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학교법인 국성·남성·한성·훈성학원 설립자 김길창 金吉昌 | Kim Gil-chang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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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2년 11월 11일 |
경상남도 고성군 | |
사망 | 1977년 12월 11일 (향년 85세) |
부산광역시 | |
본관 | 김해 김씨 |
호 | 순산(郇山) |
가족 | 아들 김근제 손자 김대성 증손자 김동기 |
학력 | 계성학교 (중퇴) 성경학교 (졸업)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 (졸업) |
주요 경력 |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부회장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 경남교구장 학교법인 국성·남성·한성·훈성학원 초대 이사장 경성사범대숙 초대 학장 |
종교 | 기독교 (장로회) |
비고 | 친일파 708인 명단 등재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
서훈 | 국민훈장 동백장 (19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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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종교인, 교육인, 친일반민족행위자.학교법인 국성·남성·한성·훈성학원을 설립한 장본인으로, 1955년 경성대학교의 전신이 된 경남사범대숙를 설립한 후 1966년 한성여자실업초급대학으로 개편하면서 발전시킨 것을 시작으로, 그 밖에도 경성전자고등학교, 계성여자고등학교, 남성여자고등학교, 대동고등학교, 거성중학교, 계성여자중학교, 남성여자중학교, 대동중학교, 남성초등학교를 설립하는 등 부산 지역 사립교육의 초석을 다진 교육 공로자이기도 하지만 그와 별개로 일제강점기 시절 신사참배와 황민화운동에 적극 앞장섰기 때문에 당시 경남 장로계 황민화의 선봉장으로 평가 받기도 한다.
2. 생애
2.1. 초기와 독립운동
1892년 11월 11일 경상남도 고성군에서 태어났다. 1902년부터 창원에 위치한 청계서당에서 한문을 배웠고, 대구 계성학교에 입학했으나 학비가 중단되어 1년을 넘기지 못하고 1911년 중퇴했다. 그 후 창원, 칠원 등지에서 호주장로회 선교사 밑으로 들어가 조사를 지내면서 1915년 경남성경학교를 졸업했고, 1919년 평양신학교에 들어갔다. 같은 해 일어난 3.1 운동 당시 평양장로회 신학생이던 김의창이 우편으로 보내온 『독립신문』을 지인들에게 나누어 주다가 마산경찰서에 10일 간 구금당했다. 그 후 1926년에도 '무기 은닉 및 반일 선동' 혐의로 7일 간 유치장에 갇혔다가 무혐의로 풀려났다. 이때까지는 추후의 행적과 달리 항일 의식을 가지고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2.2. 목회 활동
1923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같은 해 경남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자가 되었다. 1926년까지 거창읍교회를 담임했으며, 1926년부터 1929년까지 부산영도교회를 담임하는 등 경상남도 지역을 위주로 목회 활동을 하다가 1929년 12월부터 1932년 12월까지 일본 도쿄의 조선유학생교회를 담임했고, 1932년 12월부터 1969년 11월 원로목사로 추대될 때까지 37년동안 부산 항서교회를 담임하기도 했다. 1933년 3월부터 조선기독교연합회 회장을 겸했고, 1934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부회장에 선출되면서 기독교계의 거물급 인사로 거듭났다. 1934년부터 1936년까지 연희전문학교 이사를 겸하기도 했다.2.3. 친일 행적
1930년대 기독교계의 거물이 된 후 신사참배 강요에 동조하는 등 적극적인 기독교 친일 활동을 시작했다. 1938년 9월 10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부회장으로써 각 노회 장로들을 이끌고 평양신사를 참배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홍택기, 감리교 신구총리사 양주삼과 김종우, 성결교 목사 이명직 등의 친일 목사들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이세 신궁을 비롯한 일본 신궁들을 참배하고 돌아왔다. 1939년 9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 평의원 겸 경남노회지맹 이사로 활동했다.1941년 5월 경남노회 재산이던 경성성경학원 건물을 매입하여 흥아고등여학원을 창설한 뒤 1943년 4월 흥아실무여학원으로 경상남도 측의 허가를 받아 운영했다. 같은 해 9월 조선임전보국단 경남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2월에는 박희도가 대표로 있던 동양지광에서 주최한 미영타도좌담회에 참석한 뒤 『동양지광』 1942년 2월호에 「영미타도 감상문 — 대의의 이름으로」라는 글을 기고해 "영미타도는 천명이다.", "대일본제국의 정의와 세력으로 격퇴시키는 것은 천명인 것이다. 1941년 12월 8일 미영타도 선전포고는 대동아건설과 공영권 확립의 정초식이었다.", "우리 일억 국민은 영미타도전의 필승의 신념으로 용왕매진하지 않으면 안 되는 동시에 대동아건설을 위한 제일선에서 귀한 생명을 희생하는 황군 용사에게 마음으로부터 감사의 념을 금할 수 없는 바이다."라고 주장했다.
그 후에도 부산 향서교회 담임목사와 장로회 총회 임원과 총회 상치위원을 지내면서 일본 제국의 신사참배와 황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1942년 9월 조선예수교장로회 경남노회장을 맡았고, 1943년 5월 조선예수교장로회가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으로 개편되자 경남교구장이 되었다. 같은 해 6월 경남교구 각 교회 담임자들에게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 실천요목'을 공문으로 보냈으며, 12월 15일에는 마산 신정교회에서 경남교구회와 연성회를 열고 「대동아전쟁과 기독교」라는 주제를 내걸고 강연을 했다. 1944년 11월 마산 신정교회에서 제3회 경남교구회를 개최하여 '전의양양에 관한 좌담회'를 열고, 대전과 감사헌금을 했다. 1945년 7월 개신교 교단들이 통합하여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을 조직할 때 경남교구장을 지냈다.
2.4. 해방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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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15 광복 후, 같은 해 10월에 일본인이 부산에서 운영하던 미시마고등실업여학교 재산 일체를 인수받아 남조선고등여학교로 개칭하고 운영했다. 같은 시기 미군정으로부터 동아대학교 설립인가를 받아 이사장을 맡았고, 1945년부터 1960년까지 부산기독교연합회 회장을 지냈다. 농지개혁 당시 대규모의 땅을 불하받게 되자 1946년 학교법인 국성·남성·한성·훈성학원을 설립하고 1967년까지 이사장을 맡았다.
1949년 3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의해 체포당했다. 반민특위 기소의견서에 따르면 그가 교인의 황민화를 주도적으로 추진했고, 신사참배를 통한 민족 정신 말살에 앞장선데다 경찰과 결탁하여 신사참배 반대 목사와 교인을 탄압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특히 체포된 사유조차 신사참배를 찬성하거나 실천한 데 그치지 않고 반대자들을 밀고했다는 혐의를 받은 것이었다. 더군다나 그는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에 대해 교회를 사리사욕에 이용하다가 실패한 것이라면서 비하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같은 해 6월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반민특위에서 풀려난 뒤 여러 학교 재단의 설립과 운영에 참여하는 등 본격적으로 교육 활동을 시작했다. 1955년 6월 경남사범대숙을 설립하고 초대 학장을 맡았으며, 1961년부터 1962년까지 한국기독교연합회 회장을 지냈다. 1962년 3월부터 1968년까지 부산신학교를 설립하고 교장과 이사장을 맡기도 했다. 1971년 9월 『말씀 따라 한평생』이라는 자서전을 출판했는데 거기서 일제 말기의 친일 행적에 대해 교회를 살리기 위해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변명을 남겼다. 1977년 12월 11일 향년 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