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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14:50

남한산성(영화)/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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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작과의 차이점2. 역사와 다른 점3. 기존 사극과 비교점4. 실제 역사와 다른 점
4.1. 김류를 폄훼했다?4.2. 척화론을 제대로 조명하지 않았다?

1. 원작과의 차이점

2. 역사와 다른 점

▲ 제작기 영상

3. 기존 사극과 비교점

4. 실제 역사와 다른 점

4.1. 김류를 폄훼했다?

"당시의 김류는 조정 신료들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는 데 골몰하던 보수파적 인물로 보는 것이 온당하다. 그는 병자년 이전부터 도체찰사직을 맡아 수행하면서, 주화론적 입장에 공감하는 동시에 척화파의 말대로 청과의 결전이 이루어질 가능성 또한 염두에 두고 북변 방어 체제 구축에 상당한 성의로 임하는 등, 합리적인 면모를 보였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영화는 김상헌을 조선의 충신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김류를 비롯한 조정 대신들을 과하게 깎아내렸다."는 주장이 있다.

다만 김류가 주위에 만류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성 밖의 적군을 공격하다가 큰 피해를 냈고, 그 후에 아랫사람에게 책임 전가를 하는 등 찌질한 모습을 보였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 그대로다.
○ 29일에 날씨가 잠깐 화창하니 군사들의 얼굴에 생기가 났다. 김류가 동서남북 네 성의 장수를 불러 명하기를, “남성(南城) 아래에 적의 진영이 매우 엉성하니, 각각 정예군을 내어 무찌르도록 하라.” 하니, 네 장수가 모두 그 계책이 잘못된 것을 역설하였는데 김류가 듣지 않고 친히 장졸을 거느리고 북문에 앉아 대장의 깃발과 북을 세우고 병기를 휘두르면서 싸움을 독려하였다. 성 아래에는 개울이 굽이져 있었는데 오랑캐의 기병이 곳곳에 매복한 채 겉으로는 고군(古郡) 남쪽 4, 5백 보 거리로 물러가서 군사와 소ㆍ말을 약간 머물려 주둔시켜 놓고 유인하였다. 김류가 깃발을 휘두르며 진군할 것을 명령하니 우리 군사가 서로 버티면서 산에서 내려가려 하지 않자, 김류가 비장(裨將) 유호(柳瑚)를 시켜 나가지 않는 자를 목베게 하였다. 이에 유호가 만나는 사람마다 함부로 찍어 죽이니, 온 군사가 내려가면 반드시 죽을 것을 알면서도 내려가는데, 별장(別將) 신성립(申誠立)은 사람들과 영결(永訣)하고서 가기에 이르렀다. 우리 군사들이 그들의 남겨둔 소와 말을 취하는데도 적들은 못본 체하고 있다가, 우리 군사가 송책(松柵) 밖으로 다 나온 뒤에야 비로소 적이 말을 채찍질하여 나는 듯이 돌격해 들어오고 복병이 사방에서 일어나 곧장 우리 군사의 앞뒤를 끊었다. 이에 우리 군사는 총 한 방, 화살 한 번도 쏘지 못한 채 순식간에 짓밟혀 죽은 자가 거의 2백 명이고 신성립(申誠立)과 지여해(池如海)와 이원길(李元吉) 등도 모두 죽었는데, 오랑캐 군사로 죽은 자는 다만 두 사람 뿐이었다.

(중략)

유호가 또 초관(哨官)에게 죄를 돌려 퇴군하지 못했다 하여 베어 죽이니, 사람들이 모두 원통하게 여겼다. 김류가 허물을 돌릴 곳이 없자 원두표가 구원하지 못한 탓이라 변명하여 장차 사형에 처하려 하자, 홍서봉이 말하기를, “수장(首將)이 군율을 어기고서 부장에게 죄를 돌려서야 되겠는가.” 하자,김류가 마지못해 대궐에 엎드려 대죄하고, 원두표의 중군을 매 때려 거의 죽게 하였다. 처음에 정예 군사를 모두 체찰부에 예속하였는데, 사상자가 적어도 3백 명에서 내려가지 않았는데도 사실대로 보고하기를 싫어하여 40명이라 아뢰니, 이로부터 사기가 떨어지고 묘당에서도 또한 화친하는 것에 전념하게 되었다. 《병자록》 《잡기》

