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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5 02:02:48

강호동/씨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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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1989년 이전3. 1989년4. 1990년5. 1991년6. 1992년7. 현역 은퇴8. 은퇴 이후9. 강호동의 시대10. 성적
10.1. 백두장사10.2. 천하장사
11. 여담


파일:씨름선수 강호동.jpg

1. 개요

씨름선수 시절 강호동에 대한 문서.

2. 1989년 이전

마산 산호초등학교[1], 마산중학교[2], 마산상고를 졸업하고 부산조흥금고 호랑이 씨름단에 입단했다.

강호동은 중학생 시절부터 이미 씨름계에서 엄청난 유명인이었다. 씨름 입문 과정의 이야기가 꽤나 흥미로운데 후학을 양성 중이던 황경수 감독이 직접 강호동을 마산중으로 스카우트해 왔다. 이후 강호동은 황경수 감독의 집에서 하숙하며 씨름을 배웠다는데 이때 강호동보다 먼저 황경수 감독 밑에 머물며 씨름을 배웠던 이가 바로 그 이만기였다. 즉 이만기와 강호동은 같은 스승을 두고 수학한 사형과 사제와도 같은 관계였다고 할 수 있겠다.

중학교 입학 후 재능을 꽃피우기 시작한 강호동은 마산중 근처에 있는 마산상업고등학교에 가서 중2밖에 안 된 나이에 고등학교 씨름부 형들과 씨름으로 맞붙어서 깡그리 눕혀버렸다. 심지어는 이 때 치른 엄청난 유명세로 인해 중2 나이로 무려 경남대학교 씨름부 선수들과 씨름으로 맞붙어 박빙의 역량을 보였다. 자신보다 5살 이상 연상의 형들과 비빌만큼 강호동은 어렸을 때부터 씨름 천재였다. 씨름을 어찌나 잘 했는지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프로 선수들 틈바구니에 끼어서 같이 뉴욕으로 전지훈련도 다녀왔다.[3] 그렇게 강호동은 고3이 되던 해, 아마추어 전국 통일장사를 거머쥐며 당대 최고의 슈퍼 루키로서 눈도장을 받게 된다.

3. 1989년


1987년 5월 1일자 동아일보에 이미 씨름 유망주로 소개되었는데, 그때 키가 182cm, 몸무게가 110kg에 달했다고. 데뷔전은 89년 3월 대전 천하장사대회 8강전이었다. 데뷔전 때부터 괴성을 지르며 등장했지만 경기 도중 양선수 모두 상대방의 샅바를 놓치게 되었고, 아직 심판의 중단 신호가 없었음에도 경기가 중단되었다고 생각한 강호동이 방심한 사이 상대인 일양약품 이종식 장사의 기습적인 밧다리에 당해 넘어지면서 데뷔전에서 첫 패를 기록한다.[4] 재미있는 점은 이만기와 붙었을 당시 똑같은 상황이 발생했는데,[5] 이번에는 이만기가 이 규정을 몰랐던 것인지 허점을 보이다가 강호동이 달려들자 뿌리쳤지만 이후 강호동이 이종격투기식으로 테이크다운을 성공시킨다. 훗날 천하장사가 된 후 쟈니윤 쇼에 등장해서 데뷔전 당시 패배에 대해 언급하며 "그때는 엄청 억울했지만 이 패배가 약이 되었다"고 말했다(...).

이때는 고3 시절에 당했던 큰 부상 후유증(교통사고로 왼쪽 다리에 중상을 입었다) 때문에 초반에는 별 활약을 못했지만 점차 부상 후유증에서 회복하고 기량을 찾았다. 그러다가 1989년 5월 일양약품으로 트레이드되면서 일양약품의 간판으로 활동하게 된다.

그리고 데뷔 후 44회 장사씨름대회에서 백두장사로 처음으로 타이틀을 거머쥔다. 특히 준결승전에서 이만기와의 첫 공식전을 치러서 2:0으로 승리를 거두는 파란을 일으켰는데, 첫 경기 때는 강호동이 자체적으로 개발한 기술로,[6] 두 번째 경기 때는 뒤집기로 승리했다.

