스펜서라는 영국 패션 기업의 바이어였고 어머니는 가나의 대학교에서 교수직을 역임한 교사로서 유복한 집안 배경을 갖고 있었다. 윌리엄슨의 부모는 독실한 성공회 신자였으며 이에 따라 윌리엄슨도 성공회에서 유아세례를 받았다.

2.2. 청년 시절

윌리엄슨은 윈체스터 칼리지(Winchester College)[3]를 졸업하고 케임브리지 대학교 클레어 대학(Clare College, Cambridge)에서 영문학으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서(西)아프리카 가나에서 잠시 강사로 일하다가 1965년 영국으로 귀국하여 1970년까지 런던에 있는 세인트 폴 학교[4]에서 교사로 일했다. 세인트 폴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던 시절에는 그의 교수법(敎授法)·강론·과외활동으로 학생들의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성공회 신자였지만 가톨릭을 선망하던 리처드 윌리엄슨은 교사직을 그만둔 이듬해 1971년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런던에 있는 오라토리오 수도회(Oratory of Saint Philip Neri)의 브롬프턴 성당(Brompton Oratory)에 출석하며 성소자로 있다가 몇 달만에 그만두고 당시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가 설립한지 얼마 안 되는 스위스 프리부르 주 에콘(Écône)에 위치한 성 비오 10세 국제 신학교(International Seminary of Saint Pius X)에 입학했는데, 이 신학교는 당시 전통 가톨릭 운동의 중심으로 부각되고 있던 성 비오 10세회의 첫 번째 신학교였다. 성 비오 10세 국제 신학교에 입학한 그는 1976년 졸업과 함께 르페브르 대주교로부터 사제로 서품받았다.

사제로 서품받은 리처드 윌리엄슨은 1983년부터 미국의 성 비오 10세회 신학교인 성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교(St. Thomas Aquinas Seminary) 교장으로 부임한 것을 시작으로 사제회 안에서 여러 직책을 역임했다. 1983년 신학교 교장 부임 첫 해에는 당시 성 비오 10세회를 탈퇴하고 교황공석주의자 단체(Society of Saint Pius V)를 설립한 9명의 미국인 사제들과 논쟁을 벌이며 성 비오 10세회의 신학적 입장을 변론하였으며, 그 9명의 사제들이 시도한 성 비오 10세회 재산 탈취 시도를 저지하기 위해 법적 분쟁에도 나섰다.

2.3. 주교 성성과 첫 번째 파문

1983년 고령과 여러 질병으로 언제 사망할 지를 알 수 없게 된 르페브르 대주교는 자신의 뒤를 이을 주교를 성성하겠다고 발표했는데, 이는 또 다시 교황청과의 마찰을 불러왔다. 사제서품의 경우 주교의 권한이기에 교황청이 파문할 권한이나 막을 권한이 없었지만, 주교 성성의 경우 신부를 서품하는 성품성사와는 다른 개념으로 교황의 허락 없이는 주교가 집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초반 르페브르 대주교는 파문을 피하기 위해 교황청과 협상하며 주교 성성일자를 조율하기 시작했다. 윌리엄슨 당시 신부는 성 비오 10세회에서 전통 가톨릭을 수호했다는 경력을 인정받아 르페브르 대주교에게 주교 후보자로 추천받았고, 교황청은 윌리엄슨 주교를 포함한 4명의 신부에 대한 주교 서품 허용 여부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88년까지 교황청은 주교 서품을 차일피일 미뤄왔고, 참다 못한 르페브르 대주교는 "이대로 가다가는 죽기 전에 주교를 서품할 수 없다!" 라는 결론을 내리고, 1988년 6월 30일 주교 성성식을 강행할 것을 발표했다. 교황청은 르페브르 대주교에게 최후 통첩 서한을 보내 교황의 허락 없이 주교를 성성하는 것은 파문에 이르는 대죄이기에 성성식을 취소할 것을 요구받았지만, 이미 교황청에 대해 불신하고 있었던 르페브르 대주교는 깔끔하게 그 서한을 씹었다.