연려실기술 제25권 / 병자노란(丙子虜亂)과 정축 남한출성(南漢出城)

실록만 보면 알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사찬 사서인 병자록(을 인용한 연려실기술)에는 이와 같이 김류의 찌질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김류의 명령으로 장교가 아군을 베어 죽였던 것도 실화였다. 영화에는 묘사되지 않았지만 사상자를 축소 보고하기까지 했다.

실록이 병자호란의 주요 전투들을 대체로 간략하게 기록한 반면, 연려실기술이나 병자록·남한일기류의 각종 사찬 사서는 상세하게 기록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병자호란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은 사찬 사서들도 중요한 1차 사료로서 취급한다. 그것이 그 사료들의 모든 내용이 진실이라는 뜻은 될 수 없지만, 적어도 영화가 김류를 깎아내리기 위해 없는 얘기를 지어낸 것은 아닌 것이다.
이날 북문 밖으로 출병하여 평지에 진을 쳤는데 적이 상대하여 싸우려 하지 않았다. 날이 저물 무렵 체찰사 김류가 성 위에서 군사를 거두어 성으로 올라 오라고 전령하였다. 그 때 갑자기 적이 뒤에서 엄습하여 별장 신성립(申誠立) 등 8명이 모두 죽고 사졸도 사상자가 매우 많았다. 김류가 군사를 전복시키고 일을 그르친 것으로 대죄(待罪)하니, 상이 위유(慰諭)하였다.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29일 기해 3번째기사

관련 기록들을 김류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해서, 실록과 교차 검증되는 부분만 인정한다고 해도, 김류가 직접 지휘한 전투에서 조선군이 큰 피해를 입었음은 사실로 볼 수밖에 없다. 위의 29일자 기사는 누구의 명령으로 출병을 이뤄졌는가를 명시하지 않고 김류가 후퇴를 명령한 사실만 강조하고 있어 패전에 대한 김류의 책임을 상당 부분 면책시키고 있으나, 연려실기술이 기록한 대로 출병을 명령한 주체가 체찰사 김류임을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김류가 아뢰기를,

"신이 지휘를 잘못하여 참패하였으니, 황공하여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보병과 기병의 형세는 현격하게 다른데, 경솔하게 평지에 내려갔으니 어떻게 패하지 않겠는가. 중원(中原)에는 평지에 내려갔을 경우 처벌하는 군율이 있는데, 이는 패몰하게 될까 염려해서이다."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30일 경자 2번째기사

이와 같이 바로 이튿날 기사에서, 인조가 병력 구성이 보병 위주임에도 고지의 이로움을 버리고 평지로 내려간 실책을 김류에게 탓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전투에서 보여준 김류의 잘못된 지휘와 지시는 충분히 비판 받을 만한 사안이다.

12월 14일, 인조는 청군이 개성을 지났다는 개성 유수의 장계를 받고 강화도로 파천을 결심했으나, 한성부를 뜨려는 순간에 적군이 양철평, 지금의 서울 은평구 녹번동 일대까지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는 목적지를 바꿔 남한산성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김류는 기껏 들어온 요새에서 엉뚱하게도 다시 강화도로 옮겨 갈 것을 주장했던 것이다. 적의 정확한 위치도 모르면서 경기도를 크게 가로질러 다른 피난지를 구하자는 것은 위험천만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삼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화도로 2차 몽진이 시도되었으나, 눈보라가 몰아쳐서 말을 타고 가는 것은 불가능했던 까닭에 결국 발걸음을 돌리게 된다. 하지만 김류는 그 후에도 미련을 못 버리고 병조판서 이성구와 함께 강화도 행을 강력하게 건의했다.