그러나 9월의 백두장사 대회에서 큰 사고를 치고 마는데, 이봉걸과의 결승전에서 2:2를 이룬 가운데 샅바싸움을 하면서 신경전을 벌이다 심판으로 부터 경고를 받고 다시 신경전 끝에 또 다시 경고를 받아 실격패 하게 된다. 그러나 경고 2번이면 실격이 된다는 사실을 심판이 망각했었는지 바로 경고를 주의로 바꾸었으나 강호동은 심판에게 욕을 하고 그대로 퇴장해버려서 결국 기권패 하게 되었다. 씨름판을 찾은 관객과 TV로 경기를 지켜보던 시청자들은 전례없던 돌발상황에 어안이 벙벙했던 것은 당연지사. 한편 이 사건에 대해 이만기의 소속구단인 현대씨름단은, 강호동의 패배를 실격패로 해석하여 천하장사 대회의 출전자격이 없음을 주장하면서 선수단을 철수시키는 등 경기진행에 차질이 빚어지기도 했었다.

4. 1990년


일양약품에 입단하여 100%의 몸상태로 맞은 1990년은 이미 김학용 일양약품 씨름단 감독이 "1990년은 이만기 vs 강호동의 해가 될 것"이라고 정의할 만큼 씨름판에서 강호동이 최강자로 자리매김한 시즌이다.

1990년 3월 성남에서 열린 18회 천하장사대회에서 씨름판의 슈퍼스타이자 마산상고 대선배 이만기와 처음으로 천하장사 대회에서 맞붙었고,[7] 그 전날 백두장사 결승에서 승리하고 준결승에서 또 다시 승리하면서 대선배 이만기에게 모래를 뿌렸던 전설의 세레모니로 전국구 스타가 되었다.[8] 그리고 90년 씨름판은 3번의 천하장사대회를 싹쓸이하면서 본좌로 등극[9]했다. 백두장사는 2회 등극했다.

5. 1991년

1991년에는 황대웅 장사와 김칠규 장사와 함께 민속 씨름을 3분했었다. 천하장사는 황대웅이 많이 차지했지만 강호동은 23회 천하장사에 등극했고, 백두장사는 54~57회 4연패를 달성했다. 그래서 91년 종합 승률에서도 당당히 1위였다.

6. 1992년

1992년 3월 24회 천하장사 씨름대회 결승에서 박광덕[10]과 만나서 3:2로 이기면서 통산 5번째 천하장사 타이틀을 획득하며 역대 천하장사 등극 순위 2위 자리를 굳혔다. 그러나 이 다음 대회인 63회 체급별 장사씨름대회가 끝난 뒤 소속팀 일양약품을 무단이탈한 뒤 잠적했다.

7. 현역 은퇴

그러던 중 갑자기 1992년 5월 "신인들의 체격과 힘을 감당하기 힘들다. 부상 문제로 선수 생활을 끝낸다"라는 여러모로 이해하기 어려운 은퇴 소감을 발표를 한 후 모래판을 떠났다. 강호동의 당시 은퇴 사유가 석연찮았던 것은 은퇴를 선언할 당시 강호동의 나이가 23세에 불과했고 강호동의 민첩한 몸 기술은 다른 선수들에 비해 밀릴 수 있는 체격과 힘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경지에 있었기 때문이다.

훗날 강호동이 모래판을 떠난 진짜 이유가 등장하는데 2011년 KBS가 제작한 2부작 씨름 다큐멘터리 '천하장사 만만세'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당시 강호동이 씨름에 대한 부담감이 커지면서 선수 생활에 대한 회피가 심각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 사실은 민속씨름대회에서 고정적으로 출연하던 전통음악 무용단장이자 강호동과도 친분이 두터웠던 '김중자 무용단'의 김중자 씨가 직접 말한 것이다. 실제로 이 시기부터 백두급 장사들의 평체가 급격히 상승했기 때문에, 최적 체중이 110kg대인데다 고질적 다리부상등 여러 문제로 120kg 이상 증량하기 어려웠던 강호동에게는 자기보다 10~20kg이상 무거워진 백두급 선수들과의 정면대결에 한계가 있었음이 분명하다.[11]

다만, 이때 반항아라고만 부르기에는 지나친 행동도 있었는데 "내가 이만기 선배보다 못한게 뭐냐"라는 말을 시작으로 이만기의 연봉 6천만원[12]보다 무조건 더 받겠다는 선언과 함께 팀을 이탈해 연봉협상을 벌이던 도중 도중에 갑자기 마산으로 내려가는 땡깡을 부린 적이 있다. 작은 회사인 일양약품이 감당하기엔 애초에 너무 커버린 거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8. 은퇴 이후

은퇴 직후 곧바로 지도자 연수를 떠나면서 이만기와 마찬가지로 지도자로 씨름계에 돌아올 것이라는 예측이 많았지만, 이경규의 추천으로 이듬 해인 1993년 MBC 특채 개그맨으로 연예계에 데뷔했다. 당시만 해도 운동선수 출신이 전업 예능인으로 직업을 바꾸는 사례가 없었기 때문에 이는 대중들에게 엄청난 화제를 불러일으켰으며, 심지어 씨름계에서는 강호동이 씨름을 희화화 거리로 만들었다며 아니꼽게 보는 시선도 많았다고 한다.

