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ff8000><colcolor=#ffffff> 김학용 Kim Hak-yong | |
출생 | 1935년 12월 7일 |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 | |
사망 | 2007년 2월 25일 (향년 71세) |
서울특별시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본관 | 의성 김씨 |
가족 | 부인 황정숙 슬하 2남 4녀 |
신체 | 178cm | 110kg (현역 시절) |
감독 경력 | 1986 일양약품 씨름단 감독 1995 진로 씨름단 감독 1999~2000 삼익파이낸스 씨름단 감독, 단장 |
수상 | 전국씨름선수권대회 우승 |
이명 | 백두대호 |
[clearfix]
1. 개요
"저번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은 여러가지 주문을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에는 선수가 힘을 낼 수 있는, 선수들에게 사기를 북돋는 그런 얘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 경기때마다 선수들에게 어떤 지시를 내리냐는 기자의 질문에 한 답변# -
- 경기때마다 선수들에게 어떤 지시를 내리냐는 기자의 질문에 한 답변# -
대한민국의 씨름 선수이자 감독이다.
2. 생애
1935년에 태어났다.어릴때부터 강골에 힘이 장사였는데 중학교때 한 포대당 80kg가 나가는 가마 두 개를 들어올렸다고 한다. 이 힘으로 씨름계에 입문해 전국씨름 선수권 대회에서 3연패를 기록하는 등 50~60년대를 풍미했던 씨름꾼으로 지냈다.
여기서 왼쪽에 소를 건네는 사람은, 정치깡패로 유명한 이정재다.[1] 13회 전국씨름선수권 대회 당시 이정재가 대한씨름협회의 회장이었다. 실제로 이정재는 정치깡패가 되기 이전부터 씨름꾼으로 전국에서 이름을 날리던 사람이었다.
1980년대부터 씨름 감독으로서 여러 스타들을 키워냈다. 일양약품 감독 재직 시절 이준희, 강호동 등 스타플레이어를 키워내고 팀을 명문팀의 반열에 올렸다.
자신이 나고 자란 경산시 자인면의 자인중학교, 자인고등학교에 씨름부를 만드는 등[2] 교육에도 힘썼고, 당뇨와 췌장암으로 사망하기 직전까지도 한국 씨름의 부활을 걱정하고 늘 후배들에게 당부했다고 한다.
2007년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3. 외모
씨름계의 원로인 사람이었던 만큼 60년대~90년대에도 아는 사람이 많았지만 세상을 뜬지 10년 이상 지난 2020년대부터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기 시작했는데 보다시피 마동석 같은 웬만큼 무섭게 생겼다는 얼굴의 사람도 압도하는 카리스마 있는 외모 때문이다.[3] 외모만으로 급속도로 유명세를 탔다는 것부터가 그 포스를 느낄 수 있다.
풍채도 풍채지만 백두대호(백두산큰호랑이)에 걸맞은 호랑이 관상에 가장 부합한다는 평이 많다. 강호동의 무시무시했던 학창시절 사진들을 보고 '저런 강호동을 누가 컨트롤 했을까?'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감독의 외모를 보고 바로 납득했다고 한다.
무서움을 빼고 젊은 시절의 모습을 보면 알겠지만 상당한 미남이기도 했다. 사실 위의 늙은 후 모습도 남자답게 잘생기긴 했다. 뼈대도 굵어 여러모로 남자의 로망를 자극하는 모습인 듯 하다.
단순히 무섭게 생긴 얼굴이 아니라 천하장사였던 만큼 힘도 엄청났는데 환갑에 가까운 나이에 힘든 기색도 없이 실실 웃으면서 130kg가 넘는 강호동을 번쩍 들어올려 내치는 움짤이 유명해져서 '강호동이 전성기에도 찍소리도 못 했던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4. 강호동과의 관계
김학용 감독의 회고에 의하면 어떤 소년 하나가 있어서 찾아갔는데, 자기 집 마루에서 혼자 밥을 먹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아이가 국자만한 숟가락으로 밥을 먹고 있어서 김학용은 "쟤는 반드시 대성한다!" 라고 생각한 뒤 데려가서 씨름을 가르쳤다고 하는데 그 국자같은 숟가락으로 밥을 퍼먹고 있던 소년이 강호동이었다. (아는 형님에서 서장훈이 증언한 내용이다.)사실, 김학용 감독은 강호동의 스승일뿐만 아니라 사실상 인생을 바꿔준 은사나 다름없는 사람이다. 마이크 타이슨도 그가 은사이자 양아버지로 여겼던 커스 다마토의 죽음 이후부터 올바른 길로 인도해주면서 인성을 지도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어져서 그동안 벌어놓은 돈을 탕진하고 방황하다가 범죄에 가까운 행동까지 저지르고 다녔는데, 만약에 김학용 감독이 미성숙한 강호동을 씨름 선수로 이끌어주지 않았다면 나쁜 길로 빠졌을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 그래서 그런지, 강호동의 부모님도 아들에게 씨름을 시키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당시의 운동부는 선후배간에 군기잡는 것도 심해서 살벌한 폭력은 기본이었고, 선배들이나 교사들에게 어느 정도 맞고다닐 것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파악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부모님이 반대하지 않았다는 것은 더더욱 대단한 일이다.
실제로, 강호동 본인도 "어린 시절에 씨름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부모님의 권유로 반쯤 마지못해서 시작했다" 라고 이야기를 했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 씨름을 하지 않았다면 나쁜 길로 빠졌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스스로 인식하고 있었는지, "나는 어린 시절에 꿈이 없었다.", "나는 씨름을 안 했으면 (조직폭력배가 되어서) 우리 동네를 지키고 있었겠죠." 라고 농담조로 이야기를 한 적도 있었다. 지금도 세상을 떠난 김학용 감독에게 "아버지 같으신 분이다" 라고 회상하였다.
5. 기타
- 이만기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강호동과 경기중 김학용이 이만기의 페이스를 무너뜨리게 도발을 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 혈기왕성했던 나이의 강호동도 질릴 정도로 훈련이 엄청 고됐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강호동과 동료 씨름꾼들이 훈련중 몰래 도망쳤다가, 나중에 김학용 감독에게 엄청나게 혼난 적도 있다. 이 일화는 강호동/씨름 항목에 가면 자세히 볼 수 있다.
- 이만기와 강호동의 또 다른 스승으로 알려진 황경수[4] 전 감독과도 인연이 깊다. 김학용의 띠동갑 후배였던 황경수는 지도자로서 라이벌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0년 이만기와 강호동 사이의 신경전 직전에도 김학용 일양약품 감독과 황경수 현대 감독이 먼저 신경전을 벌였다. 두 사람의 관계를 잘 알고 있는 제자 이준희는 "두 분 다 다혈질이라서 저렇게 만나기만 하면 서로 으르렁댔다"고 회상했다.
- 젊은 시절의 얼굴은 고수와 꽤 닮았다.
외모나 강함이나 현실판 북두의 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