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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강률 (2011) | → | 김창훈 (2012~2014.7.23.) | → | 마야 (2014.7.30.~2015.6.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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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훈 金昌勳 | |
출생 | 1985년 10월 3일 ([age(1985-10-03)]세) |
충청남도 대전시 중구 (現 대전광역시 서구)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가장초 - 천안북중 - 북일고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좌언좌타 |
프로 입단 | 2004년 1차 지명 (한화) |
소속팀 | 한화 이글스 (2004~2009) 두산 베어스 (2010~2014) |
지도자 | 상우고등학교 야구부 투수코치 (2020~2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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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천안북일고 시절 고2 때(2002년)까지만 하더라도 전도유망한 좌완 투수였으며 평균 140후반의 위력적인 직구와 정교한 제구력으로 타자들과 승부했다.[1] 2002년에 팀의 전국대회 4관왕[2]의 일원이었다. 2003년 고3이 되자 구속이 줄어드는 현상이 발생, 이상 징후를 감지한 한화 이글스 스카우트 팀에서는 김창훈 대신 세광고 우완 투수 송창식을 1차 지명으로 찍으려 했으나 여러 이유로 김창훈을 1차 지명하게 된다.[3]그리고 받은 계약금은 4억 2천만 원으로 북일고 2년 후배 유원상이 2006년 입단하기 전까지 한화 구단 역사상 신인계약금 최고액수였다.[4][5]
2.2. 한화 이글스 시절
입단 첫 해인 2004년 선발과 불펜을 오가면서 31경기 42⅔이닝 3승 2패 2홀드 평균자책점 7.17을 기록하면서 좋지 못했다.[6] 다만 성적과는 별개로 유독 삼성 라이온즈를 상대로는 잘 했다.2005년 1군 2경기에 등판하고 나서 시망. 이유인 즉슨 140km/h도 못넘는 구속에 부실한 구위를 커버하기 위해 투구폼을 개조했다가 부작용으로 부상을 입게 된 것.
이후 트레이드될 때까지 1군 승격이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2008 시즌에 공익복무를 시작했다. 공익복무 도중 모친상을 당하는 등 이래저래 마음고생도 심했다.
2.3. 두산 베어스 시절
공익근무 복무 중이었던 2009년 11월 이대수를 상대로 두산 베어스에 트레이드됐다. 한화 이글스 팬들은 먹튀가 떠났다는 것에 환호를 했다. 이 때 군 복무 중인 좌완 투수라 해서[7] 윤근영인지 김창훈인지 논란이 있었는데 결국은 김창훈이었다.[8] 이 트레이드는 이대수의 앞길 터 주기라는 트레이드라는 것이 중론. 나중에 한대화 감독이 언급하면서 알려졌다.2010년 시즌이 끝난 후 경쟁에서 살아남으려고 하는지 팔 각도를 낮추며 좌완 언더스로로 전환을 시도하였다. 최적의 투구 폼을 찾기 위해 팔 각도가 사이드암과 언더스로 사이를 왔다갔다하고 있다. 약이 될지 독이 될지는 차근차근 두고 봐야 할 일이었다. 그래도 노경은을 치유한 김커피가 김창훈을 다잡아 주었다고 한다.
롯데 자이언츠와의 2010년 준플레이오프에서 1경기 ⅓이닝 1탈삼진 무실점을 기록했고, 팀은 2연패 뒤 3연승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삼성 라이온즈와의 2010년 플레이오프에서 2경기 1이닝 1피안타 1볼넷 2실점 2자책점 평균자책점 18.00, 1패를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2승 3패로 탈락했다.
2010년 포스트시즌에서 3경기 1⅓이닝 1피안타 1볼넷 1탈삼진 2실점 2자책점 평균자책점 13.50, 1패를 기록했다.
2011년 8월 14일, 6회 2사 2루에 등판해 이양기를 초구 몸에 맞는 볼로 출루시켰고, 바로 강판되었다. 후속 투수 고창성이 적시타를 허용해 시즌 첫 패를 떠안았다.
2012년 초에는 1군과 2군을 왔다갔다하였다. 6월 2군에서 좌완 불펜으로 활약하며 탈삼진을 조금씩 잡아내는 모습을 보이며 7월 다시 1군으로 콜업되었다.