강호동은 씨름선수 시절 쌓아놓은 인지도를 바탕으로 각종 예능에 출연하며 기대 이상의 활약을 하였고, 그대로 연예계에 안착하며 씨름계를 완전히 떠났다. 즉 선수 은퇴가 곧 씨름계에서의 퇴장이 되어버린 셈. 훗날 이만기와 최홍만이 예능에 진출해 활발히 활동하긴 했지만, 본업은 씨름/이종격투기에 두면서 예능을 부업처럼 생각했던 둘과 달리 강호동은 아예 연예인으로 직업을 바꿨다. 어느덧 씨름 선수로서의 경력보다 연예인으로서의 경력이 더욱 길다보니, 1990년대 이후에 태어난 세대들은 강호동을 예능인으로 더 친숙하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연예계에 입문한 뒤에는 씨름계에서 코치/감독은 고사하고 해설위원이나 협회에서 주는 명예직조차 맡은 적이 없다. 씨름선수로서 분명 어마어마한 커리어를 가졌음에도 연예계에서의 활동이 워낙 성공적이어서 다시 씨름계와 관계를 가지기 어려운 상태여서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강호동은 여전히 씨름 선수로서의 자부심이 매우 강하며, 예능에서 씨름을 주제로 몇 차례 나오기도 했었다.[13]

9. 강호동의 시대

90년 3월 천하장사로 등극하면서 당시 최연소 천하장사(훗날 백승일에 의해 경신됐다.), 최단기간 5회 천하장사(이만기가 7년에 걸쳐 10회의 천하장사 타이틀을 보유했는데, 강호동은 불과 3년에 5회의 천하장사 타이틀을 보유했다.), 당시 현역 선수 중 승률 1위였으며, 통산 전적은 141전 109승 32패(승률 77.3%)를 기록했다.

강호동이 현역으로 활동하던 당시 백두급 주력 선수들은 이만기 시대와 달리 신장 180cm 체중 100kg 전후급에서 점차 올라가 신장 180cm중반, 몸무게 120kg 내외였는데, 강호동은 초창기에 이미 체급이 182cm 체중 120kg을 상회했고, 이후 증량을 해 가장 무거웠던 박광덕과의 천하장사 대결에서 몸무게가 134kg나 나갔다. 강호동은 당시 백두급에서도 체중과 힘이 상위권이었지만 그 이상으로 스피드와 경기운영능력이 극강이었다. 그야말로 완전체다. 강호동이 완벽한 기술 씨름꾼이었던 이만기와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당대 최고의 스피드와 힘을 조합한 기술 씨름을 해냈던 유일한 백두급 선수였고 2년뒤 등장한 백승일[14]과 더불어 마지막 백두급 테크니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1991년 160kg의 박광덕(당시 럭키증권)이 입단하여 22회 천하장사 결승전까지 올라가는 임팩트를 남기고, 그 다음해 '슈퍼두꺼비' 김정필이 입단하면서 백두급 장사들의 평균체중이 급상승하기 시작했다. 이때 최전성기였던 강호동은 변화하는 백두급 장사들의 사이즈에 고전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자신보다 30kg 가까이 더 무거웠던 박광덕을 92년에 결승에서 이기고 천하장사에 오른적도 있다.