물론 김류가 강화도에 꽂혀 있던 것이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섬이라서 방어에 유리했고, 평야를 품고 있으니 군량도 넉넉했을 것이다. 멀리는 몽골 침입 때 가까이는 정묘호란 때도 북방 이민족에게 함락되지 않았던 전력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일은 상황을 봐 가면서 해야 하는 법이다. 아무리 강도(江都)가 탐스럽게 보여도 적을 아슬아슬하게 피해서 산성에 들어왔으면 거기서 버틸 생각을 하는 게 맞다. 굳이 또 이동을 하겠다면 적으로부터 멀어지는 방향을 선택했어야지, 서북에서 내려온 적을 맞아 서북방으로 이동해서 강화도로 들어가자는 것은 어리석은 제안이었다.

12월 17일에는 인조에게 송고종의 고사를 들먹이며 최소 호위 병력만 거느리고 탈출하라는 도박을 제안하기도 했다. 본인도 그러한 계책은 만에 하나의 행운[萬一之幸]을 바라는 요행수임을 알고 있으면서 말이다.

기본적으로 김류는 전시 재상으로서 낙제점을 면하기 힘든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사실 영화가 가장 강조한 김류의 부정적인 면모는, 처음에는 무책임하게 척화론을 주장하다가 사세가 불리해지니 살고 싶어서 주화론으로 돌아서는 기회주의적 행태였다. 이것이 현대인의 일방적인 매도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당대, 그러니까 병자호란 당시부터 김류는 그러한 인물로 세간에 비춰지고 있었다.
전하께서 꼭 전후에 걸쳐 화친을 배척한 사람을 모두 잡아 보내려 하실 경우, 대소 신료 중에 누구를 취하고 누구를 놔두시겠습니까? 신이 지난해에 경연에 입시하여 영의정 김류가 화친을 배척하는 말을 하는 것을 여러 번 들었는데, 신사(信使)는 보낼 수 없으며 청나라에 글을 보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김류 또한 화친을 배척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전하께서는 유독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지금 만약 김류 등은 묘당에 편히 있게 하고 단지 평일에 시행되지도 않은 헛말을 한 사류(士流)만 택하여 간사한 사람들의 마음을 쾌하게 할 경우, 신은 신하를 대우하는 전하의 의리 역시 두텁고 얇은 차이가 있는 것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구구하고 어리석은 계책으로는, 진실로 이 무리들을 베어 임금을 무시하고 나라를 그르친 죄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북쪽으로 끌려가는 치욕을 끝내 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성에서 나가기도 전에 먼저 무너져 흩어질 염려가 있을 듯싶습니다. 신이 근일에 이 무리들의 정상을 익숙히 보고 통분스러운 마음이 골수에 사무쳐 한마디 하려고 생각한 지가 오래였습니다. 그러나 단지 이 무리들이 바야흐로 국사를 맡고 있어 말해도 무익할 뿐 분란만 초래할까 참으로 염려되었기 때문에 머뭇거리고 은인자중하며 감히 발언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일이 이미 끝장이 나 희망이 없는 상태입니다. 이에 한번 죽을 계획을 결심하고 어리석은 심정을 모두 진달하니, 전하께서 혹시라도 신이 무고하는 말을 한다고 여겨지시거든 먼저 신의 머리를 베어 간교한 사람들의 마음을 쾌하게 하소서. 신은 차라리 송(宋)나라의 진동(陳東)처럼 죽을지언정 차마 이 무리들과 함께 천지 사이에 서지는 못하겠습니다.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3일 계해 12번째기사

1637년 1월 22일부터 조선 정부는 청나라 측에서 요구한 척화신의 압송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자, 그래 척화신들을 묶어 보내자, 누구를 보내야 하나, 보내서는 안 된다. 서로 목소리를 높이며 조정이 들끓었는데, 위의 상소는 압송을 반대한 의견 중 하나다. 이 상소에서 글쓴이는 척화신들을 적진에 보내는 것이 부당함을 지적하며, 똑같이 척화를 주장했음에도 중신들은 책임을 면하게 된 현실을 꼬집고 있다. 그러면서 입에 올린 게 바로 김류의 이름이다. 얼마나 꼴 같지 않았으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영의정을 두고 죽여버리자는 극언도 서슴치 않고 있다.