롯데 자이언츠와의 2012 팔도 프로야구 준 플레이오프 4경기 중 3경기에 등판하여 도합 네 타자를 상대하여 1이닝 1피안타 무실점, 3홀드를 기록하며 제몫을 다했지만 팀은 시리즈 전적 1승 3패로 탈락했다.
이후에는 별 다른 활약을 보여 주지 못한 채 2014년 7월 24일 박민석, 윤도경과 함께 웨이버 공시되어 방출됐다.
3. 지도자 경력
선수 생활을 마감한 이후 평택시리틀야구단 코치로 부임했다. 그 후 레슨장 코치를 하며 지도자 경력을 쌓아나갔고 2020년부터 2023년까지 상우고등학교 야구부 투수코치로 활동했다.4. 여담
- 비교적 선수시절에 팬서비스가 좋다는 평이 많았다.
5.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승률 | ERA | 피안타 | 피홈런 | 4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WHIP |
2004 | 한화 | 31 | 42⅔ | 3 | 2 | 0 | 2 | 0.600 | 7.17 | 52 | 9 | 25 | 22 | 36 | 34 | 1.69 |
2005 | 2 | 2⅔ | 0 | 0 | 0 | 0 | 0.000 | 13.50 | 6 | 2 | 1 | 3 | 6 | 4 | 2.25 | |
2006 | 1군 기록 없음 | |||||||||||||||
2007 | ||||||||||||||||
2008 |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 | |||||||||||||||
2009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승률 | ERA | 피안타 | 피홈런 | 4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WHIP |
2010 | 두산 | 9 | 7⅔ | 0 | 0 | 0 | 0 | 0.000 | 3.52 | 4 | 2 | 3 | 8 | 3 | 3 | 0.913 |
2011 | 27 | 12⅔ | 0 | 2 | 0 | 2 | 0.000 | 6.39 | 11 | 2 | 12 | 11 | 9 | 9 | 1.66 | |
2012 | 28 | 21⅔ | 1 | 1 | 0 | 2 | 0.500 | 2.08 | 9 | 0 | 14 | 15 | 5 | 5 | 0.97 | |
2013 | 3 | 2⅔ | 0 | 0 | 0 | 0 | 0.000 | 3.38 | 4 | 1 | 4 | 3 | 1 | 1 | 2.62 | |
2014 | 1군 기록 없음 | |||||||||||||||
KBO 통산 (9시즌) | 100 | 90 | 4 | 5 | 0 | 6 | 0.444 | 5.60 | 86 | 16 | 59 | 62 | 60 | 56 | 1.49 |
6. 관련 문서
[1] 1년 선배로 마운드에 우완 투수 안영명, 유격수 겸 주장을 맡았던 나주환, 투타겸장 양승학이 있다.[2]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 화랑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전국체육대회. 그 해 첫 대회인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는 광주일고에 패해 준우승했다.[3] 북일고는 한화그룹이 운영하는 재단 소속 학교이다. 때문에 한화 구단 내에서는 북일고 파벌과 비북일고 파벌이 대립을 세우고 있다는 설이 돌며, 신인선수 지명이나 코치진 채용 부문에서 성적이나 실적에 상관없이 북일고 출신을 우선적으로 뽑는 경향이 있었다.[4] 참고로 현재 한화 구단 역사상 신인계약금 최고액은 바로 2011년 입단한 이 주작범.[5] 김창훈이 입단하기 전에는 대졸 투수 이성갑의 3억 7천만 원이 최고액이었다.관련기사 그러나 프로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사라져 먹튀로 평가받고 있다.[6] 반면, 송창식은 그해 풀타임 선발로 뛰면서 140이닝을 소화하며 8승을 기록함으로써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7] 한국프로야구는 군 복무 중인 선수의 트레이드가 금지되어 있어 추후 발표하는 선수라는 형식을 취했다.[8] 윤근영은 한화 이글스가 포기할 리가 없었다. 제구는 안 되더라도 빠른 볼은 던졌으니까.그러나 추후 포기하게 되며 kt 위즈에 특별 지명을 받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