거구들의 시대에 강호동이 얼마나 위력적이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1. 기존 스타일 그대로 그만큼의 지배력은 발휘하지 못했을 것, 2. 그럼에도 굉장한 위력을 보이긴 했을 것만큼은 분명하다. # 당시 박광덕과의 결승전을 보면 이 점이 명확한데, 강호동은 그 무거운 박광덕을 상대로 들배지기에 성공하며 첫판을 따내고, 뒤이어 잡채기를 성공하면서 2대0으로 앞선다. 그러나 나머지 두 판에서는 박광덕의 덩치를 감당하지 못하고 연이어 넘어가고 만다. 실제로 세 번째 판과 네 번째 판 모두 강호동의 기술이 제대로 먹혀들어갔음에도 박광덕이 힘과 체격으로 버텨낸 다음에 이후 역습을 당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강호동의 덩치가 육안으로도 차이가 날 만큼 훨씬 작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균형을 잃으면 황소처럼 덤벼드는 박광덕의 역습을 당해내기 힘들었던 것이다. 강호동 특유의 들배지기가 성공한 첫 번째 판에서도 기존처럼 화끈하게 제압하는 것이 아니라 겨우 넘어뜨리는 수준이다. 강호동은 위에 언급됐다시피 기술과 피지컬 모두가 만렙인 선수라 단기간에 그야말로 폭발적인 성적을 기록했지만 기존의 스타일로는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피지컬을 넘는 선수에게는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경기에서 보듯이 기술이 제대로 안 먹혀도 경기를 끌어나갈 수 있는 기술, 스피드와 거구들에게도 전혀 밀리지 않는 힘이 있었기에 상성으로 밀리는 박광덕도 제압할 수 있었다. 일부 폄훼하는 사람들의 주장과 다르게 그 당시 전성기의 강호동은 촉망받는 신인들을 제압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전까지 120kg대 체급으로 활동하던 시기보다 훨씬 힘겹게 제압해야 했던 것이 사실이고, 그 추세대로라면 그 괴물같던 파괴력을 이어갈 순 없었을 것이다. 상술한 134kg도 증량한 것이라 이전보다 부상위험도 올라간 상태였을 것이고. 그러나 그가 당시 23살로 아직 젊었고, 기술 면에서도 만렙이라 머리 회전이 굉장히 빨랐던 선수인 만큼 새로운 시절에 적응해 스타일을 바꿨다면 얼마나 그의 시대가 이어졌을지는 말 그대로 미지수다.

하지만 가난했던 소속팀 일양약품과의 연봉협상 갈등이 폭발하면서 강호동은 사실상 씨름을 그만두고 연예계 전업을 선언했다.

10. 성적

10.1. 백두장사

우승 7번, 준우승 5번

임용제 백두장사 김정필 1품 준우승 나머지 순위 이민우 황대웅 박광덕 김칠규 강호동 남동하

강호동 6품(7위)기록하며 사실상 은퇴경기 대회

10.2. 천하장사

9번 출전하여 우승 5번

11. 여담

선수시절 이미지 및 움짤 보기(데이터 광탈 주의)

유명한 얘기지만 현역시절 온갖 괴상한 표정과 포즈와 함께 괴성을 지르고, 윙크를 하고, 경기 전에 덤블링을 하는 등 쇼맨쉽으로 유명했다. 훗날 1박 2일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이는 내로라하는 선배들에게 기죽지 않기 위한 퍼포먼스였다고 한다.
"시합은 똑같은 위치 아닙니까? 선수 대 선수로서... 선배 대 후배로 시합하는 게 아니고 선수 대 선수로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선후배를 잘 안 따집니다. 시합 때는." - 인터뷰 중에서
그러나 이런 성격이 같은 마산 출신의 대선배이자 씨름황제 이만기를 상대로도 드러났기 때문에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1박 2일 등을 통해 이만기와 강호동이 증언한 내용들을 간추려 보자면, 이만기와 강호동은 당대의 씨름 명사 김학용의 집에서 같이 하숙하며 동문수학했다고 한다. 즉, 무협지로 치면 대사형과 막내사제와도 같은 사이였던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강호동의 행동이 대중들의 눈엔 지나치게 보였던 감도 있다.

결국 이만기가 강호동의 지나친 쇼맨쉽에 짜증을 내는 일까지 생겼다.


당시 강호동은 기습공격[17]으로 이만기를 이기고 난 뒤였는데, 이만기가 슬슬 짜증이 났던지 다음 판 시작 직전에 깝치지 말라고 일갈하자[18] 어리벙벙해진 강호동이 "예...?"라고 대답하고 정색하며[19] 자리에서 일어나 심판에게 "이 새끼, 저 새끼 해도 됩니까?"라고 항의했다. 이후 강호동이 그 다음판도 이기고 난 뒤 평소처럼 환호하려다가 문득 팔을 바로 내리고 이만기에게 공손하게 악수를 청했는데, 그걸 뿌리친다. 아무리 스포츠 경기였고 강호동이 이만기에게 이긴 적도 있었지만 당시가 현재보다 더 서열문화에 엄격했던 시대였음을 상기해보면 악수를 거부한 이만기도 선배로서 보기 좋은 모습을 보였다고 할 수 없다.[20] 물론 강호동의 도발 행동이 원인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21]

두 선수 모두 불같은 승부욕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생긴 해프닝이고, 은퇴 이후 두 사람 모두 성격이 유해지면서 지금은 서로에 대한 존중을[22] 표하는 상태다. 하지만 무릎팍도사에서 이만기가 강호동에게 당한 첫 패배를 기억이 안 난다고 하고, 강호동은 장난스럽지만 은근히 이 점을 강조하는 등 아직도 조금은 신경전을 벌인다. 물론 무릎팍도사는 어디까지나 대본이 있는 프로그램인 만큼 둘 사이의 라이벌리를 강조하기 위한 컨셉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특히 1박 2일에서 두 선수가 20년 만에 벌인 재대결은 현역 선수를 연상케 할 만큼 혈투였던데다 막상 승부가 시작되자 그 강호동이 장난스러운 말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을 정도로 진지하게 시합에 임했다.