그 때 조선 조정에 척화에서 주화로 돌아선 인물이 한둘이었겠냐만은, 상소를 올린 유계가 언급한 실명이 김류 하나였던 걸 보면, 김류가 그런 면에서 뭔가 남달랐긴 했던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서 김류는 이런 짓거리까지 했다.
김류가 아뢰기를,

"오늘 화친을 배척한 사람을 붙잡아 보내야 할텐데, 사람들이 모두 엄호하면서 곧바로 지목하려 들지 않습니다. 저들이 이미 앞장서서 모의하여 맹세를 무너뜨린 자를 대상으로 삼았고 보면, 지난 봄에 논주(論奏)한 자와 그 뒤로 준론(峻論)한 자는 의당 스스로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자수한 자 외에도 지난 봄에 그 일을 말한 사람이 한두 사람 뿐만이 아닐 뿐더러 그 경중(輕重)도 모르는 판인데, 또 어떻게 취사 선택할 수 있겠습니까. 신들의 생각으로는 그 당시의 삼사 및 오늘날 자수한 자를 아울러 잡아 보내면 저들이 반드시 숫자가 많은 것을 기뻐하리라 여겨집니다."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8일 무진 3번째기사

일국의 재상으로서 동료들을 구하려고 노력하기는 커녕, "청나라를 만족시키기 위해 지난 날 척화를 입에 올린 사람이라면 누가 강하게 주장했네 약하게 주장했네를 가리지 말고 전부 잡아 보내자."고 주장한 것이다. 물론 자기는 쏙 빼놓고 말이다. 호란 당시에 대간들이 사사건건 태클 거는 것에 질렸는지, 내가 오랑캐를 배척하자 주장했으니 나를 묶어 가시오 하며 자수한 사람들과 함께, 특별히 사헌부·사간원·홍문관 삼사의 관리들 전원을 지목하고 있다.

인조 시기 전반을 그렸다면 모를까,[20] 남한산성 전투 시기만을 다룬 창작물에서 당시의 조정 대신 하나를 악역으로 삼자면 김류만한 자가 없었던 것이다.

4.2. 척화론을 제대로 조명하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척화론이 단순한 명분론이 아니라 실리적인 면이 있었는데 영화에서 반영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척화론의 근거가 선명하게 표현되지 않은 탓에 관객이 척화론자의 입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된 측면이 있다. 척화론자들은 결코 명과의 의리와 같은 명분만을 놓고 척화를 주장한 것이 아니라, 실제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했던 것이다. 여진·거란 등의 유목민족들은 늘 급양 능력을 초과하는 수준으로 군세를 끌어모은 후 기병의 빠른 발을 이용해 수도를 직격해서 적의 우두머리를 붙잡고 항복을 강요한 뒤 병참이 한계에 다다르기 전에 군사를 물리는 속전속결 전략을 취해 왔다. 그러므로 설사 남한산성의 성첩에 붙어 있는 대신과 왕이 전부 죽는다 하더라도, 항복 조약을 맺지 않고 적의 보급이 한계에 이를 때까지 버티기만 한다면 전술적 패배는 있을지라도 전략적으로는 우리의 승리라는 것이 척화론의 근거였던 것이다. 대명 사대라는 명분은 조정의 이러한 주장을 포장하기 위한 수사였을 뿐이다. 즉 척화론은 지도층이 전부 죽더라도 국가는 살아남아서 자주를 지켜야 한다는 다른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표현이었지 비현실적인 교조주의가 아니었다. [요약]
그러나 이러한 주장과는 달리 병자호란 발발 전과 진행 과정에서 제기된 척화론은 철저히 교조주의적인 명분론 위주였다는 반박이 있다.

1636년 초까지 인조 정권은 내심 만주 왕조를 경멸하면서도 적당히 비위를 맞춰 주는 정책을 유지하고 있었다. 광해군의 중립 외교를 계승했다는 평가가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이미 후금의 침략에 무력하게 무너진 전적이 있었으니, 다들 미치지 않은 이상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조정에 척화론이 득세하고 외부적으로도 반청 기조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 1636년 용골대의 입국 때부터다. 그때, 나중에 삼학사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 사헌부의 홍익한이 이런 상소를 올린다.
"신이 들으니, 지금 용호(龍胡)가 온 것은 바로 금한(金汗)을 황제라 칭하는 일 때문이라고 합니다. 신이 태어난 처음부터 다만 대명(大明)의 천자가 있다고만 들었을 뿐이었는데, 이런 말이 어찌하여 들린단 말입니까.

