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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12 14:54:29

김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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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영학 독립운동가.pn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877년 2월 10일
황해도 금천군 북면 상삼리 조포동[1]
(현 황해남도 봉천군 연홍리)
사망 1932년 12월 16일 (항년 55세)
러시아 시베리아 이동감옥
직업 목사
종교 기독교 (개신교, 감리회)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580호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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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감리회 목사로서 3.1 운동 만세시위에 참여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했다.

2. 생애

김영학은 1877년 2월 10일 황해도 금천군 북면 상삼리 조포동(현 황해남도 봉천군 연홍리)의 양반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고향 마을에 있던 한문 사숙에서 천자문사서삼경을 두루 읽었으나, 청년기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주색잡기에 빠져 방탕한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가 30세 되던 1906년 토산군 천동면 시변리(현 황해북도 토산군 토산읍)에 있던 장터를 지나다가 어느 한 무리의 감리회 전도대원으로부터 전도를 받았고, 이에 감화되어 권서인(勸書人:성경과 전도책자를 팔면서 전도하는 사람)으로 감리회에 입교하게 되었다.

그 뒤 1911년 정식으로 전도사의 직책을 맡게 되었으며, 1914년 감리교 연회에서 집사 목사로 안수를 받아 정식 목사가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15년 감리교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1918년에는 장로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그는 1917년 경기도 경성부 광희정(현 서울특별시 중구 광희동)에 있던 수구문교회(水口門敎會)[2] 및 수표교교회를 비롯해, 1919년까지 평산교회, 금천교회, 장연교회, 철원교회, 종로교회 등을 전전하며 두루 담임 목사를 맡았다.

그러다가 1919년 초에 양양군 감리교회에 부임하였고, 양양군 양양면(현 양양읍) 성내리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다. 그리고 그해 양양군에서 3.1 운동이 일어나자 목사로서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 이로 인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6개월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출옥 후 그해 10월 초 일찍부터 친분이 있었던 조종대가 소속되어 있던 대한독립애국단에 입단하게 되었으며, 김영학은 강원도단(道團) 산하에 양양군단(郡團)을 결성하고 양양군단장에 취임하였다. 그는 양양군단장으로서 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선전 및 재정자금의 모집을 주도하였으며, 국내의 조직망을 통해 임시정부 연통제와 같이 연락망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양양군단을 결성한 후 그는 김형석(金亨錫)을 비롯해 이근옥(李根玉)·이석규(李錫圭)·김연수(金延洙) 등을 양양군단에 가입하도록 하면서 조직확대를 위해 노력하였다.[3]

그러나 1920년 1월 대한독립애국단을 본부로 두고 있던 강원도단의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김영학 또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23일 경성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소위 정치범죄 처벌령 위반, 증회, 출판법 위반, 보안법 위반, 공갈취재 등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형(미결 구류일수 중 15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았고, 이에 공소하였으나 1921년 3월 14일 경성복심법원 형사부에서 소위 정치범죄 처벌령 위반 혐의에 대해 공소가 기각되면서[4] 결국 수감되었다.

1922년 5월 출옥한 후 그는 가평군 교회에서 시무하다가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가기로 결심하고, 1922년 9월 러시아 프리모리예 지방 블라디보스토크 방면의 조선인 집단거주지인 신한촌(新韓村)으로 파견되는 선교사에 자원하였다. 그리하여 김영학은 신한촌에서 감리회 선교활동 및 교민들을 대상으로한 민중계몽·애국사상 고취 활동에 몰두하였는 한편, 독립운동가 및 항일운동을 지원하였다. 그러다 소련 공산당에서는 김영학에게 선교활동 중지를 요구했으나 김영학이 듣지 않자, 1929년 소련 공산당에 체포되어 10년의 중노동형을 선고받고 시베리아 이동감옥에 투옥되었다.

그 뒤 1932년 12월 16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대통령표창, 1977년에 건국포장,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그리고 1996년 10월 9일 그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여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안장했다.

[1] #[2] 1924년 이후로부터 '광희문교회'로 불리기 시작했다.[3] 출처 : 독립유공자 공훈록 7권[4] 1921년 수형인명부에 따르면 당시 주소지는 황해도 금천군 서천면 시변리(현 황해북도 토산군 토산읍)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