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巖
1. 개요
신라 하대의 귀족, 외교관, 역술인.김유신의 손자인 김윤중의 서손이다.
고조부는 김유신, 증조부는 김삼광, 할아버지는 김윤중이다. 김장청과는 형제 혹은 친척이다.
같은 집안의 김융이 혜공왕 대에 반란을 일으켜 가야계 김씨(김해 김씨) 가문이 신라 하대에 많이 떨어졌지만 김암은 크게 연좌되진 않았는지 계속 관직을 지냈고, 김암의 이름과 명성이 8세기 당시 당나라와 일본까지 알려질 정도였다고 한다.
그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부록에 실려있으며, 일본 기록인 속일본기에도 등장한다.
2. 생애
어릴 때부터 성품이 총명하고 민첩했으며 방술(方術, 도교적 수행법)을 익히는 것을 좋아하였다고 한다.젊을 때 이찬에 올랐다고 되어있다. 이찬은 신라의 17관등 가운데 둘째 등급이다. 그러나 이 부분은 김유신행록의 과장 혹은 노년에 이찬이 된 것을 젊을 적으로 잘못 기록된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은데, 일단 신라 사회에서 아무리 금수저라도 어릴 때는 좀 아래 관등부터 시작해 노년기에 이찬을 다는 것이 대부분이다. 게다가 그는 서손 출신인데다 그가 역임한 관직들이 대부분 6두품에 해당하는 관직이기 때문. 결정적으로 속일본기에 실린 신라의 국서에는 일본 파견 당시 김암의 관등이 급찬이라 적혀 있다.
아무튼 젊을 적에는 당나라에 숙위학생 신분으로 유학을 갔다왔다. 이 시절 스승에게 음양가의 술법을 배웠다고 한다. 한 가지를 들으면 세 가지를 깨달아 스승의 가르침을 응용해 《둔갑입성지법(遁甲立成之法)》을 지었다. 단순한 도술만이 아니라 천문학, 지리학, 역법 등도 배워왔다.
혜공왕 재위 기간인 당 대력(大曆; 766년~779년) 연간에 신라로 귀국해 천문학을 관장하는 사천대박사(司天大博士)가 되었다. 이후 양주, 강주, 한주의 태수와 패강진의 두상(頭上) 등 지방관을 역임하고 다시 수도에서 집사시랑(執事侍郞)직을 맡았다.
가는 곳마다 백성에게 선정을 베풀고 특이하게 농사짓는 계절 외 남는 시간에 한가할 때 육진병법(六陣兵法)을 지방 백성에게 가르쳤다고 한다. 패강진에서 근무하던 시절 중국 쪽으로부터 메뚜기떼가 날아왔는데, 김암이 산꼭대기에서 향을 피우고 하늘에 기도하자 비바람이 몰아치며 메뚜기떼가 물러갔다고 한다.
779년[1] 사찬 김난손(金蘭孫), 한나마 설중업(薛仲業)[2] 등과 함께 일본에 외교관으로 파견됐다. 고닌 덴노는 김암이 현명하다고 해서 억지로 붙잡아 두려고 했으나, 마침 김암의 유학 생활 시절 지인인 고학림(高鶴林)이 당나라의 사신으로 일본에 와 있어 서로 만나 기뻐하자 중국에도 알려진 인물을 붙잡아 둘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듬해인 780년 1월 6일 일본 조정으로부터 정5품하의 관위를 받은 후 2월 15일 신라로 귀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