(중략)

우리 나라는 본디 예의의 나라로 소문이 나서 천하가 소중화(小中華)라 일컫고 있으며 열성(列聖)들이 서로 계승하면서 한마음으로 사대하기를 정성스럽고 부지런히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오랑캐를 섬기며 편안함을 취해 겨우 보존하고 있습니다. 비록 세월을 연장해 가고 있으나, 조종들에 대해서는 어쩌겠으며, 천하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쩌겠으며, 후세에 대해서는 어쩌겠습니까.

(중략)

그들이 맹약을 변경하고 흔단을 연 것은, 우리를 호통하고 우리를 업신여기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우리에게 신의를 지킬 것을 요구하는 것을 보면 장차 천하에 일컫기를 ‘조선이 우리를 높여 천자로 삼았다.’고 하려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 전하께서는 무슨 면목으로 천하에 서시렵니까.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그가 보낸 사신을 죽이고 그 국서를 취하여 사신의 머리를 함에 담아 명나라 조정에 주문한 다음 형제의 약속을 배신한 것과 참람하게 천자의 호를 일컫는 것을 책하면서 예의의 중대함을 분명히 말하고 이웃 나라의 도리를 상세히 진술한다면, 우리의 설명이 더욱 펴지고 우리의 형세가 더욱 확장될 것으로 여겨집니다.

간곡히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스스로 힘써 분발하고 큰 용기를 더욱 떨쳐서 빨리 관(館)에 있는 노사(虜使)를 잡아다 큰길에 늘어 놓고 분명하게 천하의 주멸(誅滅)를 가하소서. 만일 신의 말을 망령되어 쓸 수 없다고 여기신다면, 신의 머리를 참하여 오랑캐에게 사과하소서."

인조실록 32권, 인조 14년 2월 21일 병신 1번째기사

결론은 후금 사신을 참수해서 그 머리를 명나라에 바치자는 거다. 척화의 근거는 대명 천자 타령, 소중화 타령, 사대 타령 뿐이지, 중원 왕조와 만주 왕조 사이의 전쟁은 명조의 승리로 끝날 테니 그 때에 대비해서 지금은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는 식의 실리적인 주장은 하나도 없다.

홍익한만 이랬던 게 아니라 척화론을 주장하는 신료들은 하나같이 현실 감각이 마비된 자들이었다.

"오랑캐의 국서를 태우고 사신을 참해야 하며 그러다 나라가 망하더라도 후세에 찬사를 받을 것"이라는 홍문관의 상소

"조선이 일어난 근본이 중국을 섬기는 데 있으니 명나라를 배반하는 것은 천심을 거르는 것이요 나라가 망하는 길"이라는 홍문관 교리 조빈의 상소

"정묘년에 지긴 했지만 그 후로 싸운 적이 없으니 실제로 붙으면 누가 이길지 모르는 것"이라는 이조 참판 정온의 차자와, "나라가 망하든 말든 척화하겠다는 '정론'이 바뀌었음이 슬퍼서 통곡하고 싶다"는 홍문관 교리 김익희, 부수찬 이상형의 차자

'실리적인 관점의 척화 주장'의 근거로 거론되는 사료는 이런 것이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노사(虜使)에게 증여하는 것과 변방에서 교역하는 것을 모두 토산물로써 하고 중국 물건을 파는 것을 일절 금하여서 뒤폐단을 막고 후환을 끊으면, 중국이 우리 나라의 기미책을 듣고 그 부득이한 사세를 알아서 혹 용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 나라가 중국 물건을 가지고 오랑캐와 호시한다는 것을 들으면 반드시 대노하여 절교할 것입니다. 불행히도 지난번 모 도독(毛都督)이 무고했던 말과 일치하니, 신은 조정이 무슨 말로 변명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설령 중국이 너그러워서 책망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부모의 나라에서 가져다가 원수인 오랑캐에게 주는 것이 의리에 비춰볼 때 어떠합니까. 지금 많은 사람들이 흉적은 가까워서 그 세력이 두렵고 중국은 관대하여 우리를 책망하지 않는다고 합니다만,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은 자식이 아비를 섬기는 것과 같은 것인데, 어찌 부모의 자애를 믿고 공경하기를 태만히 하며, 도적의 침략만을 두려워하여 대의를 돌아보지 않겠습니까.