1988년 6월 30일, 윌리엄슨 주교는 르페브르 대주교에 의해 주교로 성성되었고, 그 다음 날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르페브르 대주교, 같이 서품받은 주교 3명, 참관인 주교 1명과 함께 파문당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황의 허락을 무시하고 주교를 성성한 행위는 교도권에 대한 순명을 어긴 대죄이기에, 교회 일치를 위해 파문에 처할 수 밖에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로써 이들은 가톨릭 교회 내에서 어떤 성사나 직무도 합법적으로 집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파문에도 개의치 않고 성사를 집전했고, 1991년 르페브르 대주교가 사망하면서 윌리엄슨 주교는 성 비오 10세회의 총장 자리에 올라, 총장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2.4. 파문 철회와 성 비오 10세회의 제명

1998년 요한 바오로 2세가 트리엔트 미사를 '교구장의 허락이 있다면 트리엔트 미사 봉헌을 사제에게 허락한다.' 라는 공문을 발표한 이후 일치되지 않은 전통 가톨릭 단체와 교황청과의 협상이 다시 시작되었다. 가장 큰 전통 가톨릭 단체였던 성 비오 10세회 역시 이 시기부터 교황청과 20여년간 끊어졌던 일치를 위한 대화를 다시 시작했다. 그러나 윌리엄슨 주교는 이를 결사 반대했고, 현대주의와 자유주의에 물들어가는 교황청과는 타협할 수 없고 이는 거룩한 사도적 정신을 어기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로 인해 성 비오 10세회 내부에서는 교황청과의 대화에 대한 찬반여론이 거세게 일었고, 윌리엄슨 주교는 반대의 선봉주자로 활약했다.

2009년 1월 21일,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르페브르 대주교에게 서품된 주교 4명에 대한 파문을 철회했고, 윌리엄슨 주교도 파문을 철회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따른 결과를 받아들이길 거부하였음으로, 교회 내에서 어떤 직책도 받을 수 없는 주교로 남았다. 대부분의 성 비오 10세회 구성원들은 이 결과를 받아들이고 교황청과의 대화를 이어나가기 위해 노력한다는 뜻을 밝혔지만, 윌리엄슨 주교는 성 비오 10세회와 교황청과의 대화와 끝까지 반발하여 결국 2012년, 자신의 뜻을 따르는 신자들과 함께 성 비오 10세회를 이탈하여 새로운 전통 가톨릭 단체인 성 비오 10세의 마리아 군대를 설립하고 1대 총장으로 재임했다. 총장에서 물러난 뒤에는 성 비오 10세회 마리아의 군대에서 탈퇴하였으나 여전히 마리아의 군대에서는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아니, 사실상 윌리엄슨 주교가 마리아의 군대 단체 그 자체다.

2.5. 두 번째 파문과 성 비오 10세회에서의 제명

2012년 윌리엄슨 주교는 성좌의 위임 없이 2명을 주교로 축성하여 교회법이 정한 파문의 중벌을 당하였다.[5] 성 비오 10세회 또한 이 주교 축성에 비판적이었고, 교황청과 화해한 전통 가톨릭 단체 측에서도 이에 비판적이었다. 이후에도 2015년, 2017년에도 또 다시 불법적으로 주교를 성성하였다.

2012년 10월에는 성 비오 10세회에서도 제명을 당했다.

3. 평가

평가가 갈리는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와 달리 윌리엄슨 주교는 전통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도 많은 비판을 받는 주교 중 1명이다. 일단 그가 창설한 마르셀 르페브르 사제회 자체가 교황공석주의에 가까울 정도로 수구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고, 교황청과의 대화에 부정적이며, 교황의 허락 없이 불법적으로 주교를 서품하는 등 가톨릭에서 대죄로 규정하는 불순명의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윌리엄슨 주교는 과거 홀로코스트 축소론을 공개적으로 주장하다가 서구 사회에서 비판이라는 비판은 모두 받고 사실상 지지층을 거의 잃어버렸다.

또한 여성은 직업을 가져서는 안되며 대학교육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식의 여성차별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한다.