강호동이 이만기를 잘 잡아서 한창 명성을 날렸다면 역으로 약한 상대는 대표적으로 이봉걸이 있었다. 2m가 넘는 거구에 140kg대의 체중으로 힘과 기술이 갖춘 이봉걸은 이만기를 대처하는 데 주력했던[23] 강호동에게는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난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봉걸은 강호동이 데뷔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연이은 부상으로 은퇴했기 때문에 씨름계가 정말로 기대했을 '이만기 > 이봉걸> 강호동 > 이만기'라는 형태의 물고 물리는 형태의 구도는 얼마 지속되지 못했다.

상대전적

강호동 vs 이만기 4승 2패
강호동 vs 이봉걸 0승 4패
이만기 vs 이봉걸 21승 10패

백두급 평균체중이 120kg대로 상향 조정된 이후에도 명백히 테크니션이었던 강호동은 박광덕, 김정필등 150kg 이상 중량급 선수들이 등장하는 그 시기에 씨름 외적인 이유로 조기은퇴한다. 이 때문에 강호동이 은퇴하지 않고 박광덕, 김정필, 이후 백승일, 신봉민, 이태현, 김경수 등 140kg을 넘는 장사들이 줄줄이 등장했던 92년 이후에 얼마나 롱런할 수 있었을지도 떡밥거리 중 하나이다.[24]

결과적으로 이만기, 강호동 이후 강호동을 이을 씨름스타의 명맥이 끊겼고, 점점 사양세와 내분으로 멸망한 씨름계에 강호동의 빈자리가 얼마나 컸는지는 씨름계를 지켰던 이만기를 포함해서 수많은 씨름인들이 안타까워하는 일이다.

( 힘만 믿는 씨름 이제 그만" 1991.06.01. 동아일보 15면 스포츠 기사(뉴스)“힘만 믿는 씨름 이제 그만” 멋진기술 사라져 관중 외면 초창기 30%수준 전문가들 샅바규정등 경기방식 개선촉구 한때 절정의 인기를 누렸던 씨름이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다. 출범초기만 해도 체육관이터져나갈...) 91년 당시에도 씨름의 인기는 하락세였다.

1박 2일 외연도 편에서는 김C와 술자리 콩트를 하다가 선수 시절의 경험담을 말했는데, 샅바를 매지 않고 경기장에 들어간 적도 있었고, 천하장사가 걸린 마지막 한 판에서 갑자기 배탈이 나는 바람에 경기를 포기한 적도 있다고 한다. 27분 20초부터.[25] 유재석은 강호동이 이런 일화를 쿵쿵따에서 얘기하자 경상도 사투리로 "쌌으면 이깄을텐데~" 라고 농담을 하는 바람에 강호동의 부아를 돋궜다(...).

사실, 강호동은 씨름을 하고 싶어서 한 것은 아니었고 그냥 부모님이 해 보라고 해서 했다고 한다. 그래서, 씨름보다 먼저 태권도를 하기도 했다. 황정민이 무릎팍도사에 출연했을 때 "꿈이란 게 없는 건 말도 안 된다. 꿈을 만들어서라도 가져야 한다." 라고 하자 강호동은 "난 학생이었을 때 꿈이 없었다" 라며 아리송해하는 모습을 보였다.[26] 그리고, 실제로 강호동 본인도 어린 시절에 씨름을 하지 않았다면 나쁜 길로 빠졌을 수도 있었다는 것을 스스로 인식했는지, "나는 어린 시절에 꿈이 없었다.", "나는 씨름을 안 했으면 (조직폭력배가 되어서) 우리 동네를 지키고 있었겠죠" 라고 농담조로 이야기를 한 적도 있었다.

학생이었을 때 받았던 씨름 훈련이 어지간히도 힘들었는지, 이에 관해 얘기할 때면 항상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그냥 학교에 가서 하루도 안 빠지고 운동하고 먹고, 잠깐 쉬었다 또 훈련(...)을 하고, 집에 가서는 그냥 잠들었다고 한다. 늘 예능에 나와서 하루도 안빠지고를 강조한다. 이때 유재석이 "그럼 일요일도 안쉬냐?" 고 묻자 "아.. 일요일은 쉬어요..." 라고 맥빠지는 개그를 시전하기도...