인조실록 17권, 인조 5년 12월 25일 戊午 4번째기사

김상헌이 후금과 교역할 때 우리 나라 물건은 팔아도 중국에서 수입한 물건을 팔아서는 안 된다는 얘기를 하면서 명나라에 대한 '두려움'을 내비치고 있으니 척화론이 단순히 명분론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러나 이 글은 명나라가 취할 수 있는 보복 행위를 구체적으로 지적하기보다는 그저 막연히 배척[斥絶]을 우려하는 정도다. 실리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게다가 김상헌이 중국 물건으로 교역하지 말라는 결정적인 근거는 '대국의 질책' 같은 것이 아니라 '천조(天朝)', '부모지국(父母之國)'을 바르게 섬기는 '대의(大義)'였다. 중국이 뭐라 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당연히 안 하는 게 신하 나라로서의 도리란 거다.

'실리주의적인 척화론' 비스무레한 것은 역설적으로 척화론이 초래한 병자호란으로 조선이 초토화된 다음에 나온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위로는 지존이 오랑캐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아래로는 60만이 넘는 백성들이 청의 포로로 끌려가는 되는 참화를 입게 되자, 비난의 화살이 전쟁 불사론을 펼치며 외적을 불러들인 척화파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 병조판서 신경진(申景禛)이 일찍이 정사하는 자리에서 노하여 문관들을 질책하기를, “쥐새끼 같은 무리들이 나라 일을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도록 하였다.” 하였고, 참찬 정기업(鄭基業)이 그 말을 찬양하여 자못 기세가 당당하였다. 좌랑 남노성(南老星)이 나가서 처자를 찾다가 붙들려 그날 저녁에 진작 들어오지 못하니, 기광(基廣)이 노성을 끌어내었다. 대개 기광은 오랫동안 사류(士類)들에게 배척당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무장(武將)에게 붙어 거칠고 패려함이 이와 같았다. 구굉(具宏)이 팔뚝을 걷어 붙이고 큰 소리치기를, “윤황(尹煌)이 늘 말하기를, ‘오랑캐가 만일 들어오면 나의 여덟 아들을 이끌고 나가서라도 쳐서 물리치겠다.’ 하였는데, 여덟 아들이 어디 있는가. 화친을 배척하기를 주창하여 이 지경에 이르도록 하였으니, 만일 윤황을 베지 않으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하였다. 크고 작은 무인들이 성을 지킨 공은 무장들이 이룬 것이고 오늘 성을 나온 것은 중흥과 같은 것이라 하면서 교만 방자하여 문사들을 노예와 같이 보니 사람들이 모두 하루도 보전하지 못할 것처럼 두려워하였다.

연려실기술 제25권 / 병자노란(丙子虜亂)과 정축 남한출성(南漢出城)

그러니 척화파로서는 싸우자고 하다가 진짜로 싸움이 벌어졌고 그 싸움에서 형편없이 지고 말았지만, 대청 강경책 자체는 할 만했다는 식으로 자기방어 논리를 만들어 내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병자호란 당시 조선의 집권 세력은 실질적인 이득을 얻으려는 목적에서 친명-반청 정책을 입안하기는 커녕, 대외 확장 정책을 펴고 있는 이웃 나라에 대해 적대하는 태도를 보인 정권으로서는 필수적인, 철저한 전쟁 준비조차 내팽개친 자들이었다.

사실 조선의 지배층이 실용적인 판단에 입각해서 대외 정책을 펴 나가고 위기에 임박해서는 실질적인 대비책을 세웠으리라는 것이야말로 '전형적인 현대인의 시각'이다. 전근대인 특히 조선 중기 집권 사림 세력들의 정부 운영 기조는 그러한 합리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적어도 외교에 있어서는 그랬다.

