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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7 07:39:53

러시아령 아메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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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령 아메리카
Русская Америка
파일:러시아-아메리카 회사 깃발.svg 파일:러시아령 아메리카 국장.svg
깃발 문장
파일:external/vignette3.wikia.nocookie.net/Map_of_the_Pacific_Northwest_1850_(Russian_America).png
1799년 ~ 1867년
성립 이전 해체 이후
알래스카 원주민 미국
[[알래스카|'''{{{#!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142859; font-size: .8em"''']]
영역 알래스카
브리티시컬럼비아
워싱턴주
오리건
캘리포니아 일부
하와이 일부
수도 노보아르한겔스크[1]
정치체제 러시아 제국식민지
국가원수 황제(임페라토르)
언어 러시아어
주요사건 1799년 러시아의 식민지화
1867년 알래스카 조약 체결
통화 루블

1. 개요2. 역사3. 여담4. 관련 문서5.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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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령 아메리카(Русская Америка, Russian America)는 1799년부터 1867년까지 러시아 제국의 식민지였던 알래스카를 말한다. 1812년부터 1841년까지 점유했던 캘리포니아의 로스 요새(крепость Росс), 하와이에 새워져 있던 세 요새 정착지도 포함된다. 미국러시아 제국 사이에 맺어진 알래스카 조약에 의해 알래스카는 미국령이 되었다.

2. 역사

1741년 덴마크계 러시아인 항해사 비투스 요나센 베링(Vitus Jonassen Bering, 1681년 ~ 1741년)이 러시아 제국의 황제 표트르 대제의 요구로 북아메리카 항해를 시작하여 알래스카 해안과 알류샨 열도를 발견하였는데 그의 발견 이후 알래스카 항해에서 돌아온 선원들이 러시아로 가져온 알래스카 산 해달 모피가 러시아와 유럽 귀족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러시아는 알래스카에 주목하기 시작하였고 이후 해달 모피사업을 위해 알래스카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1743년 러시아 상인들이 중심이 된 항해선 표트르 호는 베링 해로 진출하는데 성공하였다. 베링 해에는 해달과 강치가 풍부했기 때문에 이후 러시아의 모피산업이 확장될 수 있었다.

1784년 러시아인 모피상인이었던 그리고리 셸리호프(Григорий Шелихов, 1747년 ~ 1795년)의 탐험대가 코디액 섬에 상륙하였다. 셸리호프 탐험대는 코디악 섬을 정착지로 삼고 수산물, 모피산업 관련 공장을 설립하였으며 점차 조선업, 광산업, 가공업 등으로 산업을 확장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1784년 8월 14일에 선주민이었던 알루티크족이 최소 500명에서 최대 3,000명 가량 학살당하는 아와우크 학살(Awa'uq Massacre, резнёй в Авауке)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1792년에는 코디액 섬에 거주하던 정착민들이 파블로프 항(Павловская гавань)으로 이주하였다.

1799년 러시아는 자신들이 영유하는 알래스카를 '러시아령 아메리카'라고 하여 영유권을 선언하였으며 동시에 바라노프 섬의 싯카(Sitka, 당시 이름은 노보아르한겔스크·Ново-Архангельск)지역에 미하일로프 요새(Михайловская крепость)를 건설하였다. 이 지역은 빠른 성장을 보이면서 1819년에는 1,200명의 인구[2]와 함께 학교, 공장, 무기고 등이 설립되었다. 러시아인들은 알래스카에 그치지 않고 남쪽으로는 지금의 샌프란시스코 인근까지 진출했고 캘리포니아 한복판에 러시안 리버라는 강 이름은 물론[3] 소노마 카운티에 로스 요새와 러시아 정교회 성당인 성삼위일체 성당이 현재까지도 남아있다.

1853년부터 1856년까지 지속된 크림 전쟁으로 러시아 제국의 재정이 파탄나자 러시아 정부는 이용가치가 없어진 러시아령 아메리카를 미국에 매매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전세계에서 그레이트 게임이라 불리는 경쟁을 하던 러시아의 주요 적국 영국캐나다를 영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 정부는 유사시 영국에 맞서 알래스카를 보전하기 힘들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영국보다는 비교적 우호적이고 당시 기준으로 덜 위협적인 미국에게 알래스카를 매매하고 재정도 확보하고자 하였다. 1867년 3월 18일 러시아 제국은 미국과 알래스카 조약을 체결해 알래스카와 그 부속도서를 720만 달러에 매매하였다. 이로써 러시아의 아메리카 진출은 종결되었다. 후대에 이 선택이 큰 실수였다는 것을 당시 그 누구도 인지하지 못했다.[4]

3. 여담

대중들에게는 상술한 포트 로스가 건설될 때 이 지역을 탐험하던 러시아 해군 소속의 탐험가인 니콜라이 레자노프와 이 시기에는 스페인령이었던 멕시코캘리포니아 지역의 행정관의 딸인 콘셉시온 아르구엘로와의 로맨스가 매우 유명하다. 당시 러시아가 레자노프의 활약으로 당시 스페인령이던 멕시코와 국경을 맞대는 수준으로 식민지를 크게 확장했는데, 이때 오늘날의 샌프란시스코 인근 지역에 포트 로스라는 러시아령 도시 겸 요새를 짓기 위해 스페인과 협상하려는 와중에 만나서 친분을 쌓은 사람이 콘셉시온 아르구엘로의 아버지고 그녀와도 만나서 서로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은 약혼까지 하였으나 믿는 종교가 러시아 정교회가톨릭으로 서로 달라서 결혼을 미루던 중에, 레자노프가 잠시 러시아 본국의 크라스노야르스크로 갔다가 그곳에서 열병으로 쓰러져서 포트 로스로 돌아가지 못하고 사망하는 바람에, 둘의 로맨스는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이로 인해 크게 상심한 콘셉시온 아르구엘로는 가톨릭수녀가 되어 일평생을 독신으로 살다가 1857년에 사망했다.

이 일화는 러시아멕시코 양국에서는 매우 유명한 이야기인지라 소련 시절이었던 1979년에 유노와 아보스라는 록 음악 오페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4. 관련 문서

5. 참고 문헌



[1] 현재의 싯카이다. 이름의 뜻은 신(新) 아르한겔스크.[2] 200명의 러시아 정착민, 1,000명의 원주민으로 구성되었다.[3] 캘리포니아의 유명 맥주 양조업체 중 한 곳의 이름이 러시안 리버인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다.[4] 엄밀히 말해서 러시아 제국은 알래스카 조약으로 인해 손해본 적이 없다.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아메리카 대륙에 러시아령을 유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설령 유지하였더라도 러시아 혁명러시아 내전의 혼란스러운 정국으로 인해 신경 쓸 겨를이 없어 그때를 틈타서 영국이 캐나다의 일부로 편입시키거나 별개의 식민지로 삼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