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대
마한의 거수국인 고랍국으로 적어도 근초고왕 이후엔 백제의 간접 지배 아래 있었으나, 475년의 한성 공함을 전후해선 가야 반파국(대가야)의 영역이 된다. 아영면의 월산리 고분군과 두락리 고분군에서 고령 양식의 가야토기 등 대가야의 특징적 유물이 대량으로 조사되었고 특히 두락리 1호분에서는 전형적인 대가야식 묘제가 나타나 가야의 호남 진출이 고고학적으로 증명이 되었다. 일단 반파국의 영향권 안에는 들었지만 간접지배였고 어느 정도 자율성이 있었기 때문에 이 시대 남원 두락리 고분군 등을 조성하던 정치체의 이름을 '기문국'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그런데 기문이라는 이름이 일본 기록에만 나온다고 이덕일이 주장했고 남원시 시민단체들도 이 이름으로 세계유산 등재를 반대했다. 그러나 일본서기뿐 아니라 중국 기록인 양직공도와 기문국 문서에 나오는 당나라 백과사전, 우륵 관련 기록에도 나온다. 즉 일단 일본 기록을 전면 배제한다고 쳐도 이 이름을 사용해도 문제가 없다.[1] 2023년 결국 가야고분군으로 등재돼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 됐다.
이후 512년에 백제 무령왕이 반파국으로부터 잠시 수복했으나 516년도에 반파국에게 다시 빼앗겼고, 이후 520년대 초반기에 두 번째로 되찾은 후 관산성 전투 전까진 백제의 직접 지배령이 된다. 그러나 관산성 전투 이후 이성을 잃은 위덕왕이 무모한 복수전을 벌이다 연거푸 패배해서 병력을 너무 많이 잃은 나머지 560년대 중반 어느 시점에서 이번에는 진흥왕이 다스리는 신라로 넘어가게 된다. 그 후로는 무왕이 즉위하기 전까진 계속 신라령으로 있다가 무왕 즉위 초반기인 600년대 초반에 백제가 다시 공격을 시작하게 되는데, 처음에는 백제의 신라에 대한 공세가 시원치 않아 이때는 결국 패배하며 수복에 실패한다. 그러나 무왕의 꾸준한 대신라전의 저울추가 610년대 중반 이후에야 백제쪽으로 기울면서 결국 616년에 세번째로 남원을 되찾게 되며, 이후 백제가 660년에 망하기 전까진 백제령으로 있게 된다.[2]
삼국시대 백제 고룡군(古龍郡)이었는데,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때는 지금으로 치면 광역시에 해당하는 5소경 가운데 하나인 남원소경이 되었다(이후 남원경). 지금의 호남 지역에서는 유일한 5소경이었고, 서원경(청주시)과 함께 옛 백제 영토의 양대 도시였다. 고구려를 부흥시키려던 보덕국의 유민들을 사민해서 만들었다. 원래는 백제 멸망 뒤 백제부흥운동이 있던 곳으로 이를 견제하기 위해 오히려 정책적으로 이주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이 덕분에 고구려의 거문고를 전수받은 옥보고가 많은 명곡을 남겼다. 또한 고구려 고승들이 많이 이주했는지 그 영향을 받아 이후 남원 지역에선 고승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한다.
삼국시대 때는 소속된 국가가 마한-백제-반파국(약 30년)-백제(4년)-반파국(약 5년)-백제(약 45년)-신라(약 50년)-백제(44년)-신라 순으로 정말 정신 없는 흐름이었으나, 후삼국시대 때는 후백제군이 충북-경북을 헤집고 다니던 때라서 삼국 시대 때와는 달리 일종의 후방지대가 되었고, 전쟁을 겪을 일이 거의 없이 주욱 후백제령으로 남았다.
2. 고려
고려 시대 말기에는 진포대첩을 통해 퇴로를 차단당한 왜구들이 한반도 남부 내륙을 유린하다 남원에까지 이르게 되어 교룡산성을 공격했다가 실패하기도 하였다. 그후 인월역에 주둔한 왜구를 이성계가 지금의 남원 운봉읍에서 격파한 황산대첩이 일어났다.3. 조선
조선 태종 때 남원도호부로 1부 1군 9현(담양·곡성·창평·구례·순창·임실·무주·진안·장수 등)을 관할하였다. 정유재란 때 남원 전투로 남원이 함락당하자 세자와 중전이 파천했으며 충청, 전라가 모두 동요하였다고 한다. 이후 직산 전투까지 일본군이 우세를 이었다.1895년 23부제 개편 때 전라도를 전주부, 남원부, 나주부로 나눌 만큼 규모가 크고 지역의 중심도시였다. 이 덕분인지 1894년 동학농민전쟁 당시에는 농민군 최고 강성장군 중의 하나였던 김개남과 그의 부대에게 무력으로 장악당한다. 당시 남원부의 관할은 전북 동부는 물론 전남 동부 대부분과 심지어 현재 광주광역시 일부까지 포함했을 정도. 1906년에는 지사면, 둔덕면, 오지면, 석현면이 임실군으로 편입되고 산서면, 번암면이 장수군으로 편입되고 고달면이 구례군으로 각각 편입되었다.
4. 일제강점기
1914년 운봉군을 흡수했다. 1931년 11월 1일에 남원면이 남원읍으로 승격하였고, 1935년 3월 1일에 금성리를 대강면으로 이관하고 주천면 노암리를 남원읍에 편입했다.5. 대한민국
1981년부터 1995년 도농통합 전까지 사용된 1기 로고.
남원군 일원에서만 사용된 로고. 알다시피 이 곳의 명산인 지리산을 모티브로 했다.
1995년 도농통합 후부터 2000년경까지 사용된 2기 로고.
1956년 왕치면이 남원읍에 흡수되었다. 1981년 남원읍이 남원시로 승격했다. 1995년 도농통합으로 남원시와 남원군이 남원시로 통합했으며 운봉면이 운봉읍으로 승격되었다. 1998년 동면이 인월면으로 개칭되었다.
[1] 근데 양직공도 등의 존재는 쏙 빠지고 보통 기문국이 일본 기록에만 나오는 명칭이라고 잘못 알려져 있는 편이다. 왜인 한반도 남부 지배설 관련한 논쟁으로 가기도 한다.[2] 그 시기에 지금도 남원과 관계가 긴밀한 장수, 함양, 구례, 하동 등이 모두 무왕이 다스리던 백제의 판도에 들어온 것도 예사롭지 않은 부분이다. 5세기 후반 당시 반파국의 연합이 이 지역들을 하나로 아우르면서 경제, 정치, 군사적으로 한묶음으로 엮였었는데, 그 인연이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