인조를 부정적으로 평가한 한명기 교수는 아래와 같이 평가했다.
김상헌의 척화론은 백성이나 조선의 임금보다는 명을 염두에 둔 것이다.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도와준 것 등 명에 대한 은혜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조선이 망하는 것도 불가피하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다. 영화가 묘사한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한명기(명지대 사학과)

한 척화신의 억설로 마무리한다. 영화가 당시 조정을 '무의미한 명분론에 사로잡힌 무능한 자들' 정도로 묘사하는 것이 과연 안타까워 할 일일까?
김수현이 말했다. "낮은 백성들이 도륙을 당할지언정 주상께서 어떻게 성을 나가실 수 있겠습니까?"


壽賢曰, 下民雖爲魚肉, 自上豈可出城?

승정원일기 55책 (탈초본 3책) 인조 15년 1월 26일 병인 16/21 기사

[1] 바지는 벗기지 않고 중곤 20대.[2] 굳이 김자점을 위해 변호를 해보자면, 미원에 모인 병력은 머리수만 많을 뿐 오합지졸에 불과했기 때문에 전투를 피할 수밖에 없었을 거라는 점이다. 당시 조선군의 정예는 중앙군과 관서군이었다. 중앙군은 남한산성의 인조를 지켜야 하니, 김자점의 관서군이 청군을 막아야 했는데, 이 군대가 토산 전투에서 타격을 입었고, 애초에 토산 전투 당시에 이끈 병력이 5천이다. 이는 요토, 도도 등이 이끄는 좌익군 선봉대보다 1천명 정도 많은 수준이며 홍타이지의 본군을 상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청군 기병대들이 시차를 두고 계속 교란을 벌이고 있어서 조선군이 지리적 정보에서 앞서더라도 청군의 기동 때문에 쉽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토산에서 일격을 당한 것도 청군의 이런 기동전에 걸려든 게 컸다. 또한 제대로 된 훈련을 받은 전력이 부족하고 미원에서 모은 병력이 일만이 넘더라도 청의 본군에 미치지 못하며, 군량까지 부족했다. 그래서 전투를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토크멘터리 전쟁史 - 184부 동아시아 전쟁사 남한산성 수성전I(21분부터)[3] 현재 해당 기사는 문제의 대목이 안보인다. 10월 12일에 수정되었는데 이때 삭제된 듯.[4] 원래 왕은 버선도 붉은색을 신는데 이런 작은 점도 재현하였다. 다른 사극에서는 신을 신으면 나오지 않아서나, 재현에 신경쓰지 않아서 혹은 소품(붉은색 버선) 구하기가 어려워서인지 일반 하얀 버선을 신고 나오는 경우도 많다.[5] 청나라 배경 중국 드라마의 중심은 아무래도 강건성세의 황족과 외척들인데, 이들은 대부분 호적상으로 양황기, 정황기인이기 때문에 갑옷 색깔만으로는 구분하기 어려운 점이 한 몫 했다.[6] "접때 이완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군사 기술은 오로지 화포를 숭상하는데, 싸움터에서 갑자기 바람이나 비를 만나면 화포는 필시 쓸데없게 될 것이니, 활쏘는 기예도 함께 쓰지 않을 수 없다.' 하였는데, 그 말이 참으로 옳다"-효종실록[7] 최종병기 활이 한국 사극 매체에서 청나라 인물들이 만주어를 쓸 수 있게 된 계기를 마련해준 덕을 보았다. 최종병기 활 이후 만주어를 재현한 또 다른 작품으론 똑같이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궁중잔혹사 꽃들의 전쟁》이 있다.[8] 심지어 삼총사가 남한산성보다 먼저 나왔다.[9] 예를 들어 h가 마찰성이 과해 k에 가깝게 들린다든지.[10] 예를 들어 삼배구고두례 장면에서 배(拜)를 niyakvrambi(무릎을 꿇어 절하다)가 아닌 mehumbi(선 채로 허리를 숙여 인사하다)로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11] 지금까지 존재한 한국 사극 중에서 최고의 재현을 자랑한다. 