강경하다는 이미지와 반대로 교회법을 무시하거나 현실적인 문제에 타협하는 경향이 있다. 물주[6]한국의 개신교 사학재단[7] 이사장이고 밥줄이 한국의 개신교 사학재단이다. 윌리엄슨 산하 신학교 건축과 운영, 윌리엄슨 본인의 의식주, 성당 건물 매입, 성당 관리, 윌리엄슨 산하 사제들 사목비용의 대부분을 개신교 학교들의 수입에 의존하다보니 목사들도 옳은 말 한다고 합리화하고[8] 개신교가 현대가톨릭보다 상대적으로 유익하므로 괜찮고 이사장이 좋은 일 많이 했으니 괜찮고[9] 가업일뿐이므로 괜찮다며[10] 개신교 학교 운영을 지지함으로[11] 한국의 중고등학생들에게 채플을 시키고 개신교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암송시키며 사목 비용을 충당하고 있다. 진작에 자동파문된 지 오래다. 사실 일부 가톨릭 신자들의 환상과 정반대로 군소 저항사제단체나 비소속 공석주의 사제, 주교들의 비참한 현실이 오래된 병폐다. 돈줄을 쥔 평신도가 사실상 주교를 컨트롤할 수 있거나 주교가 지원을 많이 하는 평신도의 눈치를 살피거나 문제를 묵인이나 함구하거나 혹은 전통주의자라면서 주교가 현실과[12] 타협하는 경우가 근근히 있다. 정말로 본인이 이 윌리엄슨 주교 산하 단체로 전향하려는 고민이 든다면 그 곳에 방문했을 때 구성원들에게 이와 같은 쟁점들에 대해 질문해보자. 양파처럼 껍질을 까면깔수록 이상한게 계속 나온다. 윌리엄슨 본인의 내면적인 부분의 겸손(?)함이나 인품(?)이랑 별개로 약간 자기만의 세상에 갇히거나 자기합리화를 하는 모습을 보인다. 전통 가톨릭이니 강경하니는 포장이고 실제로는 그냥 내로남불이다.

4. 관련 영상

아래 링크된 동영상은 리처드 윌리엄슨 주교의 강론, 강의 영상들이다.

진짜 역사[13]

교황공석주의 & 자유주의

묵시록의 일곱 교회

선(善)으로써 악(惡)을 이길지어다.
[1] 코린토 1서 4장 2절.[2] 이는 그가 대학 재학 중 영문학을 전공으로 했고 개인적으로도 셰익스피어에 관해 연구하기 때문이다.[3] 'College'는 영국에서 대학 진학을 준비하는 중등학교를 의미한다.[4] 대학 진학을 준비하는 중등학교.[5] 제 1382 조 성좌의 위임 없이 어떤 이를 주교로 축성하는 주교와, 또한 그에게서 축성을 받는 자는 사도좌에 유보된 자동 처벌의 파문 제재를 받는다.[6] 일부 mcspx 신자들이 해당 이사장을 단순 신자일 뿐이라고 옹호하지만 윌리엄슨은 자신을 후원하는 한국의 개신교 사학재단 이사장에게 이메일을 통하여 신학생들의 개인정보, 자질평가 그리고 퇴학사유 등을 지속적으로 넘긴 사건이 있다.[14][7] 해당 학교는 천주교인 학생, 직원, 교원에게도 강제적으로 개신교 기도문, 채플, 예배참석을 시킨다.[8] 가톨릭 신자라면 할 수 없는 희대의 논리이다. 이슬람교인도 일부 옳은 말을 하며 고장난 시계도 하루에 두번은 맞는다. 이단의 의미를 상기해보자. 옳은 말을 하는지가 아니라 오류가 있는지로 이단을 판별한다.[9] 논점이탈의 오류[10] 이것도 상식 밖의 논리이다. 가업이 남에게 해로우면 그만두어야 한다. 고리대금업이 가업이면 해도 괜찮다는 말인가.[11] 주교라면 방임만으로도 자동파문인데 심지어 지지하고 있다.[12] 자동파문이나 대죄에 해당하는 행위로[13] 1997년 리처드 윌리엄슨 주교의 미국 성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교에서 한 강의 영상. 성 비오 10세회 제명 전 강의 내용의 녹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