해피투게더 책가방토크에서 밝힌 일화인데, 한번은 훈련이 너무 힘들고 지긋지긋해서 씨름부가 단체로 부산으로 가출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과거부터 운동부에서는 가혹한 훈련과 살인적인 일과에 지쳐서 일탈을 일삼는 선수가 많았었다. 어찌어찌 갖고 있던 돈으로 민박집에 머물러 있었다. 민박집 주변이 그냥 조용하다는 자체가 너무 좋았고, 괴로운 운동을 안 하니 지나가는 사람들만 봐도 웃음이 실실 나왔다고...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런 일상적인 일조차 행복하다고 여겼을지는 상상에 맡긴다. 방송에서 밝히길, 한 번은 아령으로 트레이닝을 하다가 손을 놔 버리고 발등에 떨궈 버릴까라는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순간 아프겠지만 힘든 트레이닝은 안 해도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고 했으니...

위 일화의 후일담을 마저 얘기하자면, 결국은 감독님에게 있는 곳이 발각되어서 잡혔다고 한다.[27] 당시 끓이고 있던 라면이 다 익어가던 찰나 평소와는 너무 다른 무시무시한 오라가 느껴지는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강호동. 동기 한 명이 조심스레 현관문을 열자... 문 앞에는 김학용 감독이 머리 끝까지 화가 난 채 서 있었다. 그렇게 씨름부원은 단체로 먼지나게 귀싸대기를 맞았다고 한다.

씨름부 대표였던 강호동은 잡히면 진짜 X된다 생각했는지 간신히 안 들키고 홀로 도망을 쳤는데, 도망쳐 숨어들어간 곳이 민박집의 연탄창고였다. 당연히 출구가 있을 리 없으니 임기응변으로 옷을 전부 벗고 연탄을 자신의 몸에 발라서(...) 보호색 작전으로 위기를 모면하려 했지만 당연히 이런 수법에 속아넘어갈 리가 없었고 결국 다 벗은 채로 머리채를 잡힌 상태로 바깥에 끌려나왔다고 한다. 들키기 전 최후의 발악(?)으로 혹여 흰자위가 보일까 눈도 질끈 감고(...) 문이 벌컥 열리자 어두컴컴한 창고 안에서 벽에 밀착해서 숨까지 참았다고 한다. 다시 문이 닫혀 어둠이 드리우자 감독님이 나간 줄 알고 안도의 한숨을 쉬고 눈을 뜨던 찰나... 바로 눈 앞에 감독님이 강호동을 분노에 찬 얼굴로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강호동은 너무 놀란 나머지 그 자리에서 잠시 동안 기절했다고 한다(...). 참고로 그렇게 벌거벗고 나왔을 때 같은 씨름부원뿐만 아니라 자신의 여자친구까지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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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동의 감독인 김학용(씨름)도 꽤 유명하다. 강호동은 세상을 떠난 김학용 감독에게 "아버지 같으신 분이다" 라고 회상하였다.