만화는 제작비 신경 안쓰고 그리기만 하면 되잖아!! 남한산성과 칼부림 모두 같은 시대를 다루는 것도 보면 재미있는 요소다.[12] '고'(孤)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긴 한데 문헌상에서 조선 임금이 스스로를 孤라고 지칭한 경우는 없다. 다만 孤자체가 아주 근본없는 어휘는 아니고 중국에서 황제를 모시는 제후들이 스스로를 孤라 칭한 적은 있었다.[13] 다만 대명의 경우 반대로 명나라를 지나치게 선하게 묘사하고 청나라를 지나치게 악하게 묘사해서 문제가 된 바 있다.[14] 실제로도 인조는 무능한 왕이긴 했지만 인성까지 바닥을 치게 된 때는 병자호란이 끝난 후이다. "아비된 도리로 어찌 자식을 사지로 내몰겠는가"라는 논지로 항복하자는 의견을 거부한 것 역시 이 당시에는 진심이었을 것이다. 소현세자에 대한 인조의 불신은 소현세자 내외가 심양에 체류한 뒤, 정확하게는 섭정왕 도르곤에게 간청해 끌려온 조선인들을 일부 풀어달라 한 뒤 그곳 심양에서 농장을 일구며 청 황실로부터 점차 신임을 얻게 된 이후부터다.[15] 능봉수.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의 형 영양군의 증손자로 인조의 8촌 동생.[16] 다만 해당 소설들도 일제강점기에 생겨난 만선사관마냥 대놓고 숭덕제를 찬양하는 정도까지는 아니다.[17] 영화에서 쌍령에 대한 명시적인 언급은 없지만, 근왕군이 서날쇠를 죽이려다 도리어 청군의 기습을 받아 전멸한 모습이 묘사되었다. 실제 쌍령 전투에서 아군 내분이 있었는데 거기서 모티브를 얻은 듯싶다.[18]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6일 丙寅 4번째기사 참조.[19] 다만 원손은 실제로는 청군에 붙잡히지 않았다. 송국택, 민광훈이 원손을 데리고 교동으로 들어감으로써 위기를 모면했다고 한다. 이 사실은 남한산성에 뒤늦게 전해진다.# 물론 그렇다고 전황에 별다른 반전이 생겼으리라 가정하기도 어렵다. 기존 정부와 왕실 거의 전부가 붙잡힌 마당에 갓난아기 하나를 왕으로 모셔놓은 임시정부가 생겨나 봤자 얼마나 더 항거할 수 있었을까?[20] 김류는 정원군 추숭 논의에 반대하다가, 인조의 분노를 사서 관직을 잃고 쫓겨난 전적이 있다. 인조가 강빈 사사를 강행할 적에도, 그는 끝까지 반대했으며, 마침내는 스스로 벼슬을 버리고 조정을 떠나기까지 했다. 인조반정이나 이괄의 난 혹은 병자호란 당시의 행적 때문에 김류를 기회주의자라 비판할 수도 있지만, 김류에게는 (앞서 언급한 예시에서처럼) 임금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는 강직한 면도 있었다. 인조 정권 시기 대부분 김류가 상신으로서 국정을 주도했음을 감안하면, 정치적 역량 또한 평균 수준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의 국력이 저하된 것은 청나라의 과도한 착취가 원인이었고, 김류 실각 이후 집권한 김자점 역시 청에 편승하여 부정부패를 저지르며 나라를 거덜냈지만, 그 이전까지의 조선은 이괄의 난이나 정묘호란 등의 전쟁을 겪고도 (군사적인 부분을 제외하면) 비교적 건재했기 때문이다.[요약] 후금(=청)은 기마민족이라 곡식이나 병장기를 많이 보유하고 있지 않으니, 오랫동안 버티면 자기들이 지쳐 물러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 조선이 좀 많이 두드려 맞아야 하는데 그냥 두드려 맞으라고 백성들에게 이야기할 순 없다. 그러니 명분으로 명과의 의리를 내세우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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