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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와 체코의 관계에 대한 문서이다. 양국은 나토와 유럽연합의 일원으로 솅겐 협정에 가입했기 때문에 양국 국민들은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무비자로 입국가능하다.2. 역사적 관계
2.1. 근세
체코의 전신인 보헤미아 공국과 보헤미아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에 속했으며, 동방식민운동의 영향으로 주데텐란트에는 다수의 독일인이 거주했다. 룩셈부르크 왕조의 강화를 바랬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보헤미아 국왕이었던 카를 4세는 1356년 금인 칙서를 발표하여 보헤미아 국왕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선거에 참여할 권리를 공식적으로 부여하였다. 그러나 카를 4세의 아들들 바츨라프 4세와 지기스문트는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얀 후스를 처형한 여파로 후스 전쟁에 휘말렸다.종교 개혁 시대에는 마르틴 루터의 영향으로 후스주의가 부활하였고 보헤미아와 슬레스코를 중심으로 개신교 사상가들이 출현하였다. 보헤미아의 개신교도들을 합스부르크 가문이 탄압하는 과정에서 촉발된 30년 전쟁의 결과 보헤미아 왕관령 전역에서 체코인 인구가 대폭 감소하고 빈 자리를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각지에서 온 독일인 이주민들이 채웠다.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서는 체코어 대신 독일어 사용이 확대되었다. 한 편 프로이센 왕국은 1740년, 마리아 테레지아의 합스부르크 세습령 세습으로 인해 촉발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으로 보헤미아 왕관령에 속해있던 슬레스코를 합병하였다.
2.2. 19세기
1848년 혁명 당시 독일의 자유주의 사상가들은 체코인 민족주의자들을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로 초대하였으나, 체코인들은 자신들이 독일인이 아니라며 이를 거절하였다. 당시 고등교육을 이수한 체코인 대부분은 독일어를 읽고 쓸 줄 알며, 높은 수준의 독일 문화를 공유하기도 했고, 보헤미아 왕관령이 오랫동안 신성 로마 제국의 구성국이었기 때문에 대부분 독일인들은 보헤미아 역시 신생 통일 독일이 탄생하면 합류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체코인들은 독일 통일 논의에 참여하지 않았고, 오스트리아 제국 역시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패전하여 독일 연방에서 축출당해 독일 통일에서 배제되었다.2.3. 20세기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독일 제국이 패전 위기에 몰리자 체코인들은 오스트로슬라브주의를 포기하고 독립하기로 결정하였고, 헝가리 왕국 산하의 슬로바키아인과 연대하여 체코슬로바키아를 건국하였다. 신생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에는 상당수의 독일계 주민들이 거주하였고, 이는 후일 독일과 체코 사이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주데텐란트를 노린 나치 독일에 의해 1938년 뮌헨 협정이 체결되어 체코슬로바키아는 분할 점령되었다.# 독일의 주데텐란트 병합에 반대하던 체코의 제2대 대통령 에드바르트 베네시는 뮌헨 협정 이후 영국으로 망명하였다.제2차 세계 대전에서 나치 독일이 패배하고, 체코슬로바키아는 다시금 독립을 쟁취하였다. 전후 처리 과정에서 체코에 거주하던 독일계 인구 상당수가 독일로 추방되었다. 냉전 시절에는 동독 주민들이 동서독 통일 이전에 체코를 경유하여 서독으로 망명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냉전 종료 이후인 1992년 2월 27일, 독일의 헬무트 콜 총리와 체코슬로바키아의 바츨라프 하벨 대통령은 체코-독일 선언으로 알려진 우호 조약에 서명하였다.
체코는 독일에 있는 몰다우하펜[1]을 임대하는 중이고 2028년에 독일에게 돌려줄 예정이다.
2.4. 21세기
체코가 2004년에 유럽연합에 가입하면서 양국은 유럽연합 회원국이 되었다. 한 편 체코는 과거사 문제로 독일의 상임이사국 진출에 대해 반대하는 편이다.[2]2021년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공세 당시 독일 측은 유럽연합 각국이 난민 수용을 분담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한 반면 체코 측은 아프가니스탄 난민 수용에 난색을 표시하였다.# 2023년 독일-체코 국경을 넘어 독일로 밀입국하는 중동, 아프리카발 난민 수가 증가하자 독일 측에서 국경 경비를 강화하였다.#
3. 문화 교류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장기간 지배를 받는 동안 체코어에는 독일어에서 유래된 어휘 상당부분이 유입되었다. 오늘날에는 독일에서 직장을 구하는 체코인들이 많은 이유로 체코 내에서 독일어 학습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4. 관련 문서
[1] 독일 함부르크 안에 있는 체코의 조차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조차지가 되었다가, 아돌프 히틀러가 뮌헨 협정으로 체코슬로바키아를 병탄하면서 독일 땅이 됐다가, 1991년 동서독 통일이 되자 다시 체코슬로바키아가 재임차를 했고, 1993년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나라가 쪼개지면서 체코의 조차지가 됐다.[2] 독일의 체코 침략은 홀로코스트 수준으로 국제적으로 공론화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주데텐란트를 방문한 독일인 관광객들이 "여기는 우리가 되찾아야 하는 고토이다."라는 식으로 말해서 체코인들의 어그로를 끄는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주데텐란트를 방문하는 독일인 상당수가 체코에서 쫓겨난 실향민인 적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