[1] MBC '기분 좋은 날-연예플러스'에서 찾아가서 생활 기록부를 보여주며 언급된 적도 있고# 달빛프린스 방송에서도 시청자 퀴즈를 위해 나온 초등학생이 마산 산호초등학교를 다닌다고 하자 직접 자신의 후배라고 말하며 반긴 적이 있다. # 강호동은 아버지의 권유로 중2 때부터 씨름을 시작했다고 한다. 2020년 신서유기 시즌8 2회 도중 음악퀴즈에서 부저를 자신의 초등학교 모교를 이야기 하는 것으로 정했는데, 이때 ‘마산 앞바다 산호초보다 아름다운 산호초등학교’라고 부저를 정하며 다시 한 번 모교를 언급했다.[2] 마산동중학교에 다니던 시절 배우 황정민과 같은 반에 있었다고 한다. 황정민은 서울로 올라가 배재중학교에 전학을 갔고 강호동은 마산중학교로 전학을 갔는데 아이러니하게 황정민이 다시 마산으로 내려오면서 마산중학교로 전학을 와서 같이 졸업을 했다. 황정민은 중학교 졸업 후 서울로 유학을 가서 계원예고와 서울예대를 졸업했다. 지금은 서로 존댓말을 쓴다고 한다.[3] 훗날 강호동이 술회하길, 뉴욕의 거대한 전경을 바라보며 세상은 엄청나게 넓은 반면 자기 자신은 너무도 초라한 작은 존재로 느꼈다고 한다. 이 때의 경험이 큰 포부를 품는 계기가 되었던 듯.[4] 이때 기습당하면서 충격이 있었는지 강호동은 코피를 살짝 흘렸고, 그렇게 코피를 흘리면서 패배를 인정할수 없다는 듯 드러누워 땡깡부리는 등 나름 임팩트 있는 데뷔전을 남겼다. 이후 2번째 경기에서도 패배하여 2:0으로 광탈했다. 이 영상은 뒤늦게 아는 형님에도 공개되어 큰 웃음을 주었다.[5] 밑에 나오는 이만기가 짜증을 내는 동영상에 나온다.[6] 2007년 방영된 1박 2일에서 자신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기술이라고 밝혔다. 당시 해설위원도 기술명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참 멋진 기술이었다는 표현만 사용했다.[7] 후술하게 될 이만기와 강호동 사이의 거친 신경전이 이 경기 때 벌어졌다.[8] 이 경기에서 89년 강호동의 첫 데뷔전 때 있었던 일이 재현되는데, 이번에는 샅바를 놓친 사이 방심하고 있던 이만기를 강호동이 기습해서 쓰러뜨리면서 1차전을 가져갔었다.[9] 20살(만19세)에 천하장사로 등극하면서 최연소 천하장사 타이틀을 썼다, 종전기록은 이만기가 기록했던 21살.[10] 럭키증권 씨름단 소속의 160kg의 초중량급 치고는 씨름계에서도 알아주던 실력파 선수였고, 큰 키와 육중한 덩치를 잘 활용한 덕에 천하장사대회 결승에만 5번이나 오르며 위엄을 뽐냈지만 5번 모두 준우승에만 그쳐 만년 우승후보라는 비운의 꼬리표를 가진 선수였다. 별명은 모래판의 람바다였는데 매번 승리 세레모니로 람바다 춤을 춰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씨름판을 떠난 이후 MBC의 강호동에 대항마격으로 KBS에서 영입해 갔지만 성공적으로 코미디언에 안착한 강호동과는 다르게 코미디 쪽에서는 부진을 겪었고 이후 방송인 겸 자영업자로 살고 있다.[11] 이는 강호동의 천적인 이봉걸의 존재만 봐도 알 수 있다.[12] 1992년도 최저임금은 925원이었다. 물론 당시에는 물가 대비 최저임금이 매우 낮아 최저임금을 받는 일은 거의 없었다.[13] 실제로 강호동은 씨름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기존의 예능끼를 쫙 빼고 매우 진지하게 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강호동 뿐 아니라 이만기, 서장훈, 양준혁 등 운동선수출신 예능인들은 본업에 관련된 주제가 나오면 매우 진지하게 돌변하는 경우가 많다. 서장훈은 한 방송에서 “농구로는 웃기고 싶지 않다” 며 솔직한 심정을 고백했을 정도.[14] 등장과 함께 강호동의 최연소 천하장사 기록을 경신하며 센세이션을 일으켰지만 140kg의 체중으로 강호동 스타일의 씨름을 하다가 무릎이 망가지면서 선수생활을 일찍 마감했다. 그리고 은퇴이후엔 트로트 가수로 활동[15] 당연한 얘기지만 키에 따라 맞는 체중이 있으며, 강호동은 최전성기 당시 120kg 정도의 체격이었다. 즉 이 정도 체격이 그에겐 운동능력을 가장 효율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수준인데, 134kg까지 무리해서 벌크업한 것이다. 사실 134kg 시절 강호동의 경기를 보면 몸도 상당히 탄탄하고 운동능력도 크게 떨어지지 않은 모습이긴 하지만, 익숙지 않은 체격으로 경기하다보면 부상위험이 커질 수 밖에 없으며 체력적으로도 무리가 온다. 더군다나 이태현이나 거인 장사들에 비해 신장의 열세를 안고 있는 강호동은 최소 140kg 이상으로 벌크업해야 했을 것이다.[16] 무단퇴장으로 인한 기권패[17] 상술했듯이 강호동도 데뷔전에서 3개월 만에 이적해 같은 팀 선배가 된 일양약품 이종식 장사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패배했던 경험이 있다. 자니 윤 쇼에 출연해서 그 때의 패배가 자기에게 약이 되었다고 밝혔다.[18] 영상에서 알 수 있다시피 원래의 정확한 말은 "깝치지 마라 이 새끼야"였다. 이것이 "깝죽거리지 마라"로 알려진 이유는 이후 예능에서 나올 때 방송용 어휘로 순화하느라 자막에서 항상 "깝죽거리지 마라"로 나오고 이만기와 강호동도 이렇게 재연해왔기 때문.[19] 강호동이 크게 당황했을 때(화가 나거나,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나면) 나오는 습관이 혀를 낼름거리는 것인데, 이 때에도 똑같은 습관이 나왔다. 다만, 다른 때와는 다르게 혀를 낼름거린 후 동공이 흔들리고 당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것을 보면 화는 나지만 대선배인만 큼 어찌할 수도 없어 당황한 것으로 보인다. 후술되듯 결승행이 결정된 이후 평상시 환호도 하지 않고 바로 악수부터 청한 것을 보면 본인도 아차싶긴 한 모양이다.[20] 이만기로서는 평상시 안 하던 욕설을 할 만큼 크게 동요된 것으로 보이는데, 까마득한, 원래 알던 후배한테 희한한 방식으로 진 것도 모자라 그 후배가 면전에서 관중들에게 고함을 지르고 있으니 짜증이 난 모양이다. 이 때문인지 두번째 판에서 이만기가 시작 직후 곧바로 무리하게 공격을 하려다가 샅바를 놓치고 바로 역습당해 순식간에 저버리는 의외의 모습이 나온다. 첫번째 판에서 치열하게 수싸움이 일어난 것과 정반대로 이만기답지 않게 체격과 힘에서 앞서는 강호동을 상대로 성급하고 무리하게 공격하다가 허무하게 진 것이다. 후배의 행동에 모욕감을 느껴 냉정을 잃어버린 듯 보인다.[21] 일부에선 이만기가 꼰대 짓을 한 거 아니냐는 의견이 있었지만, 지금의 통념으로 보면 그럴 수 있어도 당시는 90년대였다. 그리고 프로 선수의 세계에서는 엄격한 선후배 관계를 떠나 시합 전후로는 서로 예의를 지키면서 존중해 주는 게 관례이다.[22] 특히 강호동은 가장 존경하는 선배라고 말한다.[23] 물론 강호동이 이만기만 잘 잡았던 것은 아니다. 원래 한라급이었던 이만기는 커리어 내내 자신보다 큰 선수들을 상대하는데 익숙했기에 자신보다 더 큰 이봉걸도 잘 상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강호동은 보기 드물게 당대 최고의 피지컬을 지닌 테크니션이었기 때문에 기술로 압도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둘의 경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강호동은 이만기에 버금가는 스피드와 기술로 이만기가 거는 기술마다 바로 받아칠 수 있는 선수였는데, 강호동이 더 크고 힘이 셌기 때문에 상성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 강호동은 기술도 뛰어나지만 특유의 피지컬을 같이 활용하는 게 강점이었는데, 이봉걸에게는 그 중 하나의 무기가 전혀 통하지 않았으니 고전할 수 밖에 없었다. 이봉걸이 덩치와 힘만 믿고 싸우는 스타일이었다면 강호동이 기술로 커버가 가능했겠지만 이봉걸은 강호동보다도 더 뛰어난 피지컬에 더불어 어느정도의 기술도 갖췄기 때문에 강호동으로써는 엄청난 난적이었다.[24] 박광덕은 부상으로 빨리 사그라들었고, 김정필이 짧게 92~93년 초반을 지배했지만 백승일, 이태현, 신봉민, 김경수 등 쟁쟁한 백두급 장사들의 등장으로 인해 김정필의 시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강호동이 버티고 있었다면 93년 7월 최연소 천하장사에 등극한 백승일을 필두로한 93세대들과 강력한 경쟁구도를 형성했을 것이고, 90~91년 만큼 강호동이 압도적이긴 어려웠겠지만 신예들과의 경쟁으로 씨름의 관심도 그때보단 훨씬 높았을 것이다.[25] 다만, 이는 프로 데뷔 이후의 천하장사 대회는 아니거나, 준결승이나 8강 등 다른 토너먼트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강호동은 천하장사 대회 결승전에서 한 번도 진 적이 없다. 즉, 결승만 올라가면 무패였다는 것이다.[26] 언니네이발관 이석원은 이런 강호동의 말에 극히 공감했다고 한다. 자신도 어렸을 때 꿈이 없었다고 한다. 사실 이 부분은 예능계의 대부인 이경규와도 어느 정도 맞닿아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경규는 코미디언으로서의 길을 걷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예능은 자신의 직업이고, 영화야말로 자신의 꿈이라고 생각한다고 한다.[27] 강호동의 말에 따르면, 당시 본인의 여자친구가 그 감독님한테 밀고를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